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시인 홍세태(洪世泰1653~1725)의 「유감(有感)」이라는 시에는 자식을 잃어버린 후에 맞은 어느 봄날의 허전함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전에는 우리 아이와 옆집 아이가 함께 놀았었는데, 오늘은 옆집 애만 홀로 왔구나. 봄바람에 꽃다운 풀, 고운 꽃들, 어느새 또 못가에 가득건만(昔與隣兒戲, 隣兒今獨來. 東風芳草色, 忽復滿池臺).”
세월은 가고 산 사람이라서 살다보면 이태원에서 죽은 자식도 더러 한두 시간 씩은 잊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풀과 꽃이 새 생명으로 다시 피어나는 어느 봄날 불현듯 ‘내 자식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부모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참사를 막지 못해서 내 자식이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 절감해야 하는 부모는 그 원통함을 어떻게 삭일 수 있을까?
이태원 참사는 주최 측이 없는 자발적 집회에 대한 통제 매뉴얼이 없어서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크게 터지고 말았다는 점을 설령 인정한다 하더라도 ‘정부 윗선’사람들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주최 측’, ‘매뉴얼’ 이런 거 따지기 전에 “정부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해야한다.”는 큰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10만 이상의 인파가 몰리리라는 점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음에도 행정안전부도, 서울시도, 서울시 지방경찰청도 아무런 예방조치를 안 했다는 점에서 유가족들은 가슴이 찢어질 만큼 억울하고, 국민들은 머리가 쭈뼛거릴 만큼 화가 치미는 것이다. 그럼에도 총체적 책임을 져야할 ‘윗선’은 여전히 ‘주최 측이 없는 자발적 집회’라는 점을 면책의 구실로 삼으면서 참사가 터진 후에 대응을 제대로 못한 사람들에게만 엄정수사와 과학수사의 자를 들이대고 있다. ‘꼬리 자르기’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이다.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인 사마광은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린다 해서 다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은 아니다.… 감동은 진실에서 나온다. 남을 속이려 들면 발꿈치를 돌리기도 전에 상대방이 먼저 알아차린다.”라고 했다. 국가 애도기간에 슬픔에 겨워 매일같이 조문한 사람도 있을 테고, 지금도 이태원 현장을 찾아 헌화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진심어린 조문은 유가족에게 큰 위로가 된다. 그런데 사람은 왼손으로는 네모를 그리면서 오른손으로는 동그라미를 그리기가 쉽지 않다(人莫能左書方而右書圓也-한비자). 동그라미든 네모든 하나를 택해 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그려야 감동을 주는 그림이 나온다. 누구라도 책임을 면하고자 이중의 마음으로 그저 조문을 위한 조문을 한 사람이 없었기를 바란다. 중국 당나라 때 시인 이상은(李商隱)은 “보는 사람이 없다 해서 하나라도 속이려 들지 말라. 다른 날, 곁에 있었던 돌이 말을 할까봐 걱정하게 될 테니(莫爲無人欺一物, 他時須慮石能言).”라고 했다. 우리가 한 거짓말을 돌(石)이 들어뒀다가 나중에 폭로할 수도 있으니 아예 거짓말 할 생각을 말라는 뜻이다. 참사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말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솔직함이 민심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다. 정직한 사과가 용서받는 최선의 길이다. 엄청난 참사의 근본 원인을 꼬리자르기로 속인대서 국민이 과연 속을까? 내 아이 죽은 자리에 봄이 오면 그 분노, 그 한이 다시 살아날 텐데…
/김병기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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