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⑨<홍계훈밀부유서> <양호전기>
홍계훈밀부유서(洪啓薰密符諭書) <홍계훈밀부유서(洪啓薰密符諭書)>는 1894년 4월 2일 고종이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에게 내린 문서이다.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당시 동학농민군이 무장에서 기포한 후 전주성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하자, 조선 정부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홍계훈을 진압군 최고책임자인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였다. 고종에게 유서와 밀부를 하사받은 홍계훈은 장위영 군사 800명을 이끌고 농민군 진압을 위해 출병하게 된다. 유서(諭書)란 지역에 군사권을 가진 관리를 부임시키거나 파견할 때, 임금이 내리는 임명장 및 명령서와 같은 문서를 말한다. 밀부(密符)는 자의로 혹은 역모를 위해 동병(動兵)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임금이 내린 증명패이다. 제1부(符)부터 제45부까지 존재했으며, 다음과 같이 활용되었다. 유사시 임금의 비상명령이 내려지면 관원이 간직하고 있던 부 반쪽과 임금이 보낸 부 반쪽을 맞춘다. 두 개의 반쪽 부가 의심할 바가 없이 일치하면 명령대로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국왕이 밀부를 해당 관원에게 발급할 때, 유서도 함께 내렸다. 관원은 이 유서를 생명과 같이 귀중하게 여겨 유서통(諭書筒)에 항상 지니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홍계훈밀부유서>는 가로 67cm ,세로 56cm의 크기로 되어있다. 첫 행에 ‘유(諭)’자를 쓰고 바로 아래에 품계인 숭정대부(崇政大夫), 관직인 친군장위영(親軍壯衛營) 정령관(正領官) 양호초토사, 성명인 홍계훈을 기재했다. ‘경수위양호(卿受委兩湖)’로 시작한 3행부터 9행까지는 그 임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비상시 군사를 동원할 때는 함부로 하지 말고 반드시 임금이 내리는 밀부와 합쳐보아 의심할 바 없이 명확한 경우에만 명령대로 군대를 동원하라’는 취지의 내용을 기록하여 압(押)한 제38부를 내렸다. 마지막 10행에는 연호와 월일인 ‘광서 20년(光緖二十年) 1894년 4월초2일(四月初二日)’을 적고 ‘유서지보(諭書之寶)’를 5곳에 국왕문서임을 확인하는 고종의 직인이 찍혀있다. <홍계훈밀부유서>의 원문과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諭崇政大夫 親軍壯衛營正領官 兩湖招討使 洪啓薰 (유숭정대부 친군장위영정령관 양호초토사 홍계훈) 卿受委兩湖軆任非輕 (경수위양호체임비경) 凡發兵應機安民制敵 (범발병응기안민제적) 一應常事自有舊章慮 (일응상사자유구장려) 或有予與卿獨斷處置事非密符莫可施爲 (혹유여여경독단처치사비밀부막가시위) 且意外奸謀不可不預防如有非常之命合符無疑然後當就命 (차의외간모불가불예방여유비상지명합부무의연후당취명) 故賜押第三十八符卿其受之故諭 (고사압제삼십팔부경기수지고유). 光緖二十年四月初二日 (광서이십년사월초이일) 숭정대부 친군장위영 정령관 양호초토사 홍계훈에게 교유한다. 경이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에 관한 일을 위임받았으니 책임이 가볍지 않다. 무릇 병사를 출동시켜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것은 백성을 편안히 하고 적을 제압하는 것이다. 일체 평상시 사안은 자연히 옛 법도가 있다. 그러나 혹여 내가 경과 독단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밀부(密符)가 아니면 시행할 수 없다. 또 뜻밖의 간사한 계략을 예방하지 않아선 안 되니 만약 비상한 명이 있으면 밀부를 합쳐서 의심이 없는 뒤에야 응당 명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압(御押)을 찍은 제38밀부를 내리니 경은 이를 받으라. 그러므로 교유한다. 광서 20년(1894, 고종31) 4월 초2일. <홍계훈밀부유서>는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진압군 최고책임자 홍계훈에게 고종이 직접 내린 유서로 국왕문서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 및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 홍계훈의 후손(증손)이 보관하고 있던 것을 2012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입수하였으며 보관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유서와 밀부는 조선시대 군사제도를 연구하는 데 밑거름이 될 중요한 자료이다. <홍계훈밀부유서>는 조선왕조의 거의 마지막에 국왕이 발급한 밀부유서이다. 이후 조선의 군제가 개편되면서 밀부유서는 거의 발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홍계훈밀부유서>는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양호전기(兩湖電記) <양호전기>는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당시 동학농민군이 무장에서 기포하여 전주성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하자, 중앙정부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였는데, 이때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각처(各處)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전보를 날짜순으로 수록한 것으로 1894년 4월 3일부터 같은 해 5월 28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양호전기에서 전(電)은 전보를 의미한다. 조선에 전신이 처음 가설된 것은 외세에 의해서였는데 일본은 1884년 나가사키에서 부산까지 해저 전선을 개통하였고, 그 다음해에 청나라는 서울에서 의주까지 최초의 육로 전선인 서로전선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한발 늦게 1887년 조선전보총국을 설립하여 전신을 통한 한반도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여 서울과 부산을 연결한 남로전선과 서울과 원산을 연결한 북로전선을 가설하였다.(<개항기 전보송달지 연구>, 한미경), 이후 가설된 전신을 통해 홍계훈은 전주에서 중앙의 관료들과 전보를 주고 받으면서 진압활동을 수행하였다. 홍계훈이 주로 전보를 주고받으면서 관련 내용을 보고하고 지시받은 기관은 공사청(公事廳), 혜당댁(惠堂宅), 본영 사또댁(本營使道宅), 수교대신댁(水橋大臣宅), 내서(內署) 등이다. 공사청은 고종 때 왕명을 전달하는 기관이었고, 혜당댁은 민씨척족 세력의 핵심인 민영준이며, 본영 사또댁은 장위영의 최고책임자인 장위사(壯衛使)이며, 수교대신댁은 좌의정 조병세를 말한다. 내서는 당시 권한이 강력하였던 내무부로 보여진다. 내무부(內務府)는 1885년 개화·자강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대궐 안에 설치한 관청이다. 통리군국사무아문(통리내무아문)의 후신으로, 의정부·6조 체제와는 별도로 각종 근대화 관련 업무를 수행하면서 1880년대 후반 국정 운영을 총괄하였다. 갑오개혁으로 정부 조직이 대대적으로 개편되면서 1894년 폐지되었다. <양호전기>는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진압과 관련하여 서울을 출발하여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당시 전황과 정부의 대책에 관련되는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당시 전보를 주고받은 곳이 집권층 내부의 핵심적 위치에 있던 인물이 많았으므로 전주성 공방전과 5월 8일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기까지 집권층의 입장을 잘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5월 5일 내서(內署)의 전보에서는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에 대하여, “귀화지설(歸化之說)은 믿을 수 없다. 기어이 소멸하도록 하되 평민에게 이르러서는 불가불 충분히 신중하게 판단하라”고 하여 동학농민군의 휴전제의를 거절하였지만, 5월 8일에는 그 사자(使者)가 일전에 소지(所志)한 바 민원을 상계(上啓)하고 실시하면 해산하겠다는 공문을 제출하였고 5월 8일에도 비슷한 내용의 공문을 제출하였다고 하면서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받아들였던 사정을 소개하고 있다. 현재 <양호전기>는 2점이 전해지며 1점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2014년 홍계훈의 후손으로부터 입수하여 소장하고 있으며, 나머지 1점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양호전기>는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양호전기>는 당시 정부진압군의 입장과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1차 자료로서의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취어> <양호초토등록> 등의 자료들과 함께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전반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적 자료이다. 또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양호초토영을 설치하고, 최고지휘관으로 임명된 홍계훈이 기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홍계훈(1842~1895) 홍계훈의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재희(在羲), 자는 성남(聖南), 호는 규산(圭珊)이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 민비를 궁궐에서 탈출시킨 공으로 중용되었다. 1893년 3월 동학교도들이 충청도 보은에서 척양척왜의 기치를 내걸고 대규모 집회를 갖자, 장위영정령관(壯衛營正領官)으로 경군(京軍) 600명을 이끌고 출동했었다. 1894년(고종 31) 장위영의 영관으로 있을 때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양호초토사로 임명되어 장위영 군사 800명을 거느리고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급파되었다. 전주·태인·정읍·고창·영광 등지에서 동학농민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전주성을 둘러싸고 거의 매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전봉준의 폐정개혁안이 받아들여져 5월 8일 전주화약이 성립되고 동학농민군이 철수하자 강화병 200명을 남겨 성을 지키게 했다. 그 공으로 훈련대장에 승진하였고, 유길준 등과 협력하여 친일파 박영효 타도에 나섰으나 이듬해인 1895년 8월 일본군이 궁궐을 습격하자 군부대신 안경수와 함께 시위대 병력을 이끌고 방어하다가 일본군에게 피살되었다. 이후 1896년 군부대신에 추증되었으며, 1900년 장충단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