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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남원의 역사 유적  '만인의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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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식 (극작가, 대학로연극인광장 회장)

전주에서 남행하여 지방국도를 따라서 임실 오수를 지나고 남원 시내의 북쪽 입구에 들어서자면, 차창의 바른편에 가슴이 탁 트인 듯 시원하고 광활하고 멋진 언덕배기의 역사 유적지가 첫눈에 들어온다. 유서 깊은 교룡산성(蛟龍山城) 아래의 발치에 자리잡고 있는 그 널따랗게 둥글고 아름다운 큰 무덤이 곧 '萬人義塚'(만인의총)이다. 남도의 요충지 남원성(城)은 지난 날 16세기의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일본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거느린 6만 왜병(倭兵)의 침공을 받고 나라와 향토를 위해 끝까지 성을 지키다가 옥쇄(玉碎) 순절한 비극의 고을이다. 민관군(民官軍) 1만여 명의 인명이 무참히 도륙당하고, 닭새끼 한 마리 개 돼지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조리 불타고 파괴된 시산혈해(屍山血海)의 땅 남원읍성(邑城)!!

그리하여 민관군의 죽음, 만인(萬人)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서 합장(合葬)한 무덤이 곧바로 ‘만인의총‘이다. 오늘날의 유적지 만인의총은 현재의 자리가 아니다. 나의 10대 어린 시절 기억에 의하면 그때의 만인의총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여수(麗水)까지 내려가는 전라선의 남원역(舊驛舍) 구내의 시꺼멓게 쌓인 석탄더미 너머, 철길 아래에 펼쳐져 있는 들녘의 논 가운데 있었다. 사시사철 찬물이 괴어 있는 무논(水畓)의 노배미 한쪽 구석지에 마치 쓰레기처럼 버려진 채 잡초 무성한 작은 조그만 무덤이 ’만인의총‘의 본래 모습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8.15광복과 6.25 한국전쟁이 지나고,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정부는 만인의총을 이장(移葬)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향교동에 ’역사기념관‘을 새로 건축하고 반듯하게 단장한 것이 오늘날의 모습이며, 대한민국의 사적 제272호 남원 만인의총(1만 사람의 의로운 무덤)으로 지명되었다.  

나와 ’만인의총‘과의 첫 인연은 1986년의 일. 때에 나는 국방부의 육군본부 정훈감실에서 남원 만인의총의 연극화 작업을 위해서 극작품(戱曲)의 창작을 위촉을 받았다. 뜻밖에도 생각지 않은 일에다가 더구나 내 고향 땅 남원의 역사유적지가 작품 소재라니! 나는 관련 사료(史料)를 찾는 등 열과 성을 다해서 집필에 매진하였다. 나의 탯자리 남원의 역사유적 이야기라니까, 이 얼마나 큰 행운이며 자랑이고 기쁨이랴.  

연극 <만인의총>(노경식희곡집 제3권-6)은 그해 2군사령부(대구) 휘하 육군무열예술단의 창단작품으로 선정되어 공연을 갖게 되었다. 첫공연의 팡파레는 작가의 뜻에 따라서 작품의 역사적 소재지인 지금의 남원시립도서관(당시 남원소방서)에서 올랐다. 남원시장을 비롯한 남원유지들 및 남원문화원장 등 여러 시민과 문화인들이 관극하고 뜨거운 박수를 보내줬다. 그러고나서는 교룡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아무개 특수부대를 출발점으로 하여, 그해 6월에서 10월 사이에 연대 단위의 예하부대 및 해당지역의 주민위문을 겸하여 총 120여 회의 순회공연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듬해는 또다시 북쪽 휴전선 일대의 일선부대를 1년간 위문공연하는 등 훌륭한 성과를 기록하였다. 여기서 사족(蛇足)삼아 한 가지를 첨언하면, 그 당시 남원시장은 육군본부 정훈감(표명렬 장군)과 작가 본인에게 감사패까지 증여해서 그 기쁨과 영예를 누린 것이 시방도 추억이 새롭다. 그 다음 이야기는 뒤로 미룬다.

/노경식 (극작가, 대학로연극인광장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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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식 #타향에서 #만인의총 #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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