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로 확인된 백제 왕궁의 실제모습
다양한 건물지에서 보이는 백제의 실체 확인
'익산 왕궁리유적(王宮里遺蹟)'은 행정구역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634번지 일대이다. 용화산에서 남쪽 능선으로 이어지는 탑리마을의 북편 구릉에 위치한다. 현재 사적 제408호(1998.9.17)로 지정되었으며 201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도 등재된 의미있는 유적지이다.
그런데 최초 왕궁리 유적의 조성 및 운영 세력에 대해 그간 마한 도읍설, 백제 무왕 천도 및 별도설, 안승 도읍설, 후백제 견훤 도읍설 등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왕궁리 5층 석탑과 관련 1976년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조사 성과에 비추어 보면 핵심적 유구는 백제 사비기 무왕대 조성된 것으로 판단되며, 백제 멸망 이후 고려시대에는 사찰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백제 무왕기 궁성으로 조성되었다가 백제말~통일신라시대에 1탑 1금당의 사찰로 변모했던 것이다.
이에 이번 글에서는 그간 발굴성과로 증명된 왕궁리의 각종 유적을 소개하고 그 의미를 살펴볼까 한다. 현재 왕궁리 유적은 시대구분 없이 건물지가 정비되어 있어 유적의 명확한 모습이 일반인의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1976~1977년 시굴조사(원광대 마한백제연구소)가 시행되어 궁궐 담장과 사찰 관련된 시설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후 1989년부터 현재까지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에서 학술조사를 이어오고 있다. 일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조사를 완료한 상황이다.
우선 사찰 건물지 흔적을 살펴보면 궁성 건물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동쪽에 편향되어 남북축선상 5층석탑 – 금당지 - 강당지로 놓여 있으며 석탑 동편 기와 가마터 2기와 강당지 서편 건물지 2기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금당지와 강당지의 중앙은 적심이 없는 구조이며, 사찰 중문지와 회랑은 확인되지 않았다. 강당지 남편에는 3개의 계단시설이 확인되었는데 이 계단은 초기 강당지의 계단으로 추정된다. 한편 5층 석탑 아래에는 동서 16.85m×남북 폭 12.7m의 건물 축기부가 확인되어 석탑이전에는 궁성 관련 시설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궁성 관련 유적이다. 궁성의 외곽은 동서 240m, 남북 490m로 평면 장방형이다. 궁궐 내부는 경사면을 따라 단이 지도록 축대를 쌓아 평탄대지를 조성했으며 정전으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지와 와적기단(瓦積基壇)건물 등 43여기의 건물지가 있었다. 동서 방향으로 4개의 석축과 남북 석축 2개가 확인되어 궁성 내부의 계획적인 조성모습이 확인된다. 그리고 더욱 주목되는 것은 궁성 남동편에 동서 120m, 그리고 남북방향으로 160m의 대규모 내부 성토층을 조성한 것인데 이는 당시 백제의 뛰어난 토목기술을 짐작케하는 유적이다.
성벽 혹은 궁궐 담장은 도성 내부의 궁궐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동벽 492.8m, 서벽 490.3m, 남벽 23.06m, 북벽 241.39mfh 동서 길이가 남북 길이의 1/2인 약간 틀어진 장방향으로 조사된다. 체성부와 낙수용 부석시설 유적이 확인되었으며 동쪽 궁장은 구간별로 돌을 쌓는 방식이 차이나는 모습을 보이며 궁장 내외로 다량의 기와편이 드러났다. 현재 동쪽 궁장 밖으로 마무리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향후 제석사지와 연결하는 어도가 발굴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다음은 대형 건물지 이다. 2005년 조사시 남벽 중앙문지에서 남북일직선상에 위치한 대형건물지가 발견되었는데 규모가 31×15m인 정면 7칸 측면 4칸의 구조였다. 토심구조이며 기단 전체를 판축하는 방식으로 기둥을 받치기 위해 높고 큰 장초석을 놓았다. 이는 건물을 크고 높게 보이게 할뿐 아니라 대형건물지의 기초면과 동서 석축 사이의 높낮이를 고려한 것으로 추정되며 정전급에 해당하는 건물로 이와 유사한 구조의 건물지는 부여 관북리에서와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백제의 궁성 건물지는 기단에 따라 석축기단가 와적기단으로 나뉜다. 왕궁리에서 와적기단 건물지(건물지 10) 기단이 좌우로 나란한 배치된 구조로 발굴되었고 암키와 편을 바깥쪽으로 맞춰 쌓는 형식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암키와 2매를 원형으로 세워 놓은 것이 특이하다. 이런 와적 수법은 대형건물지의 좌측 연결시설과 북쪽 건물지 23에서도 확인되었다.
왕궁 건물지중 가장 미스테리한 건물지는 문지와 정전 사이의 건물지 27이다. 기단 자체도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유적으로 동서 길이가 33m, 남북 길이가 3.64m를 하고 있다. 여러 건축적 측면을 고려할 때 남북 방향으로 긴 건축물로 알본의 나니와 궁, 아스카 궁 등에서 보이는 양상이다. 왕궁리 우측에도 비슷한 규모의 장랑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발견되지 않아 조금 뻘쭘한 형대의 건물지이다. 추후 조사가 더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왕궁리 유적은 조경으로 특히 유명하며 정원과 후원으로 나뉘는 독립된 별개의 공간은 물을 매개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특히 정원유적은 삼국시대 최초로 확인된 백제 조경기술의 총아로 자연친화적이면서 다양한 괴석으로 인해 발굴 당시부터 지금까지 왕궁리 유적의 대표적 발굴유적으로 불리운다. 후원은 궁성의 후반부에 떨어지는 빗물을 모아 자체적 침수 피해를 줄이는 구조로 추정된다. 다만 이 수로와 관련하여 요즘 일제강점기 사진을 이유로 한국전쟁 당시 참호였다는 의견이 제시된 바 있어 향후 이에 대한 연구도 필요해 보인다.
왕궁리 유적중 가장 특이한 건물지는 역시 대형화장실 유적이다. 궁성의 서북편 저지대에 위치하며 이 너머에 공방이 조성되어 있다. 구덩이에 오수나 오물을 저장하였다가 긴 수로를 통해 궁장밖으로 빼내는 구조였을 것으로 보인다. 뒤처리용 나무막대가 총 6점 출토되었고 이 나무 막대는 접촉면이 둥글고 매끄러워 실제로 사용된 것이 확인되어 더 재밌다.
익산 왕궁리 유적의 발굴은 마무리 단계이나 아직 익산의 고대 도시 체계에서 왕궁리 유적을 평가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제석사지-쌍릉-미륵사지로 연결되는 고대 도시 공간의 구조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왕궁리의 발굴은 무척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며 향후 동쪽 궁장에서 제석사지로의 연결로가 확인되면 부여와는 또 다른 백제의 왕궁의 실체가 드러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영일 백제문화센터 파견 전북특별자치도 연구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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