나경아. 안녕. 잘 지내고 있니? 8월 여름은 무더위로 가득하다. 입추가 지나서 더위가 좀 누그러질 만도 한데, 좀처럼 꺾이질 않는구나. 나는 고대하던 백수가 된지 이제 1달 차다. 푹 늘어질 수 있어서 좋다. 요새는 넷플릭스와 새벽을 보내느라 점심에 일어난다. 이렇게 거드름만 피우다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릴까 봐 겁도 나지만 어김없이 다음날 저절로 리모컨에 손이 가니 ‘넷플릭스의 경쟁자는 수면욕이다’라는 운영 모토에 찰떡같은 광신도를 자처하고 있다.
너는 7월 출산한 후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점점 달수가 찰수록 “다들 애가 배 안에 있을 때 편안하다고 하던데, 타인과 몸을 공유하는 건 너무 힘든 일이야. 어서 애가 방을 뺐으면 좋겠어!”라며 얼른 출산하고 싶다는 바람을 ‘방을 뺀다’고 참신하게 표현해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지. 아직 출산도 하지 않은 아이를 타인이라고 말하며 한 존재로 인정하는 시선이 엄마로서 네가 어떤 태도로 아이와 관계 맺을지 알 수 있었어. 너 자신을 엄마라는 이름으로 잃지 않으면서, 누구도 자기 자신이 되는 걸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관계.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존중하고 이해하는 사이가 그려지더라.
오늘은 일회용 기저귀를 1주 1팩, 1달에 240여개를 쓴다고 지구가 걱정된다며 천 기저귀를 ‘당근마켓’에서 알아본다고 했지. <오래된 미래> 의 저자 헬레나 노르베리는 최근 한겨레신문 대담을 통해 ‘우리 시대를 잠식하는 성장 서사에서 벗어나길 바란다’며 다음과 같은 열린 질문을 했어. “당신에게 미래를 위해 지금 소중하게 여기는 우선순위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아이들에게 행복하고 뜻있는 미래를 갖도록 하기 위해 지금 어떤 사회의 모습을 보고 싶은가요?” 그녀는 세계화와 속도 경쟁으로 인해 무너진 지역 단위의 삶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어. 물론, 개인의 실천만이 아닌 정부의 차원에서 세금, 보조금, 규제를 통해 지역화, 분산화를 이루도록 힘써야 한다고 했지. 오래된>
며칠 전에 친구들과 서울로 비건 음식점 투어를 다녀왔어. 지인이 전주에서 비건 술집을 차리고 싶다 해서, 사전에 시장 조사를 위해 다녀왔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서울 지역이 조심스러웠지만, 전주에는 비건 음식점들이 많지 않아 굳이 행차했어. 작년부터 공장식 축산에 반대하고 환경, 동물, 건강을 위해 육고기를 먹지 않고 있어. 넷플릭스에서 ‘더 게임 체인져스’다큐를 본 후 인식이 전환됐어! 통념과 달리 채소에는 고기보다 단백질이 더 많다는 사실과 건강에 더 좋다는 실증적 연구를 보니 안심됐달까. ‘고기 = 단백질 = 힘’이라는 상식은 축산업의 엄청난 로비와 거대 기업이 자리하고 있어.
한국채식연합에 따르면 국내 채식 인구는 2008년 15만 명에 불과했지만, 2018년 150만 명으로 10배로 늘어났어. 요새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어서 핫하지. 기업 입장에서는 새로운 아이템이라 여러 제품을 출시하고 있지만, 환경을 빌미로 ‘그린 워싱’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돼. 그린 워싱은 실제로 친환경적이지 않지만 마치 친환경적인 것처럼 홍보하는 ‘위장환경주의’를 뜻해. ‘스타벅스’같은 세계화된 기업은 플라스틱 프리를 위해 종이 빨대나 재사용컵 캠폐인을 벌이지만 매달 한정판 굿즈를 2012년 연간 40종에서 2020년에는 연간 500종으로 경쟁적으로 늘려서, 아름다운 쓰레기의 또 다른 이름을 아닐지 우려스러워.
그래서 비건 맛집은 어땠냐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비건 초밥 ? 에티컬 테이블(윤리적인 식탁)’이라는 식당이었어. 거기 메뉴들은 ‘연어 없는 연어 초밥’ ‘참치 없는 참치 초밥’ ‘계란 없는 계란 초밥’ ‘광어 없는 광어 초밥’ 같은 메뉴처럼 모두 채소로 기존 물고기들을 대체하고 있었어.
아니, 이게 가능하다는 말이야? 예컨대 파프리카로 참치를, 단호박으로 계란을, 연어는 당근을, 광어는 곤약으로 고유의 빛깔과 형태를 모방하고 또 창조해냈어. 맛도 아주 좋더군! 내가 ‘물고기’라고 말했어? 그 식당에서는 ‘오늘 내가 지켜낸 물고기 아니고 물생물 스티커’라는 굿즈도 함께 식탁 위에 놓여있었어. 물생물(물살이), 아직은 낯선 단어지. 고기라는 용어는 상위 포식자 입장에서 다른 생명체를 ‘먹이’로 보는 시선이 담겨 있잖아. 참치, 연어, 광어는 물고기가 아닌 그 자체로 바다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이라는 걸 우리는 종종 잊는 것 같아.
나경.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 아무것도 되지 못하면 아무 존재도 아닐까 봐 두려워. 우리 사회 밀려난 사람들의 자리는 차별과 고통에 압도되어 불행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있으니까. 도대체 성장 서사를 벗어나는 건 뭘까? 개별 시민의 행동이 많은 걸 바꿔내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 어떤 생명의 미래를 빼앗는 행위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싶어. 아무것도 아닌 존재도 괜찮을 수 있는 회복의 자리에서, 숲과 생명의 이름을 되돌려주고 그 곁을 지키는 사랑의 서사를 쓸 수 있길 바라. 언젠가 친구의 비건 술집에서 너와 네 아이와 함께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기를, 그날까지 우리의 노력이 기후 위기를 돌이키는데 늦지 않기를.
/ 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협동조합 조합원 소해진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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