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과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오랫동안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총 12권으로 완성된 국내 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는 ‘평양의 날은 개었습니다’ 와 ‘다시 금강을 예찬하다’라는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도 포함되어 있다. 최근에는 일본, 중국 편까지 출간되었고 인기는 여전하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우리 문화유산을 대중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고 유홍준 선생은 아주 막강한 문화 권력을 쥐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책이 되었다. 국민은 답사 지침서가 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들고 우리나라 곳곳의 문화유산을 찾아 열광했다. 당시 답사 열풍은 가히 강력한 태풍급이었다. 그런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두 권째를 읽으면서 무척 속이 상했다. 정확하게는 자존심이 상했다. ‘옛길과 옛 마을에 서린 끝 모를 얘기들’ 편에 실린 글 때문이었다. 완주, 진안지역 사람들이 읽게 되면 누구라도 속이 상할 것이다. 유홍준 선생은 수많은 지역을 답사하면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설명하여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그런데 완주, 진안지역을 지나면서는 유독 좋지 못한 기억만 되뇌고 무진장을 지나갔다. 유홍준 선생은 함양·산청을 답사하는 길에 완주군 소양면 화심을 지나면서 ‘가든’이 즐비하다면서 비웃었고, 무진장을 지나면서는 더욱 넋두리가 심해진다. 모래재는 사뭇 길이 험하다 하면서 사고가 잦다느니, 두 번의 답사 실패를 무진장에 눈이 많이 내린 데에서 그 연유를 찾고 있다. 다른 계절에 올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무진장’이란 말을 사용하기 위해 별일을 다 끌어들인다. 지금은 4차선 국도와 고속도로가 뚫려 전혀 다른 길로 진안을 오가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경치가 좋은 모래재를 이용하면서 낭만과 추억에 잠기곤 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내용 중 가장 압권인 부분은 아주 어두웠던 시절의 캄캄한 시골 동네 이야기라며, 1972년 11월 유신헌법 찬반투표에서 무진장 지역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투표율을 보여 주었다고 소개하는, 그 대목은 이렇다. “내가 잊지 못할 무진장의 또 다른 추억은 1972년 11월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때 일이다.…… 무진장은 전국에서 가장 높은 투표율을 보여 주었는데, 투표율은 자그마치 103%였다. 무진장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 캄캄했던 시절의 캄캄한 시골 동네 얘기가 이제는 캄캄한 옛이야기로 전설이 되어서 들려온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 18쪽. ‘무진장’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위하여 순박하게 살아가는 무진장 사람을 조롱하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글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수백만 독자가 이 대목을 읽었을 터인데, 그 독자들이 전북 무진장 지역을 어떻게 생각할까 끔찍하다. 캄캄했던 시절이라 하지만, 무진장 지역은 순진함을 넘어서 미개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대목이다. 기회가 된다면 유홍준 선생과 출판사에 개정판을 낼 때 새롭게 기술할 것을 제안한다. 반드시 개정되기를 바란다.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으로 묶어진 선거구는 유신헌법 찬반 투표가 아닌 당시 국회의원 선거구다. 그리고 진안군 최신 자료를 종합화한 <진안군 향토 문화 백과사전>에 의하면, 1972년 11월 21일 선거에서 진안군은 투표인 수 4만4306명, 투표수 4만 1408명 투표율 93.5%라 기록하고 있다. /이상훈 (진안문화원 부원장, 전라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