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 세상 밖으로 복권 시키자
진안 천반산 주변에서 정여립 이야기를 흔히 들을 수 있다. 역사적 사실과 전설이 뒤섞어 민초에게 전해진 것이다. 천반산 주변 많은 마을 주민은 정여립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분의 아버지, 할아버지로 전해진 이야기다. 천반산 정상에는 성터를 비롯하여 연단이었다는 장군 바위, 망을 본 망 바위, 훈련하던 뜀바위, 깃발을 꽂았다는 깃대봉이 있다. 이뿐인가, 수백 명분의 밥을 지었다는 돌솥, 무예를 익히게 한 시험 바위, 말바위, 마당바위 등 정여립의 이야기는 수없이 전해오고 있다. 천반산 깃대봉에 <大同>이라는 기를 꽂고 부하 장졸들이 뜀바위를 뛰어넘지 못하면 넘을 때까지 강행하고 시험 바위에서 무예를 어느 정도 익혔는가 시험을 보았다고 한다. 장졸을 모아 정여립은 장군 바위에 서서 정신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역사적 인물이 전설 속의 인물이 되어 전해온다. 역사 속의 억울하게 죽은 자가 민중 속에서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정여립의 정확한 출생지나 출생연대는 알 수 없다. 1540년 전후 전주 남문 부근에서 정희정 부부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 벼슬살이는 오래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정여립의 생각은 시대의 통념을 뛰어넘는 인물이었다. 유비보다 조조를 정통으로 삼은 사마광의 통감을 옳은 말이라 하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당대의 철칙을 그저 제나라 왕촉의 주장일뿐이라고 했으며, 맹자 또한 제나라와 양나라를 옮겨가며 왕도정치를 펴왔음을 지적한 바가 있다. 왕조시대에 어느 누가 이런 주장을 할 수 있겠는가? 정여립은 낙향한 뒤 금구 동곡마을에서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장차 있을지도 모를 외침에 대비하고자 진안 천반산에서 군사훈련을 했다고 한다. 정여립은 선조 때 천여 명의 목숨을 잃게 된 기축옥사의 주인공이다. 반역이란 죄목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정여립이 살던 집터는 역모했기에 연못을 파서 지금은 파쏘라 부른다. 정여립의 반역은 전라도를 풍수상 배역, 모반의 땅이라 낙인찍었다. 그러나 전라도는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매우 풍요의 땅이었다. 풍요로운 땅이 타지방의 위협이 되어 전라도를 외경의 땅, 반역의 땅, 편견으로 보는 땅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의견이 있다. 반역은 민중의 공동체적인 생각으로 불의에 대한 저항이고 행동이다. 그래서 정여립의 반역은 달리 해석해야 한다. 반역은 정당한 저항, 비판, 진보의 왜곡된 표현이다. 왕조의 무능과 부패, 파렴치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은 지극히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시대를 앞서는 인물의 삶은 평탄할 리가 없다. 그들은 권력을 탐하지도, 재산을 축적하지도 않았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백성이 편안하기 위한 일상적인 일도 지배층이 보기에는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역이 되고 역사의 뒤안길에 쓸쓸히 사라지는 것이다. 정여립에 관한 연구와 평가가 다소 있었지만, 여전히 미진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여립의 출생과 활동이 관련된 시·군지역조차 관심이 미미함은 부인할 수 없다. 한 인물을 두고 다양한 모양으로 추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 제일은 인물의 생각, 사상을 정리하는 일이다. 오늘, 민주 공화정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정여립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 모른다. 정여립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재평가하고 정신을 찾는 작업이 본격화 되었으면 한다. 정여립을 전설 속에 묻혀둘 인물이 아니다. 민중의 가슴 속에만 두어서는 안 된다. 세상 밖으로 복권 시키자. / 이상훈 (진안문화원 부원장, 전라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