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지평선 마라톤대회에 출전, 하프(21.0975km)를 달렸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승리와 패배의 역사를 공유한 정읍 인근, 고창 고인돌 마라톤, 부안 마실 참뽕 마라톤과 더불어 즐겨 참가하는 대회다. 고창은 먹거리가 좋아 달렸고 부안은 동네 마실 길이 정겨워 뛰었고 김제는 기록이 잘 나와 선호했다.
하지만 이제 기록은 언감생심이다. 2015년 JTBC 국제 마라톤대회에서 풀코스 3시간 1분 경신을 마지막으로 마라톤 시계를 버렸다. 어느 시인의 시어처럼 접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아는 것이 롱런하는 비결이다.
마라톤은 필자만의 시대를 향한 아방가르드이자 퍼포먼스다. 2004년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맞서 ‘국회탄핵’, 2017년은 ‘정권교체’, 2018년은 ‘종전선언’을 머리띠 두르고 서울 한복판을 달렸다. 2022년 한글날 김제 지평선은 ‘양곡관리법 개정’이 흰머리 노병을 소환했다.
지평선 들판엔 헐값에 팔려나갈 줄 모르는 벼가 가을비에 젖은 채로 누렇게 추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식물과 작물 그리고 풍경이 있을 손가. 벼는 인류의 최고의 발명품이자 신(神)과의 합작품이다. 벼농사는 문명의 시발점이자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완료형이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은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보다 거대한 손이고 뉴턴의 만유인력보다 큰 힘이다.
논이 사라지고 농부가 소멸된 농촌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끔찍하다. 재앙이다. 아니 국가의 종말이다. 산소가 부족하면 한 발짝도 뛸 수 없듯 농부가 없으면 농촌이 소멸하고 급기야 대한민국이 위태롭다. 농부는 식량보급 전사이자 산소공급 정원사이며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인간문화재다.
그러나 이런 세계문화유산 보유자가 우대는커녕 홀대를 받고 있다. 올해 고유가, 고물가, 고이자로 생산비는 40% 급증한 반면 쌀값은 45년 만에 최대 폭락했다. 삭발, 논 갈아엎기 투쟁과 야적시위 등 성난 농심에 놀란 정부는 억지춘향이 격으로 시장격리 45만t, 공공수매 45만t을 제시했고 실제로 가격 반등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미봉책이다. 농민이 언제 어디서 또 떼를 쓰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양곡관리법’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초과 생산량이 3% 이상 돼 쌀값이 하락하는 경우나 쌀값이 전년 대비 5%이상 하락하는 경우 정부가 임의가 아닌 의무적으로 매입해야 농민이 안정적으로 농사에 전념할 수 있다.
하지만 국민의힘 의원들은 “민주당 집권할 때는 왜 못했냐.” 전 정권에 책임을 떠넘기고 생산과잉으로 재정 부담을 가중시킨다며 부정적이다. 2020년 기준 농업총생산 대비 농업보조금은 OECD 평균 13.2%, 대한민국은 6.6%로 쌀 문화권인 일본 10.7%에 한참 뒤진다.
아무런 국정철학이나 집권전략도 없이 오로지 ‘Anything But Moon(문재인 정부가 했던 일은 뭐든 트집 잡는 국정)만을 집착하는 참으로 무능하고 무지한 자들이다. 비속어가 절로 나온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다.
18km 지점에 이르자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새벽이면 조깅 삼아 내장산 10km는 줄곧 뛰었지만 하프는 3년 만이다. 걷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지만 ‘양곡관리법 개정’을 머리띠 두르고 누구 말대로 X팔리는 짓이다. 1시간 39분 36초,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염영선 전북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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