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6일 무주군 무주읍 일원에서는 ‘특별한 행사’ 하나가 진행돼 이목을 끌었다. 바로 조선왕조실록 적상산사고 봉안행렬 재현 행사였다.
코로나 시대인 요즘에는 ‘위드코로나’가 선포됐다 하더라도 행사라고 하면 어떤 행사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봉안행렬 재현 행사에 대한 호응은 대단히 컸다. 여기저기서 찬사가 쏟아졌다.
봉안행렬 재현단 무리가 남대천교 ‘사랑의 다리’를 지날 때는 근래 보기 드문 인파가 몰들었다. 집합금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장관이었다. 행렬을 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 장면을 자부심·긍지·자랑 따위의 간단한 어휘로 담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의 행적과 치적을 기록해 낱낱이 기록한 보물 같은 존재다. 어찌 보면 조선왕조의 혼과 심장이 담겨 있는 사료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귀중한 것이 내 고장 무주의 적상산에 보관돼 왔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성이라는 면에서 무주의 자랑거리요 보배이자 엄청난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은 1634년 우여곡절 끝에 무주에 봉안됐다 한다. 여진족이 세운 후금(나중에 청나라)이 매우 강성해져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시절이었다. 후금의 존재는 조선에 큰 두통거리였다. 국경선 가까이 묘향산에 보관돼 있던 조선왕조실록이 후금 침략 시 멸실될 수 있는 것도 걱정거리의 하나였다.
묘향산 사고본 실록을 옮겨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실록을 어디로 옮겨야 할지 격론이 벌어졌다.
마침내 낙점된 곳은 무주군(당시 무주현) 적상산. 조정의 왕과 신료들은 적상산으로 이송하는 것이 최선책이라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리하여 1634년 12월 묘향산사고에 있던 13명 임금(태조~명종)의 실록과 일반서적들이 적상산사고로 이송, 봉안된다.
붉을 적(赤), 치마 상(裳). 마치 붉은 치마를 두른 것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적상산이다. 묘향산 조선왕조실록이 이토록 의미심장한 ‘적상산’으로 이송됐던 배경이다.
이송된 조선왕조실록은 300년 가량 적상산에서 무주와 함께했다. 자칫 역사는 흐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아니다. 역사라는 토대 위에 현재가 존재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무주군과 무주문화원은 역사를 사랑하는 ‘붉은 마음’으로 조선왕조실록이 적상산에 봉안되는 순간을 재현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일단 철저한 고증을 끝냈다. 그런 다음, 2019년 처음 재현을 실시했고 2020년엔 코로나 방역차원에서 쉬었으며 지난달 16일 두 번째 재현 행사를 가졌다. “사실성 있게 잘 재현했다.” 이것이 재현에 대한 평이다.
왕조실록을 봉안하는 지역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주는 문화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 자부심은 군민과 군청이 함께 지켜 나가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봉안행렬 재현을 영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문화적 자부심을 제고시키는 좋은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재현 행사를 ‘관광·역사 자원’으로 개발한다면 그 자부심은 훨씬 더 커질 것이다.
재현을 위한 첫걸음으로 무주군은 문화예술의 산실로 꼽히는 최북미술관 1층 전시관에 역사문화 콘텐츠 장을 만들었다. 이곳에 군은 모형물과 함께 반차도(그림)와 디오라마(모형)를 설치해 묘향산 사고본 이안 및 봉안 과정을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 이를 무형문화재로 등록해 무주만의 독특한 역사문화의 맥으로 살린다. /황인홍 무주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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