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22)난파유고(蘭坡遺稿)>와 <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
1. 〈난파유고(蘭坡遺稿)〉와 〈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 개요 〈난파유고〉와 〈금성정의록〉은 모두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라도 나주의 수성군에 가담하였거나 호응하여 활동한 나주 출신 인사들이 남긴 문집이다. 따라서 〈난파유고〉와 〈금성정의록〉에는 서로 겹치는 내용이 적지 않다. 나주는 동학농민혁명 발발 직후부터 목사 민종렬이 중심이 되어 수성군을 조직하고 농민군의 진입을 저지하였다. 때문에 나주는 운봉, 제주와 함께 전라도에서 농민군 집강소가 설치되지 않은 드문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또 농민군의 1894년 10월 28일에는 나주에 호남초토영(湖南招討營)이 설치되고 목사 민종렬이 호남초토사로 임명된 이후 나주 수성군은 나주와 인근지역의 농민군을 진압하는 거점이 되었다. 〈난파유고〉와 〈금성정의록〉에는 나주 수성군을 중심으로 한 민보군과 농민군이 나주 인근 지역 곳곳에서 벌인 자세한 전투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전라도 서남부 일대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전투 상황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손화중·최경선·오권선‧배상옥 등이 이끄는 나주, 광주, 무안 일대의 농민군 활동에 대해서 다른 자료들에 비해 매우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2. 〈난파유고〉 〈난파유고〉는 나주의 향리가문 출신으로 호장(戶長)을 맡고 있다가 동학농민혁명 당시 나주 수성군 도통장(都統將)에 선임되어 사실상 나주 수성군을 지휘하였던 정진석(鄭錫珍, 1851~1896)의 문집으로 4권 1책이며 1913년에 간행되었다. 정석진의 자는 태완(台完)이며 난파(蘭坡)는 그의 호이다. 정석진이 이끈 나주 수성군은 나주성 수성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난파유고〉에는 정석진의 글 몇 건과 그가 도통장으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농민군을 격퇴한 공을 기리는 나주 유생들의 글, 그리고 나주지방 농민군과 벌인 전투 상황을 소상히 기록한 <정장군토평일기(鄭將軍討平日記)> 및 그의 행장(行狀) 등이 실려 있다. <토평일기>의 서문은 〈금성정의록〉을 저술한 나주 유생 이병수(李炳壽)가 썼다. 〈난파유고〉에는 1894년 7월초에 전개된 나주성 공방전과 10월~11월에 걸쳐 일어난 침산 전투(10월 21일), 용진산 전투(11월 13일), 고막포 전투(11월 18일), 함박산 전투(11월 23일) 등의 전투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토평일기〉말미에는 동학농민군에 의한 장흥 강진 병영의 잇따른 함락 소식과 영암의 상황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특히 수성군과 정석진이 맹활약하던 10월 말 이후에도 수성군의 핵심을 이룬 것은 향리층이었으며, 이들은 수성군에 소요되는 재정을 지원하기도 하였다는 사실도 〈난파유고〉에 잘 기록되어 있다. 한편 〈난파유고〉에는 무엇보다 전라도 서남 지역의 대표적인 전투 가운데 하나였던 고막포(古幕浦) 전투에 대해 전개과정 뿐만 아니라, 각지로부터 농민군이 진격하고 진지를 치는 과정, 이에 대응하여 민보군과 관군이 배치되는 상황 등의 전후 상황이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난파유고〉에 따르면 고막포 전투는 11월 18일 일어났지만, 1894년 11월 17일부터 고막포 주변으로 무안, 함평일대의 농민군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당시 그 일대의 산봉우리 등에 진을 치고 있던 농민군의 수자는 5~6만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어 고막교(古幕橋)까지 퇴각하던 농민군이 수성군의 추격에 쫓겨 조수로 인해 불어난 물에 빠져 죽는 참상 등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한 전투 상황을 적어두고 있다. 3. 〈금성정의록〉 〈금성정의록〉은 나주의 유생 이병수(李炳壽, 1855~1941)의 문집 〈겸산유고(謙山遺稿)〉 권19·20에 수록되어 있다. 나주 일대의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갑‧을‧병 3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기록은 주로 갑편에 실려 있다. 평소에 제자들을 가르치며 교유(校儒)로 살아가던 이병수는 1893년 12월 부임한 나주 목사 민종렬(閔種烈)이 당시 동학이 확산되어 가던 동학에 대응하기 위해 향약을 강화할 때 직월(直月)을 맡아 도약장(都約長)인 진사 나동륜(羅東綸)과 함께 이에 적극 호응하였다. 1894년의 기록에는 먼저 나주의 접주 오권선(吳權善)에 대해 쓰고 있으며, 4월에 목사 민종렬의 주도로 수성군을 조직한 일, 그 직후 민종렬이 전봉준과 글을 주고받은 일, 7월 초에 전개된 나주성 공방전, 이어 8월 13일 전봉준이 찾아와서 나주 목사 민종렬과 담판을 벌인 일, 10월~11월에 걸쳐 일어난 용진산 전투, 침산 전투, 고막포 전투, 함박산 전투 등의 전후 상황과 전투 내용이 매우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을편에는 동학농민군 진압과 관련한 군공을 적은 「초토사보군공별지(招討使報軍功別紙)」, 군공을 인정받고 난 뒤 그 축하 글인 「본주인사하군공록(本州人士賀軍功狀)」, 장성의 유생 기우만(奇宇萬)이 정석진에게 보낸 「토평후기증정장군서(討平後寄贈鄭將軍書)」, 기우만이 쓴 「토평비명병서(討平碑銘竝序)」 등이 실려 있다. 병편에는 1896년에 나주와 장성 등지의 유생들이 일으킨 의병을 관련 사실을 기록하였다. 〈금성정의록〉에는 몇 가지 특기할만한 내용들이 있다. 우선 도통장인 호장 정태완을 비롯하여 주요 직책과 명단, 편제 등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또 각 마을의 청년들을 60개 초(哨)로 나누어 수성군으로 편성하였다는 점, 이들에게는 성 한편에 군막사를 지어 기거하게 하고 군량과 부식도 지급하였다는 사실을 적어핵심 간부들은 모두 전현직 향리층이 맡고 있었다. 다른 자료에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 내용이다. 또 〈금성정의록〉에는 전봉준과 나주 목사 민종렬 간의 서신 교환, 그리고 직접 담판한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즉, 무안(4월 9일 점령)과 영광(4월 12일 점령)을 거쳐 진군하던 농민군은 나주성의 수비가 매우 엄한 것을 보고 함평읍으로 방향을 바꾸어 몇 일 동안 유진하던 농민군이 나주 (공형)에 서신을 보냈다는 사실을 싣고 있다. 이 역시 일부 자료에서만 확인되는 사실이지만, 특히 농민군의 서신에 대해 민종렬이 “명분 없는 군사는 법에 의거하여 마땅히 죽여야 하며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는 답신을 했다는 사실은 〈오하기문〉과 〈금성정의록〉에만 나오지만, 〈금성정의록〉에는 전후 사정이 매우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기록되어 있다. 또 전봉준은 전라감사 김학진과 〈관민상화(官民相和)〉를 합의한 다음 8월 13일 나주 목사 민종렬을 찾아 담판한 전후 사실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담판한 내용이나 상황이 목사 민종렬을 치켜세우는 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지만, 역시 다른 어떤 자료에도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전봉준 공초>에서는 8월 그믐 사이에 전라감사의 ‘영(令)’을 가지고 나주로 가서 민보군을 해산하라고 권고한 것으로 공술하였다) 배항섭(성균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