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정전 70년] 호남전투
6·25 한국전쟁 당시 ‘호남전투’는 북한군이 진출하기 시작한지 11일 만에 호남지역을 빼앗겼다는 이유로 지난 70여년간 조명받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서는 호남에 대한 애국심을 왜곡하며 ‘무혈입성’이라는 지적과 함께 ‘치욕의 전투’라고 까지 이야기 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던 ‘불독’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북한군 최정예 6사단이 호남에서 수일간의 시간을 보낸 덕에 부산을 방어할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11일간 호남에서는 큰 전투는 없었지만 전사(戰史)에 유례없는 빠른 이동을 하던 북한군 6사단의 진군에 맞서 ‘지연전투’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호남의 전역에서 수많은 희생이 발생했다. 지역민들을 지키기 위한 호남 전투경찰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혈서를 쓰고 지원한 호남지역 학도병들 바로 그들이다. ◇파죽 지세 북한군 6사단 방호산 사단장이 이끈 북한군 6사단(이하 6사단)은 개성 북쪽에서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 10분부터 30분간에 걸친 포병 공격준비 사격을 실시한 후 공격으로 전환했다. 6사단은 북한군 중에서도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정예부대였다. 그들의 뿌리가 중국 내전에 참전한 제166사단이기 때문이다. 6사단이 보유한 주요 장비는 T-37 전차 4대, SU-76 자주포(76㎜) 16문, 122㎜ 평사포 8문, 122㎜ 곡사포 16문, 45㎜ 대전차포 48문, 120㎜ 박격포 18문, 82㎜ 박격포 81문 등이다. 다양한 전투경험을 가진 병력들과 최신형 장비를 보유한 6사단의 전투력은 막강했다. 6사단 예하 부대들은 공격 첫날인 6월 27일 한강을 건너 하루만에 김포공항을 점령하고, 영등포 방향으로 진출했다. 7월 3일에는 서울에 진출한 북한군 타 사단들과 함께 수원에 진출해 7월 6일 평택, 7월 8일 천안을 거쳐 서해안을 따라 기동했다. 6사단은 천안~공주 방향으로 향하던 북한군 4사단과 천안~대전 방향으로 진출하는 북한군 3사단을 뒤따라 서해안 축선인 천안~예산 방향으로 진출함에 따라 전투력의 손실없이 서해안을 타고 내려왔다. 6사단은 목포항과 여수항 등을 거쳐 서해안 일대로 우회해 호남지역을 점령하고 마산으로 진격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6사단의 선두부대가 호남지역을 공격한 것은 7월 16일부터다. 이들은 호남지역 진입 직전 603모터사이클연대까지 배속받아 파죽지세의 속도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호남지역의 상황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 육군은 보병 8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호남지역에는 제 5사단이 주둔(예하 2개 연대 중에서 제 15연대는 전주, 제 20연대는 광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부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수도방위에 나서 호남지역에는 국군 병력이 전무했다. 당시 육군본부는 부족한 호남방어선을 위해 전북지역에 7사단을, 전남지역에 5사단을 새로 꾸리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수도권 방어선이 무너져 내리면서 호남지역은 병력 뿐 아니라 무장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국군 정규군이 없는 상황에서 충청, 호남 지역 전투경찰과 해병대원 일부, 징집자 등 급조한 군경 합동부대로 ‘7사단’을 꾸렸지만 이름만 사단일뿐 총기조차 완벽히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북한군 6사단의 주력인 1연대가 충남 논산에 속한 강경읍을, 13연대는 서천 장항읍과 군산 방향으로, 15연대는 익산 웅포면 방향으로 밀고 들어왔다. 당시 제7사단장 민기식 대령은 육군본부에 수차례 무기와 탄약 등을 요청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결국 민 대령은 예하 2개 연대의 후방 이동을 건의하고 무장을 갖춘 사단사령부 요원을 포함한 1개 중대 규모만으로 지역 방어에 임했다. 어떠한 지원책도 마련할 수 없었던 육군본부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7사단 3·9연대를 즉시 부산으로 이동하게 하고 1개 대대를 차출해 지연전을 감행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국군 제1사단이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 미군과 더불어 북한군 3개 사단을 격멸한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전투’의 국군 주요병력이 호남자원이었고, 호남의 병력자원이 다른 전투에 차출되었다는 점 그리고 호남출신 군인들이 이끈 승전은 6·25당시 호남이 패배의 전투만을 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11일간의 호남 지연전투의 중심은 전투경찰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호남은 위기에 처했다. 당시 전남·전북 경찰국은 치안국의 지시에 따라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경찰병력을 전투부대로 개편했다. 국군과 미군 그리고 경찰은 금강저지선을 구축해 방어에 나섰다. 7월 16일 밤 호남경찰은 충남 양촌에서 첫 전투를 시작으로 장항전투, 강경 수복전투를 치르며 지연작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병력 증원으로 전세가 불리하자 익산 방면으로 후퇴했다. 호남 전투경찰들은 만경강 일대에 국군과 함께 조촌(만경강)방어선을 구축했지만 7월 19일 김제경찰서 대원들은 막강한 전력을 가진 북한군 6사단과의 청하전투에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조촌(만경강)방어선이 무너진 후 북한군은 정읍, 순창을 거쳐 광주로 남하했다. 7월 23일 광주 산동교에서 경찰과 국군은 북한군 6사단과 전투를 벌였다. 영광 삼학리에서는 영암, 화순 등 인근 지역에서 차출된 경찰관들이 북한군 제6사단과 지연전투를 벌이다 대부분 전사했다. 북한군은 전차와 중무기를 앞세워 광주와 전남 서부지역을 점령한 후 동부지역으로 진군했다. 호남지역 대부분이 점령된 상황에서도 곡성경찰은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후퇴하지 않고 지역을 사수했다. 곡성경찰 한정일 서장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압록교전투에서 북한군에 승리를 거두었고, 500여 명의 전투경찰 대대를 편성해 태안사에서 전투를 이어나갔다. 북한군은 호남을 빠르게 장악하고 진주를 통해 경상도로 진출할 계획이었으나 이러한 지역 전투경찰들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7월 16일 공격을 시작해 7월 31일이 되어서야 진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항의 결과는 호남지역 경찰대의 궤멸로 이어졌으나, 간발의 차이로 미군이 방어선을 강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호남 전투경찰은 북한군의 잔당인 빨치산들과 전투를 이어가면서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나선 어린 학생들 1950년 7월 25일 ‘화개장 전투’는 전남 일대를 장악한 후 신속하게 동진하려는 북한군 6사단과 맞서 싸운 전투다. 북한군의 하동 진입을 지연시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이 전투는 6·25전쟁에서 전남지역 학도병이 치른 첫 번째 전투였다. 한국전챙 초기 국군 주력이 거의 무너진 상황에서 호남지역의 중요한 임무는 지역방어와 함께 병력을 충원해 전선으로 파견하는 것이었다. 호남지역의 전세가 위험해지자 다급해진 국군 5사단은 청년학생층에 주목해 7월 13일 5사단 15연대는 여수·순천 학도병을 조직했다. 이 과정에서 전남지역 학생이 대거 학도병으로 자원했다. 3~4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호남 지역 학생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혈서를 쓰고 여수·순천·광양·벌교·보성·강진 등지에서 모인 것이다. 학도병으로 자원했던 학생의 출신학교와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순천매산중·매산여고·매산고에서 펴낸 ‘매산백년사’와 ‘한국전쟁시 학도의용군’ 등의 기록에 따르면 17개 고교에서 180여 명의 학도병들이 모였다. 이들은 출정식을 거쳐 중대를 편성한 후 곧바로 훈련에 들어갔다. 훈련은 주로 제식훈련, 총검술, 각개전투 정도였다. 실전훈련을 쌓지 않은 학도병에게도 출동명령을 내릴 정도로 호남지역의 전황은 계속 악화됐고 결국 학도병들은 9일간의 훈련을 마친후 손에 소총 한 자루만 쥐고 전선으로 투입됐다. 학도병들은 출동 다음날 아침에서야 총기의 분해와 결합, 실탄 장전, 조준 방법 등 무기 조작법을 익혔을 뿐 전혀 사격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여수·순천 학도병은 퇴각한 전투경찰 부대와 화개장의 화개교 건너편인 화개파출소 뒤편 야산에 주둔했다. 전차를 앞세운 막강한 화력의 북한군 1000여 명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이들은 북한군의 동진을 지연시킴으로써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줬다.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보면 철모 대신 교모를 쓰고 전투복 대신 교복을 입고 싸운 70여 명의 소년들이 전사하거나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다. 6·25전쟁에서 호남지역 호국영웅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보여준 희생과 공훈을 기리고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우는 호국·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자 지난 2020년 순천에 호남호국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광주일보=정병호 기자 “희생한 경찰들 예우 못받아…보훈처, 참전경찰단체 인정해야” -정전까지 호남전투 모두 참전 -순창 가마골 전투서 얼굴에 총상 “내 앞에서 북한군의 총탄에 쓰러져 간 전우들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현상호(90) 대한민국 6·25참전 경찰국가유공자회 광주시 경찰유공자회장은 70여년 전 호남지역을 지키기 위해 생사를 같이한 전우들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현 회장의 경찰공무원 인사기록카드에는 ‘1951년 4월 20일 순경 임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1934년생인 현 회장은 17살의 어린나이에 전남경찰국 소속 경찰이 됐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전남지역의 많은 경찰들이 전투경찰로 활약하다 희생돼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현 회장은 해양소년단의 경험으로 경찰에 입문하게 됐다. 수많은 전투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현 회장은 어린 나이의 호기에 무서운 게 없었다고 회상했다. 현 회장은 “돌이켜보면 적군의 총탄에 쓰러져 간 사람이 전우가 아니라 나 였을 수 있었을 텐데 그땐 아무 것도 몰랐다”면서 “당시에는 보급이 없고 주먹밥 한개에 의지해 전남과 전북을 두발로 걸어다니며 북한군과 전쟁을 벌였다”고 말했다. 1951년 경찰이 된 후 정전이 될 때까지 호남의 모든 전투현장에 참가한 현 회장은 1951년 8월 전북 순창군 가마골 전투에 투입돼 밤을 새며 고지를 지키다 얼굴을 스치는 총탄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는 6·25 당시 전투 경찰로 고생한 이들이 제대로 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현 회장은 “6·25 경찰참전용사들은 보훈처 단체로 인정 받지 못해 제대로 예우 받지 못한 채 이제는 하나둘 세상을 등지고 있다”면서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경찰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6·25 참전 경찰 단체를 보훈처에서 인정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광주일보=정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