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놀라운 유산이 살아있는 두개의 무덤
백제 최후의 왕릉으로 확인
발굴 및 연구 성과에 따른 체계적 정비방안 필요
익산 쌍릉은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석왕동 산 54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금산(해발 120m) 서쪽 능선 낮은 구릉상에 2기의 원형봉토분이 남-북방향으로 약 180m 떨어져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일찍이 무강왕과 그 왕비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고 쌍릉에 관한 옛 문헌 기록이 분명해 현재 사적 87호(1963.1.21.)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쌍릉 관련 구체적 옛 문헌기록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익산군 고적조에 “쌍릉(雙陵)은 오금사(五金寺) 봉우리의 서쪽 수백 보 되는 곳에 있다”라 하여 쌍릉의 위치를 전하고 있다.
또한 『고려사』지 권 제11 지리 2 금마군조에는 “...후조선(後朝鮮) 무강왕(武康王) 및 비(妃)의 능이 있어 속칭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이라 불리운다”라 하였다.(『高麗史』 志 卷 第十一 地理 二 金馬郡條 “... 又有後朝鮮武康王及妃陵[俗號末通大王陵, 一云, 百濟武王, 小名薯童].”)
더불어 『고려사절요』제24권 충숙왕 16년에는 “3월에 도적이 금마군에 있는 마한의 조상 호강왕의 능을 도굴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일찍부터 쌍릉이 도굴되었던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高麗史節要』第24卷 忠肅王 16年 “三月 盜發金馬郡 馬韓祖 虎康王陵...”)
그런데도 익산 쌍릉에 대한 공식적인 첫조사는 일제강점기인 1917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실시되었다. 조사단은 야쓰이 세이치(1880~1959)를 책임자로 오바 쓰네키치 등으로 구성되어졌으며, 익산 지역의 여타 유적과 함께 조사되었고 조사내용도 무덤 내부의 부장품을 반출할 목적의 약식발굴 형태였다. 그리고 결과도 매우 소략한 보고서와 유리건판 사진, 봉분 및 석실의 실측도만 기록하여 구체적인 조사내용은 파악할 수 없다.
내용은 대략 “예부터 마한시대 왕릉으로 여겨졌으나, 믿기 어렵고 쌍릉의 대묘, 소묘 모두 백제시대 말기의 능묘는 명백하다 ... (중략) 부여군 부여면 능산리 제2호 석곽벽화, 익산군 팔봉면 석왕리 쌍릉의 탐구는 특히 주요하다”라면서 노모리 켄, 오가와 게이키치, 오바 쓰네키치 그리고 야쓰이 세이이치가 확인한 문서이다.
이 보고서의 결론은 무덤의 축조시기를 마한으로 추정하였으나, 발굴결과 백제의 능묘로 확인하였고 능의 주인공은 부여 능산리 고분군과 같은 백제 왕릉급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익산 쌍릉의 본격적인 조사는 2017부터 2019년까지 이루어졌으며 대왕릉의 발굴조사 결과 봉분의 규모는 직경 23m, 높이 4m 내외로 확인되었고, 특히 봉분의 축조기법은 제석사지 목탑지 기단조성과 같은 판축기법을 이용했으며, 석실은 단면 육각형의 전형적인 7세기 백제말 횡혈식 석실분으로, 2매로 이루어진 벽석 위에 1매의 고임석을 두고 천장을 올린 형태로 확인되었다.
더욱 주목되었던 것은 석실내 1개체분의 인골이 관대 위에 일제강점기 당시 제작한 상자 내부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었다. 상자 안의 유골 전수조사 결과 모두 102개의 파편으로 중복되는 뼈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한사람의 뼈로 판명되었고, 분석결과 유골의 주인공은 뼈에서 노화기의 특징 등을 참고해 보건데 남성으로 나이는 50대 이상이며 키는 165~170㎝로 정도로 제법 큰 키를 가진 사람으로 판명되었다.
더불어 대왕릉의 축조는 사비기 왕릉군처럼 주 능선에서 정남으로 분기한 가지능선의 남사면에 조성하는 입지적 특징은 동일하나, 경사면을 L자상으로 삭토하고 석실을 축조하는 횡혈식 석실분과는 다르게 구릉의 정상부를 정지한 후, 석실부를 재굴광하여 석실과 묘광사이를 판축하는 기법을 사용하여 마한의 전통묘제인 분구묘의 특징을 가진다는 점도 규명되었다. 그리고 특히 눈이 가는 특징은 대왕릉에 사용된 양질의 화강암 석재를 활용한 판석이다. 아주 작은 정(釘)을 사용하여 매우 고르게 치석한 단벽, 측벽, 고임석, 개석 그리고 관대는 경이로울 지경이며, 각 석제의 대칭적 배치는 사전에 매우 치밀하게 설계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실의 폐쇄는 1매의 판석을 사용하고 “회”로 마감하였으며 문주석에 홈을 파서 꼭 맞게 폐쇄한 모습은 흥미롭다.
더불어 2021년부터 2023년까지 3차에 걸쳐 시행된 '익산 쌍릉 주변정비 예정지역 매장유산 발굴조사'에서는 백제시대 대형건물지와 수레바퀴 흔적, 수혈 주공 등이 확인되어 당초 조성 당시 쌍릉의 능역을 파악하는데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발굴 결과 및 조사성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이 어렵게 검색하여 직접 익산쌍릉을 방문해 보면 상상했던 모습과 달리 그냥 황망한 그리고 약간은 어색하게 정비된 큰 무덤이 있을 뿐이다. 쌍릉올 가는 길은 좁고 구불구불한 지방도일 뿐만아니라 어디로 향하는 지 모르는 공사차량이 한껏 속력을 자랑하는 도로변에 인접해 있다. 목적지 주자창에 도착하면 흉물스런 건축물이 전망을 가리고 쌍릉으로 가는 길은 이제 막 조성된 시민공원의 산책로 정도로 착각될만한 소로로 정비되어 있다.
역사는 기억하는 만큼 새롭게 태어난다. 유적이 원형을 훼손하지 않은 상태에서 맘껏 상상할 수 있는 컨텐츠 공간으로 정비된다면 그만큼 역사는 풍성해질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익산 쌍릉은 백제 핵심유적 중 “무왕의 사랑과 번영 그리고 영면”을 상징하는 다양한 콘텐츠가 가능한 유적으로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정비방안도 기획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영일 백제문화센터 파견 전북특별자치도 연구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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