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⑮ 신석정의 시 다시 알기
신석정 창 밖에서는 / 보리수 꽃향기가 진하게스리 / 퍼져오는 것이었습니다. // 그것은 / 내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끝내던 오월 / 그 어느 날이었습니다. -신군! 인젠 신심이 나는가? // 책장에 걸어놓은 염주를 볼 때마다 / 신심이 없는 나를 꾸짖으며 / 석전 스님의 그 기인 인중을 생각합니다.(자책 저음(自責 低吟) 일부)
신석정(辛錫正, 1907-1974) 시인의 호는 석정(夕汀)이다. 위 시는 부안의 석정이 서울에 올라와 1930년 3월부터 1년여 동안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석전 박한영 스님의 지도하에 공부하던 때를 떠올리며 쓴 것이다. 석전 스님의 신심이 나는가?라는 질문에 석정은 저는 불교를 학문으로 배운 것이지 종교로 배운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석정은 이때의 일을 떠올리며 오늘에 이르도록 죄스럽기 짝이 없다.라고 밝힌 바 있다.
석정은 그의 첫 시집 『촛불』(1939)이 나오기 전부터 노장사상과 도연명, 타고르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언급하였던바, 석정의 초기 목가풍의 자연시는 대체로 노장사상을 주류로 하여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노장사상은 자연스러움의 도와 무위(無爲)를 양축으로 하는 사유체계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만물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인식체계이다. 그러한바 인위성을 벗어난 석정시의 먼 나라는 유토피아 내지 무릉도원에 비견된다.
일제의 식민지에서 살아가는 20대 중반의 젊은 시인이 현실과 동떨어진 먼 나라를 노래하는 일을 혹자는 현실도피의 차원으로 이해하여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하나, 먼 나라를 꿈꾸는 일은 어쨌든 현실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세계를 간절히 소망하는 일이다. 어머니, /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 /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석정의 시에서 노래하는 자연을 인위적인 것이 배제된 무위의 자연공간 정도로만 해석하는 일은 석정시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석정이 노래한 자연 내지 먼 나라를 『대승기신론』과 연결하게 되면 그 세계는 수동적인 유토피아 내지 무릉도원이 아닌, 매우 탄력적인 개념이 된다. 그건 비정상적인 세계를 정상적인 세계로 바꾸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담은 내면의 지속적 활동의 한 상징이 된다.
『대승기신론』의 핵심은 여래장(如來藏) 사상이다. 여래란 이미 깨달은 인격을 뜻하며, 진리로써 이루어진 인격이란 의미로 곧 불(佛)을 말한다. 장(藏)은 태장(胎藏)을 말하는 것으로 진여불성이 번뇌에 싸여 있어 현현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즉 여래장 사상은 일체중생 역시 청정한 여래법신을 함장(含藏)하고 있어 여래와 같은 심성을 갖추고 있으므로 중생 역시 여래로 성불할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는 사상이다. 한번 강렬하게 각인된 진리적 개념은 사라지지 않는다. 석정의 시에서 먼 나라는 식민지 상황에서 조국의 본래성 회복을 염원하는 한 상징적 언어가 된다.
석정은 1930년 만해 한용운을 자주 만났었는데, 만해의 시 알 수 없어요와 관련하여 이 시에 등장하는 발자취 얼굴 입김 노래 시는 모두 대자연의 섭리인 우주의 발자취나 얼굴이나 또는 입김이나 노래나 시로 보아 무방할 것이요, 또는 부처님의 그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라고 표현하였다. 『촛불』의 모두(冒頭) 시 임께서 부르시면은 1931년 3월 어머니 이윤옥 여사가 타계한 후 그 해 8월에 발표된 작품이다.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 그렇게 가오리다 / 임께서 부르시면 //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 그렇게 가오리다 / 임께서 부르시면 『대승기신론』의 관점에서 이 시를 해석한다면, 임은 여래장에 함유된 진여(眞如) 즉 자성청정심의 종자를 의미한다 하겠고, 시적 화자는 아직 무명(無明)의 번뇌 속에서 진여 세계를 갈망하는 자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석정이 노래한 자연은 현실도피처의 피동적 대상이 아닌, 실천적 의지를 담고 있는 능동적 개념으로 이해되며, 그의 시는 보다 풍요해지고 미적 요소 또한 깊어지게 된다.
세상이 뒤집어졌었다는 그리고 뒤집어지리라는 이야기는 모두 좁은 방에서 비롯했단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어느 겨울밤 / 새로운 세대가 오리라는 / 새로운 세대가 오리라는 / 그 막막한 이야기는 바다같이 터져 나올 듯한 울분을 짓씹는 젊은 인사로푸들이 껴안은 질화로 갓에서 동백꽃보다 붉게 피었다.(방 일부, 1939) 이 시에는 뚜르게네프의 소설 『그 전날 밤』에 나오는 혁명가 인사로푸가 등장하고 있다. 천년, 만년 후에라도 그 언젠가 분명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화자는 또 다른 인사로푸를 꿈꾼다.
질화로가 달구어진 좁은 방, 울분 속에서 동백꽃보다 붉어진 마음의 근원은 어디였을까. 바깥세상은 비록 참혹하기 이를 데 없지만, 여래장에 내재된 자성청정심을 각성한 자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의 고운 심장 역시 이 무렵의 시다. 하늘이 무너지고 / 지구가 정지하고 / 푸른 별이 모조리 떨어질지라도 // 그래도 서러울 리 없다는 너는 / 오 너는 아직 고운 심장을 지녔거니 // 밤이 이대로 억만 년이야 갈리라구 석정은 제2시집 『슬픈 목가』를 일제의 검열로 발간할 수 없었고, 1939년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가 『문장』지에서 검열 삭제되면서 석정은 문단활동을 중지하고 그럼으로써 민족시인으로서의 지조를 지킨다. 석정은 해방 이후 정치적 혼란기에 다소 정치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고, 혹자는 이 일련의 시에 나타나는 정치적 미숙성을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국의 본래성 회복을 염원하는 간절함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면, 당대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며 쓴 그의 참여시는 전혀 모순되지 않고 순수하다. 이후 정치적 혼란을 뒤로 하고 석정은 전주에 정착하게 되었고, 가람 이병기, 김해강 등과 함께 전북의 문단을 이끌며 2세 교육에 주력한다.
1967년 발간한 석정의 시집 『산의 서곡』의 서(序)에서 조지훈 시인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석정의 청수한 시심에서 석전 노사(老師)의 모습을 회상하기도 하고, 석정의 신비한 대화체의 기법에서 만해 선생의 시심을 느끼기도 한다. 이 모두 다 불타와 타골에 경도했던 석전 사백의 정신의 열력(閱歷)이 살아 있는 한 징표가 아니던가. 조지훈 시인은 석정의 시세계에서 석전 스님과 만해의 『님의 침묵』을 떠올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석정의 축제는 다소 이해된다.
축제도 끝났다. / 가면무도회도 끝났다. 다시금 / 가져야 할 축제를 마련하면 / 그것이 <내일>이라는 희망 속에서, / 무수한 절망과 자살과 투옥은 계산되는 것이다. // 산이여! / 너는 그러기에 오늘도 / 통곡을 생각하는 슬픔 속에 서 있는가? / 통곡하라! / 목 놓아 어서 통곡하라. / <내일!> / <내일>의 축제를 위하여!(축제 일부)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남북의 대치, 좌우익의 처절한 쟁투, 6․25전쟁의 민족상잔,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부패와 독재,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박정희의 개발독재와 유신(維新) 등 그 짧은 시간 속에서 이 땅의 산들은 우리의 피맺힌 역사를 지켜보았다. 이제 내일의 진정한 축제를 위하여 통곡하라는 것이다. 통곡이라는 절차가 없이 어찌 내일의 축제가 도래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무수한 절망과 자살과 투옥은 내일의 축제가 예비될 때 그 가치성이 발휘된다. 일제강점기 부터 이후 격변기 내내 석정이 일관되게 신념을 지키며 창작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래장 사상이 내재된 것임을 간과할 수 없다.
네 눈망울에서는 / 새벽을 알리는 / 아득한 종소리가 들린다. // 네 눈망울에서는 / 머언 먼 뒷날 / 만나야 할 뜨거운 손들이 보인다.(네 눈망울에서는 일부) 석정은 우리네 눈망울을 통해 민족의 밝은 미래를 확신하고 있다. 진여의 종자와 망념의 종자가 혼합된, 대한민국 사회라고 하는 여래장 속에서 시인은 진여의 종자를 발견하고, 여기에서 새벽 종소리도 듣고, 미래에 만나야 할 뜨거운 손들까지 읽어내고 있다. 여기서 나아가 우리는 이산가족의 뜨거운 만남도, 남북의 평화통일도 읽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