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군 출신 백남운, 역사적 기여 크지만 사회주의자인 탓 철저히 배제
일제치하 사회주의자 서훈 두고 붙붙은 이념 논쟁…역사적 평가 엇갈려
근현대사학회 "한국 근현대사는 사상 격동의 시대, 다각도로 해석 필요"
최근 광주 정율성 공원 조성에 이어 육사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 등 대한민국이 때 아닌 이념전쟁의 늪에 빠져있다. 논쟁의 핵심은 '일제치하 사회주의 노선을 택한 독립운동가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즉, 이들에 대한 역사적 관점이다.
그런 가운데 일제 식민사관에 맞선 역사학자의 생가는 방치되는 반면, 친일행적 인사의 생가는 전북도 기념물로 지정돼 있는 이념 논쟁의 예시가 전북에도 존재했다.
지난 3일 오후 2시 고창군 아산면 반암마을을 찾았다. 20여 가구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적한 마을의 동쪽 끝으로 이동하니 비닐하우스 사이에 위치한 집 한 채가 눈에 띈다. 온통 잡초투성이에 담장과 마당도 없고 방 한 칸과 부엌, 마루가 전부인 초라하고 작은 집이었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버려진 폐가의 정체는 바로 일제시기 사회경제학자 '동암 백남운'의 생가다.
△ 민족사적 공헌 큰 백남운 생가는 폐허로 방치…친일 행적 김성수 생가는 문화재 지정
백남운은 근대적인 요소를 갖추지 못한 조선을 일본이 병합해 발전시켰다는 일제 식민사관에 맞서 한국 역사의 세계사적 보편성을 입증한 민족 사학자였다.
학계에선 백남운에 대해 '일제의 역사 왜곡에 맞선 우리나라 경세사학 선구자'라는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으나 그동안 그의 이름은 교과서에 짤막하게 거론될 뿐, 우리 일상에서 철저히 배제 돼왔다.
실제 백남운이 태어나고 자란 고창군 반암마을엔 그의 생가가 버젓이 존재하지만, 관할 면 사무소는 이곳의 존재조차 모르는 등 철저한 무관심 속에 방치돼 있는 실정이다.
반암마을과 인접한 인촌 김성수 생가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고창군 부안면에 있는 인촌 생가는 집 주인 김성수가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한 의혹이 있음에도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되고 기념 동상이 건립되는 등 지자체의 각별한 관리를 받고 있다.
이처럼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 배경에는 광복 이후 둘의 행적에서 비롯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한 김성수와 달리 백남운은 해방 직후 월북해 북한 정권에 협력했다. 더욱이 그는 6.25전쟁이 끝나자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 김원봉, 박헌영 등과 달리 1970년대까지 북한의 고위직책을 꾸준히 역임한 '빨갱이'에 불과했다.
△ "아직 북한이 있는데" vs "시대상황 고려해야"
일제치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은 국민적인 공감대를 바탕으로 그 범위가 점차 확대돼 왔지만 여전히 대다수가 그 이름이 지워진 채 양지로 올라오지 못하고 있다. 보훈부에 따르면 현재까지 서훈된 독립유공자 1만7700여 명 가운데 사회주의와 관련된 유공자는 채 200여 명이 안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분단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독립 운동을 했더라도 사회주의 경력을 가진 인물을 기리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목소리가 높다.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지난 달 28일 전남 순천역을 찾아 "독립운동가 사이에서 북한에 협력한 사회주의 계열 인물보다 대한민국 존립과 국익에 이바지한 분들부터 기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사회주의자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는 역사 인식이 개선돼야 한다는 반박도 있다.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달 3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친일 행적이 있는 백선엽은 기념하면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겐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시대 착오적인 낡은 이념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논쟁과 관련해 학계는 일제시기 인물 평가는 시대 배경과 개인 사정 등을 다각도로 고려하는 냉철한 역사적 해석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한국근현대사학회 한 연구원은 "일제시기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계열 독립운동이 있을 만큼 사상 격동의 시기였다"며 "북한에 협력한 사회주의자라고 하더라도 역사적 기여에 대해선 온당한 지위와 비중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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