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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6월 한반도는 소떼 이야기로 들끓었다. 처음에는 신문의 한 구석에 작은 화제거리 정도로 등장했던 소떼 이야기는 얼마후 온 나라, 온 국민을 들끓게 한 큰 사건이 되었다. 이른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하고 싶다는 발언이 몰고 온 대사건이었다.과연 성사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 회의가 제기됐던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와의 판문점을 통한 방북은 우여곡절 끝에 남북 양측의 허가를 받아냈고, 소떼의 이동을 위해 특수제작된 가축운반용 화물트럭을 사용키로 함에 따라 현대자동차 전주공장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빠른 시일내에 소떼 1000마리를 실어나를 트럭 100대를 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남북 분단 이후 반세기만에 민간인이 정부관리의 동행없이 판문점을 통해 북한 방문을 처음으로 실현한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은 한반도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대사건이었다. 특히 소떼 10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다는 사실은 국내는 물론 전 세계로부터 주목을 받기에 충분한 일대 사건이었으며, 이에 따라 내외신 기자들이 이의 취재를 위해 몰려들었고 세계인의 시선이 정주영 명예회장과 소떼에게 쏠렸다. 이 일은 일명 '정주영 소떼 방북'이라 불리며 미국의 뉴스 전문채널 CNN에도 생중계됐다.또다른 외신들도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남북한이 최초로 휴전선을 개방했다고 다뤘다. 더불어 미국과 중국사이에 '핑퐁외교'가 있었다면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은 '황소외교'라 보도했다.이에 따라 소떼를 운송할 트럭을 제작하는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에도 일단의 눈길이 집중되었다. 분단 이후 최초의 대규모 민간교역을 의미하는 소떼 방북에 쓰일 트럭들은 민간 주도로 남북통일을 견인해 나갈 견인차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북한땅에 현대자동차의 마크를 달고 수출되는 최초의 자동차라는 사실도 적지않은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이렇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차량이었던만큼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으로서는 방북 소떼 운송용 트럭 제작에 각별히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었다. 방북 소떼 운송용 트럭 제작은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이 남북통일의 견인차를 생산해 낸 곳이라는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지만, 자칫 불량이라도 발생해 소떼 운송도중 차가 고장이라도 났다가는 취재를 위해 몰려든 내외신 기자들을 통해 현대 상용차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전 세계에 전파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같은 최악의 상황만 발생되지 않는다면 방북 소떼 운송용 차량 제작은 현대 상용차의 존재를 세계 만방에 알릴 절호의 기회였다. 방북 소떼 운송용 트럭 제작이 시작되면서 정주영 명예회장의 방북과 관련한 내외신 기자들의 관심은 자연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으로도 집중되었다. 그 결과 울산공장의 그늘에 가려 그동안 전라북도에도 현대자동차 공장이 있었느냐는 식으로 그 존재가 일반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의 존재는 순식간에 내외신을 타고 국내 방방곡곡과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이처럼 국내외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소떼 방북을 위한 트럭을 제작해야 하는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의 작업에 임하는 자세는 평소와 같을 수 없었다.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은 방북 소떼 운송용 트럭을 제작함에 있어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정성을 기울임으로써 완벽품질의 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공장장 이하 전 직원이 혼연일체가 되어 혼신의 힘을 다했으며, 그 결과 방북 소떼 1차분 운송용 트럭 50대가 1998년 6월 완성됐다.이렇게 제작된 차량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방북일 하루전 소떼를 싣기 위해 내외신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서산농장을 향해 출발했는데,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은 보전요원들로 조를 편성해 차량행렬에 동참시킴으로써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방북 소떼 운송용 트럭은 무사히 서산농장에 도착, 소떼를 싣고 판문점에서 정주영 명예회장과 합류해 마침내 굳게 막혀 있던 판문점의 벽을 넘어 민간 기업 차원에서는 최초로 북한 땅을 밟았으며,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은 민간차원의 교류시대를 개막해 남북 통일을 앞당기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는 소떼 방북에 참여해 견인차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남북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999년 6월 16일 소떼를 몰고 북한을 방문했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7박 8일간의 방북일정을 모두 마치고 돌아오면서 한반도는 다시 한번 들끓었다. 민간 기업인으로서는 최초로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방문했던 정주영 명예회장이 일반인들에게도 북한을 방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정주영 명예회장은 방북 성과물의 하나로 일반인들의 금강산 관광을 가능토록 한 북한측과의 합의결과를 발표했다.이는 분단 및 6.25를 전후해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지고 떠나와 반백년동안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향수에 시달려 온 실향민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정주영 명예회장 방북시 북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이 임진각까지 정 명예회장을 환송하며 정 명예회장의 방북이 남북분단의 큰 물줄기를 트기를 소망했는데 그 것이 현실로 이뤄진 것이다.금강산 관광사업이 추진되면서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은 트럭에 이어 버스까지 북한땅에 상륙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금강산 관광시 현지에서 관광객들을 운송할 교통수단으로 전주공장에서 생산하는 버스를 사용키로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은 금강산 관광용 버스 제작에 돌입했는데, 한국산 자동차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북한땅에 현대자동차의 로고가 새겨진 트럭을 수출한데 이어 버스까지 상륙시키게 된 것은 물량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은 민간기업 차원에서 트럭과 버스를 북한땅에 상륙시킴으로써 첨단 메커니즘이 필요한 자동차 제작에 관한 능력을 널리 선보임으로써 우리나라의 앞선 산업기술을 북한 주민들에게 알리고, 이를 통해 잘못 알려진 국내 실상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해소하는데 기여함으로써 남북통일의 가능성을 한층 높였다.
국내 최초로 추돌경보시스템을 개발해 냄으로써 국내 자동차 기술을 한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올린 바 있는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은 지난 1997년 10월 국내 대형트럭 사상 최초로 100% 고유모델인 현대 슈퍼트럭을 개발, 다시 한번 국내 자동차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며 기술자립의 시대를 활짝 열였다. 기존 차량 대비 한차원 높은 고도의 선진기술을 적용해 초강력 파워 및 최상의 안전성, 승용차 수준의 승차감을 실현한 21세기형 최첨단 트럭인 현대 슈퍼트럭의 개발은 특히 상용차 개발사상 최대규모인 8~25톤 대형트럭 전 모델을 신규 개발하였다는 점과 디자인 단계에서부터 마지막 생산까지 100% 고유모델로 개발하였다는 점에서 국내 자동차사에 길이 남을 획기적인 일이었다.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은 상용차 전용공장으로는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전주공장 신축을 계기로 21세기 세계 상용차 시장을 선도한다는 야심찬 목표 아래 '운전하기 편한 차, 경제성이 높은 차, 환경을 생각하는 차'를 컨셉으로 개발에 착수, 38개월이라는 개발기간과 800억이라는 막대한 개발비를 투자해 디자인 단계부터 최종 생산까지의 전 과정을 100% 독자기술로 작업을 진행한 끝에 마침내 국내 최초의 대형트럭 고유모델인 현대 슈퍼트럭을 개발해내는 쾌거를 거뒀다.현대 슈퍼트럭은 웅장한 초대형 프론트 글라스, 보다 심플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바디라인의 라디에이터 그릴 및 프론트 판넬, 충돌 안정성이 향상되어 차체에 안정감을 부여하는 국내 최대의 2단 프론트 범퍼, 성능과 기능이 다양해진 일체식 헤드램프 등을 적용해 유럽스타일의 강인함과 동양적인 부드러움을 절묘하게 조화시킴으로써 21세기 대형트럭 디자인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또한 동양적 섬세함이 돋보이는 인간중심의 고품격 인테리어는 고급승용차 감각을 느끼게 하며, 편리한 거주공간 확보를 위해 실내장, 실내폭, 실내높이는 물론 운전자 레그룸(REG ROOM·다리를 뻗을 수 있는 공간)을 국내 최초로 설계해 최적의 운전공간을 확보했고, 항공기 타입의 인스트루먼트 판넬 적용으로 높은 시인성과 함께 우수한 조작성을 확보하였다.현대 슈퍼트럭은 이밖에도 승차감의 획기적인 향상을 위해 시트, 캡, 리어서스펜션에 3중 에어 서스펜션을 적용한 것을 비롯해 프론트 롱 테이퍼 스프링 등 최신기술들을 곳곳에 적용하였으며, 승용차 정도의 소음수준이 확보되어야만 적용이 가능한 CD플레이어를 국내 최초로 적용하였다.21세기 세계시장에서의 대형트럭 부문 선두주자를 지향하는 현대 슈퍼트럭에 대한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의 세심한 배려는 이에서 그치지 않았다. 현대 슈퍼트럭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의한 차량설계를 비롯해 각종 실제 차량 실험을 거쳐 세계적 수준인 69데시벨(db)의 국내 최저 소음진동(NVH)을 실현하였으며, 고유가 시대에 대비한 고출력 저연비 차량의 실현을 위해 터보 인터쿨러를 장착한 저연비의 NEW Q-엔진과 고출력의 410마력 D8AX엔진 중심으로 라인업(LINE-UP)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고객의 입장에 서서 편의성, 차량의 성능, 경제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개발한 현대 슈퍼트럭은 안전성 면에서도 기존의 제품들과는 비교가 되지않는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현대 슈퍼트럭은 기존의 제품들이 사고 발생시 운전자 및 차량의 피해 최소화에 안전의 포인트를 맞추고 있는데 반해 사고위험의 사전예방이라는 예방적 측면에서의 안전성을 실현한 추돌경보시스템(DWS. DISTANCE WARNING SYSTEM)을 도입·적용함으로써 야간운행시 등 운전자의 졸음운전이나 방심으로 인해 발생될 수 있는 각종 추돌사고 위험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현대 슈퍼트럭은 또 추돌경보시스템 적용에도 불구하고 불의의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에 대비해 루프 보강 빔 및 도어 세이프티 바 등을 적용함으로써 충돌 안전성을 극대화시켰으며, 강도 높은 캡을 실현하여 운전자의 안전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은 세계 최고 수준의 상용차 생산시설을 기반으로 연간 2만대의 현대 슈퍼트럭을 생산, 국내외 시장에 본격 판매를 시작했다.기술로 앞서가는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은 경제성과 성능, 품질을 겸비한 제품력을 앞세워 해외시장 개척에 적극 나서는 한편 제품 경쟁력의 제고를 위해 미래형 신제품 개발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중 하나로 부각되고 있는 환경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환경친화적 제품 CNG 버스를 개발한 것을 비롯해 승객의 승하차 편의성을 대폭 높인 초저상버스 등 신제품을 개발해 일반에 선 보이며 국내외 자동차 시장에서의 입지를 더욱 높여갔다.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은 기능장과 품질명장 등을 다수 보유한 기술인의 요람이다.전주공장은 2011년 11월 국가기술자격시험 결과 버스부 이광노 씨와 임광섭 씨가 자동차정비 기능장 자격을 획득한 것을 비롯해, 시설동력팀 위복용 씨와 강성철 씨가 각각 배관 부문과 보일러 부문 기능장을, 상용품질관리부 박정진 씨가 전기 부문 기능장 자격을 획득하는 쾌거를 달성했다.이 중 시설동력팀 위복용 씨는 앞서 보일러 부문 기능장 자격을 획득한데 이어 2관왕에 올랐다.이에 따라 기능장 5명을 추가 배출한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은 총 20명의 기능장을 보유하게 됐으며, 3~4개 부문 기능장 자격을 보유한 사람들도 여럿이어서 전체 자격증 수는 총 29개로 늘어났다.또한 같은 해 12월 상용품질관리부 이길재 기술기사와 트럭부 정진영 기술기사가 서울시 삼성동 코엑스(KOEX) 오디토리움에서 열린 제37회 국가품질경영대회에서 활발한 제안 분임조 활동을 통해 그동안 현대자동차 제품 품질 향상에 기여해 온 공로를 인정 받아 대한민국 품질명장으로 선정되는 경사를 맞았다.이길재 기술기사와 정진영 기술기사가 잇따라 대한민국 품질명장 대열에 합류함에 따라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은 2000년 11월 상용품질관리부 이상헌 기술주임과 상용보전부 김형수 과장이 대한민국 품질명장으로 선정된 것을 시작으로 총 13명이나 되는 품질명장을 배출하는 저력을 과시하고 있으며, 이를 발판으로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품질명가로 굳게 자리를 잡아 나가고 있는 중이다.이 회사가 이렇게 많은 기능장과 품질명장을 배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회사 차원에서 직원들이 자기계발에 매진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배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데다가, 앞서 기능장, 품질명장 등 각종 국가자격증을 획득한 직원들을 중심으로 스터디 모임이 활성화 돼 있어 동료 직원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기 때문이다.바쁜 일과시간과 퇴근 후 시간 등을 쪼개 악착같이 공부한 합격자들의 노력도 주효했다.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은 기능장과 품질명장 수가 늘어나는 것과 비례해 생산제품의 기술 경쟁력도 한층 높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기능장 등 우수 기술인력 양성을 위해 회사 차원의 배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을 방침이다.한편 기능장은 기술기능분야에 종사하는 인력을 기술 수준별로 분류할 때 해당 분야에서 최상급 숙련기능을 가지고 산업현장에서 작업관리, 소속 기능인력의 지도 및 감독, 현장훈련, 경영계층과 생산계층을 유기적으로 연계시켜 주는 현장관리 등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자이며 품질명장은 10년 이상 현장에서 근무하고 품질분임조 활동경력이 5년 이상인 사람 가운데 장인정신이 투철한 사람을 선발해 대통령이 직접 지정패를 수여 하는 제도로, 매년 30여 명 남짓한 소수 인원만이 선정되는만큼 산업현장 근로자들에겐 그 의미나 명예가 남다르다.
1995년 4월 1호차 코러스를 생산함으로써 자동차 산업의 불모지였던 전북지역에 마침내 현대산업의 총아라 불리우는 자동차 공업시대를 열었던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은 세계 최고의 상용차 전용공장을 건설하기 위한 대역사를 계속 추진한 끝에 같은 해 11월 대형버스 공장을 완공, 본격적으로 대형버스 양산에 들어갔다. 1994년 1월 공사에 착공, 총 700억원을 투자해 완공한 전주 버스공장은 부지 11만5500㎡(3만5000평)에 연면적 6만9300㎡(2만1000평) 규모로 대형버스 8000대, 중형버스 4000대 등 연간 1만2000대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버스공장 완공에 따라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은 중형버스 코러스에서부터 에어로타운(AERO TOWN), 에어로시티(AERO CITY), 에어로퀸(AERO QUEEN) 등 중대형 버스 전 차종을 생산할 수 있는 풀라인업 체제를 구축했다.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은 신설한 버스공장에 대형버스 차체를 초대형 페인트조에 잠수시켜 차체에 균일한 피막을 형성하고 차체 하부 및 내측면 등 페인팅을 하기 어려운 곳까지 골고루 양질의 피막을 형성토록 했으며 조립정밀도가 높은 데킹공법 등 첨단공법을 도입해 현대 상용차의 품질을 한차원 끌어올렸다. 또한 전주 버스공장 완공과 때를 맞추어 중후하고 볼륨감 있는 에어로 다이나믹 스타일의 외관에 고성능, 고출력을 발휘하는 디젤엔진을 장착한 신형 대형버스를 개발해 생산에 돌입했다.대형버스의 고급화 추세에 맞춰 현대자동차가 1992년부터 총 300억원의 개발비를 투입해 개발한 신형 대형버스는 고속버스 및 관광버스, 시외직행버스, 자가용버스 등으로 주로 사용되는 에어로퀸(AERO QUEEN), 에어로 익스프레스(AERO EXPRESS), 에어로 스페이스(AERO SPACE) LS, LD 등 4개 모델이며 국내 최초로 전륜에 독립 현가장치를 적용하고 후륜에 슈퍼 4링크 서스펜션을 적용, 승차감이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특히 이들 신형 대형버스는 벤츠, 미쓰비시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대형상용차에 전착도장 공법을 적용함으로써 차체부식 방지효과를 극대화 시키고 내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의 신형 대형버스는 특히 냉난방 겸용 풀 오토(PULL AUTO) 에어컨 시스템과 승하차시 차량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닐링(KNEELING) 시스템, ABS 등 각종 첨단장치를 적용해 편의성 및 안전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킴으로써 운전자 및 승객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차를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현대자동차는 신형 대형버스 개발과 함께 이들 버스를 생산하게 될 전주공장으로 버스업체 사장 등 300여명을 초청해 신차발표회를 갖고 판촉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현대 대형상용차의 전라북도 생산시대가 열렸음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은 버스공장에 이어 1995년 12월 트럭공장을 완공함으로써 2천년대 GT-10 달성을 위한 생산시설 확충을 주목적으로 한 상용차 전용 생산공장 신설을 일단락짓고 전북지역에 중대형 상용차 전차종 생산시스템을 구축했다.버스 1만2000대, 트럭특장차 8만8000대 등 연간 총 10만대의 중대형 상용차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춤으로써 상용차 전용공장으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실현한 전주공장이 중대형 상용차 생산 풀라인업 체제를 구축함에 따라 현대자동차는 승용부문 단일공장으로서는 역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울산공장과 함께 승상용부문 양쪽에서 모두 세계 최대 규모의 공장을 보유하게 되었다.1994년 6월 공사에 착공, 1995년 10월 완공된 트럭 및 특장차공장은 차체 프레임을 생산하는 동양 최대규모의 5000톤 프레스를 비롯해 용접로보트와 승용차 생산공장에서나 볼 수 있었던 각종 최첨단 자동화 설비를 완비함으로써 경제성이나 품질면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제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최적화했다.특히 도장공장의 경우 트럭 CAB 외부 전면 및 내부 도장을 자동기 및 로보트 적용으로 도장작업의 무인자동화를 실현하는 등 설비자동화율을 향상시키는 한편 전처리전착KILLER제순수약품을 SHOP 외부에서 공급하는 등 MATERIAL HANDL G을 크게 개선하고, CCR 운용으로 고장공정에 대한 조기 대처가 가능토록 하는 등 가동률을 향상시킴으로써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켰다.도장공장은 또 탄력적인 레이아웃을 적용함으로써 신차종 투입 및 모델 교체가 용이토록 했으며, 이를 통해 UPH를 20% 향상시켰고 다차종 투입을 고려해 자동기, 로보트 등 자동화설비를 설치해 향후 다차종 투입시 원활한 작업이 가능토록 했다.이밖에도 도장공장은 방청품질 및 외관품질 향상을 통한 품질 확보를 위해 전착공정에 MEDIUM BUILD TYPE 2액형 도료를 적용하고 먼지방지 커버 설치로 먼지 불량을 감소시키는 등 예상되는 모든 품질 저하요인을 사전에 방비할 수 있도록 설계단계에서부터 작은 부분까지 세심한 배려를 기울였으며, 작업자들이 쾌적한 환경 속에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작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작업환경 및 안전에도 만전을 기했다.트럭공장 완공과 함께 중대형 상용차 전 차종 생산시스템을 구축하게 됨에 따라 전주공장은 전 차종 생산시스템 구축 기념식을 갖고 이들 차종의 생산성 향상 및 품질 향상에 총력을 기울임으로써 공장을 조기에 안정시키고 서해안시대에 대비한 전진기지로서의 본연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나간다는 결의를 굳게 다졌다.
1995년 12월 트럭공장 완공 및 생산 개시를 계기로 중대형 상용차 전 차종 생산시스템을 구축한 바 있는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은 1996년 1월 상용제품개발연구소가 연구소 건물 신축공사를 완료하고 울산에서 전주로 이전해 옴에 따라 연구개발에서 생산, 출고까지 모든 업무를 한 울타리 안에서 일괄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풀라인업 체제를 구축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다.상용제품개발연구소의 공장내 이전에 따라 전주공장은 버스, 트럭, 특장차 등 100여종의 중대형 상용차를 독자기술로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특히 직접생산을 담당하는 버스·트럭·특장차 공장과 판매부문의 전주출고사무소가 상용제품개발연구소와 서로 연계되는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생산현장이나 고객이 요구하는 제품 개선사항을 신속히 설계에 반영할 수 있게 돼 고객이 원하는 고품질의 제품을 적기에 생산할 수 있는 발판을 구축했다.상용차 전담 연구인력 700명을 보유하고 있는 상용제품개발연구소는 대용량의 초고속 슈퍼컴퓨터를 설치해 CAD(computer aided desing)를 이용한 스타일링, CAM(computer aided manufacturing)을 통한 차량 제작, CAE(computer aided engineering)를 통한 차량 설계 등을 가능토록 함으로써 컴퓨터 사전제작을 통한 제품 품질 향상 및 개발기간 단축 등을 실현했다. 상용제품개발연구소는 또 차량 충돌시험, 공기역학 시험, 연소 시뮬레이션 등 차체 및 중요부품의 선행개발을 위한 50여대의 해석용 컴퓨터(E.W.S : ENGINEERING WORK STATION)와 세부 설계를 위한 3백대의 그래픽 단말기 등을 보유함으로써 선행개발을 통한 제품 개발기간 단축 등이 가능해져 현대 상용차의 대외 경쟁력을 한차원 높였다.상용제품개발연구소의 전주공장내 이전에 이어 1996년 12월에는 엔진·소재공장이 완공됐다. 1996년 1월부터 이전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시작해 1년여만에 공장 신축을 완료하고 엔진·소재공장이 전주로 이전해 옴에 따라 전주공장은 연구개발에서부터 중대형 상용차용 기초소재 및 엔진 생산, 중대형 버스 및 트럭 전 차종 생산, 출고에 이르기까지 관련 업무 모두를 한 울타리 안에서 일괄 처리할 수 있는 풀라인업 체제를 갖춤으로써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상용차 공장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신설 이전된 엔진·소재공장에는 엔진부문 장비 533대, 소재부문 장비 280여대 등 총 810여대의 3톤 및 고마력 엔진·소재를 생산하기 위한 각종 장비가 설치되었으며, 최신 환경시스템인 CAPTUAL HOOD, CENTRAL SCRUBBER SYSTEM을 설치하는 등 세계 최고 상용차 공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현대자동차는 전주공장 신설을 통해 중대형 상용차의 생산시설을 확충하는 한편 고객의 다양한 요구에 적극 부응하기 위해 생산차종 다양화에도 많은 투자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버스공장 신설에 이어 트럭공장 건설이 한창 진행중이던 전주공장 완공 첫해인 1995년만해도 기존의 생산차종에 더해 고객 선택의 폭을 한층 넓힐 수 있는 다양한 6개의 신차종을 개발, 출시한 것도 바로 이같은 현대자동차의 강력한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현대자동차는 1995년 연초 국내 최대 적재용량을 자랑하는 23톤 덤프트럭을 개발해 시판에 들어간데 이어 6월에는 신형 마이티 이동주유차를 개발, 시판에 들어갔다.2.5톤 마이티에 적재용량 3kℓ의 탱크와 LED 주유기, 호스, 릴을 갖춘 마이티 이동주유차는 100마력의 강력한 출력을 발휘하는 K-1엔진을 장착, 뛰어난 기동력을 발휘하며 탱크 뒷부분에 완전밀폐형 커버를 적용해 주유기 보호는 물론 분실위험을 방지한 것이 특징이다.또한 LED 표시기를 부착한 첨단 주유기를 탑재해 ℓ단위 또는 10원 단위로 주유량 설정이 가능토록 함으로써 유가변동에 따른 유류단가를 수시로 조정할 수 있도록 했으며 유류 재고 및 판매금액 누계까지 손쉽게 알 수 있도록 했다.현대자동차는 마이티 이동주유차에 이어 강력한 출력을 발휘하는 터보엔진을 장착, 고출력 고성능을 실현한 중형버스 코러스 터보를 개발해 같은 해 6월부터 시판에 들어갔다.코러스 터보는 공기 흡입을 극대화해 130마력의 강력한 출력을 발휘하는 터보엔진을 장착해 등판성능을 대폭 향상시켰으며 완전연소 실현으로 엔진소음 및 배기가스를 대폭 감소시켰다.또 대형 와이드 글라스를 부착해 넓은 시야를 확보했으며 중소형 버스로는 유일하게 제동력이 뛰어난 전륜 디스크 브레이크를 부착하고 대형차용 배기 브레이크 시스템, 브레이크 간극을 자동 조정하는 오토 어드저스터 등을 적용해 안전성을 증대시켰다.특히 플로어 높이를 90mm 낮추고 실내고를 92mm 높여 승객의 거주성과 승하차 편의성을 대폭 향상시킴으로써 운전자와 승객 모두를 배려하는 고객지향적인 설계를 실현했다.7월에는 355마력의 강력한 출력을 발휘하는 D8AB 엔진을 탑재하고 강인한 이중찬넬형 샤시프레임에 3만5250ℓ 용량의 탱크를 탑재한 15톤 LPG 탱크로리를 개발, 시판에 들어갔다.15톤 LPG 탱크로리는 탱크내 압력이 높을 때 자동 작동돼 탱크 폭발을 방지하는 안전밸브와 정전기에 의한 탱크 폭발을 방지하기 위한 어스릴을 장착하는 등 높은 안전성을 확보하였으며 탱크의 도장을 열처리함으로써 내구성을 증대시킨 것이 특징이다.또한 차량 탱크의 높이보다 낮은 터널이나 육교 등과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높이 감지봉을 장착했으며 밸브 콘트롤 박스가 열려 있을 때는 차량의 시동이 걸리지 않도록 하는 이충전안전장치를 설치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토록 했다.8월에는 국내 최초로 용접발전차를 개발해 시판에 들어가는 성과를 거뒀다.전동공구류를 사용하는 각종 옥외 공사시 이들 공구의 사용을 위해서는 전원이 있는 곳으로부터 전선을 길게 연결하거나 별도의 재래식 발전기를 운반해 사용을 해야만 하는데, 이같은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 바로 용접발전차다.자동차의 트랜스미션을 이용하여 용접기 및 드릴 등 각종 전동공구류를 작동시킬 수 있도록 용접발전기를 장착한 이 차의 개발로 용접기 및 전동공구를 필요로 하는 각종 옥외 작업이 용이해졌다.마이티 용접발전차는 특히 화물 운송시에도 적재함 사용에 전혀 지장이 없으며 우천시에도 작업이 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이어서 수요자들의 관심이 높았다.현대자동차는 1995년을 마감하는 12월에도 또 하나의 특장차를 개발, 일반에 선을 보였다.사고현장에서 바로 응급조치가 가능토록 특수설계한 코러스 구급차가 바로 그것.코러스 구급차는 국내 최고의 종합병원 의료진으로부터 기술자문을 받아 각종 응급처치 장비들을 설치함으로써 환자의 긴급이송 기능에 더해 사고현장에서 병원으로 가는 동안에도 신속한 구급조치가 가능토록 설계된 선진국형 특수 구급차이다.높고 넓은 실내공간으로 최대 3명의 환자까지 동시에 이송이 가능한 코러스 구급차는 의료진이 서있는 자세로 응급처치를 할 수 있으며 실내에 각종 의료장비를 배치하고 전면과 후면에는 장식장을 설치함으로써 구급차로서의 편의성을 최대한 높인 것이 특징이다.또한 운전석과 밀폐된 응급처치 공간간의 연결을 위하여 인터폰 및 투병유리 칸막이를 설치하고 고정용 산소인공소생기, 물탱크 등 환자의 응급처치에 필요한 주요장비를 두루 갖추었으며 변압기 비치로 110V 및 220V 의료장비 사용이 모두 가능토록 배려했다.
1995년 3월 현대자동차는 공사 착공 1년 3개월여만에 전주 버스공장을 완공하고 곧바로 생산에 착수해 4월 3일 양산 1호차 코러스를 생산했다.2000년대 'GT(Global Top)-10' 달성을 위한 전초기지인 전주공장의 생산 개시는 현대자동차의 서해안시대를 여는 신호탄이자 울산 이외 지역에서의 첫 자동차 생산이라는 회사 내적인 의미 외에도 자동차산업의 불모지였던 전북지역에서의 첫 자동차 생산이라는 대외적인 의미를 함께 갖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총 74만7450㎡(22만6500평)의 전주공장 부지내에 부지 11만4180㎡(3만4600평), 연건평 6만7114.4㎡(2만338평) 규모로 건설된 버스공장에는 총 630억원이 투입됐다.현대자동차는 세계 최고의 상용차 전용공장을 건설한다는 야심찬 목표 아래 신설 버스공장에 국내 최초, 세계에서 3번째로 대형 상용차를 전착도장할 수 있는 전착도장 설비를 설치하고 도장로보트, 용접로보트, 각종 성능테스트 설비 등 첨단 장비들을 대거 도입해 실전 배치했다. 이처럼 첨단 장비들이 생산라인에 대거 실전배치됨에 따라 신설된 전주버스공장은 세계시장에서 선진 경쟁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보다 향상된 품질의 버스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으며, 특히 대형상용차를 전착도장할 수 있는 전착도장 설비의 도입에 따라 내부식성과 도장품질을 대폭 향상시킴으로써 고객이 만족할 수 있는 고품질의 상용차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게 됐다.전주버스공장은 1994년 현재 울산 5공장이 갖고 있던 5000대 내외의 버스 생산능력을 2배 이상 확대한 연산 1만2000대의 중대형 버스 생산능력을 갖췄다.버스공장 완공과 함께 전주공장이 본격적인 생산체제로 돌입함에 따라 현대자동차는 마침내 서해안시대를 향한 역사적인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시장경쟁 체제의 도입과 함께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하면서 장래 세계 최대의 시장이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 중국을 필두로 시장 가능성이 높은 동남아 국가들을 겨냥한 서해안시대의 도래에 대응한 현대자동차의 발빠른 행보가 시작된 것이다.현대자동차는 버스공장 완공을 계기로 서해안에 인접한 전주공장을 전초기지로 삼아 중국 등 잠재적으로 시장가능성이 높은 서해안 인근 국가들에 대한 시장개척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신축은 여러가지로 큰 의미를 갖는다. 전주공장 신축은 먼저 현대자동차가 울산 이외의 지역에 최초로 생산공장을 지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현대자동차 하면 울산, 울산 하면 현대자동차'라는 그동안의 이미지가 전주공장 신축을 계기로 완전히 바뀐 것이다. 이는 곧 현대자동차가 제 2, 제 3공장의 건설을 통해 한 지역에 편중된 지역기업으로서의 위상을 탈피해 전국적인 기업으로서의 위상을 새로 정립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전주공장 신축은 또 현대자동차가 단일공장으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울산의 승용공장을 보유하고 있는데 더해 상용차 부문에서도 세계 최대 규모의 공장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각별한 의미가 있다.전주공장 신축은 엄청난 규모의 잠재 구매력을 갖고 있는 중국시장 등지에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중국은 그 규모를 가늠하기조차 힘들 정도의 거대시장으로써 급부상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의 기업들이 주도권을 잡고자 힘을 기울이는 주요시장으로써 부각되는 상황서 대형 상용차의 생산공장을 서해안지역에 전진배치 시킴으로써 거대시장 중국 공략에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다.전주공장 신축은 또 자동차산업의 불모지인 전북지역에 자동차산업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도 적지않은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이 설립되기 전까지 전라북도의 산업은 전반적으로 기술 집약도가 떨어지는 단순생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전주공장이 들어섬에 따라 40여 부품협력업체들이 유입돼 산업구조 고도화를 위한 기반이 조성된 것이다.뿐만 아니라 전주공장은 도내 업체들 중 신규로 부품협력업체를 선정해 납품을 받는 한편 기술지도를 실시함으로써 지역업체들의 기술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이밖에도 지역 경제 및 사회가 크게 활기를 띠게 된 것도 큰 의미가 있는 일이다. 전주공장 신축에 따라 각종 세금 납부를 통해 지방자치단체의 세수가 크게 증대돼 취약성을 면치 못해오던 지방재정에 큰 도움이 되고 있으며 전주공장 직원 및 협력업체 직원, 그 가족 등이 도내로 대량 유입됨에 따라 주택경기를 비롯한 각종 경기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또 도내 산업기반이 취약해 그동안 취업연령층의 인구가 타 시·도로 상당수 떠났었으나 전주공장의 도내 유입을 계기로 이들 중 상당수가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및 협력업체로 흡수돼 전북 인구 증가의 계기를 마련한 점도 전주공장 유치의 또 다른 의미로 평가받고 있다.
대자동차는 1967년 12월 미국 포드자동차와 합작 회사로 출범했다. 현대자동차의 뿌리는 자동차정비업이다. 창업자인 고 정주영 회장은 1940년대 초 서울에서 아트서비스라는 자동차정비업을 시작했으며 1950년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을 합병해 현대건설을 설립하면서 자본을 축적했다.1967년 12월 자본금 1억원으로 현대자동차를 설립한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이듬해인 1968년 5월 울산에 20만평 부지를 확보하고 연산 3500대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착공했으며 같은 해 11월 국산화율 21%의 코티나 1600대를 첫 생산했다. 현대자동차는 이후 포드와 결별하고 일본 미쓰비시 자동차 공업의 기술 협력을 받아 1976년 국내 최초의 자체 모델인 '포니'를 생산함으로써 국내 자동차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포니는 한국 생산 자동차중 최초로 캐나다에 수출되었지만 미국으로는 배기가스 규제에 걸려 수출되지 못하였다. 이 후에 현대는 엑셀을 생산해 미국시장에 진출했다.1984년 포니의 생산은 50만 대를 넘었으며 이후 1985년 엑셀, 1987년 그랜저, 1988년 쏘나타 등을 잇따라 생산하며 국내 자동차시장을 선도했다. 현대자동차는 또한 1998년 10월 '기아자동차 국제 공개입찰'의 제3차 입찰에서 최종 낙찰자로 선정돼 같은 해 12월 기아자동차의 주식 51% 인수 계약을 체결하며 명실상부한 국내 최대규모의 자동차생산업체로 자리매김했다.실제 지난해 현대자동차는 전 세계에 575만 대를 판매했다. 10년 전인 2001년 246만 대를 판매했던 것과 비교하면 두배가 넘는 신장세다.특히 지난 5월 미국시장에서 10만7426대를 판매하며 미국시장 점유율 10.1%를, 월간 판매 10만대, 시장점유율 10% 시대를 열었다.더욱이 쏘나타와 옵티마(국내명 K5)의 판매 증가로 중형세단시장에서 GM, 포드를 제치고 사상 최로로 1위에 올라서기도 했다.올들어서도 지난 8월까지 77만2659대를 판매해 올해 미국시장에서 처음으로 연간 100만 대 시대를 열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는 현대자동차가 대내외의 어려운 경영환경 속에서도 오히려 공격적인 투자를 지속하며 글로벌 생산기지를 확대해 미국과 유럽 등 선진시장과 중국, 인도, 러시아 등 신흥시장에서 현지 전략형 모델들을 대거 투입한 것이 주효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현대자동차는 2000년 3월 현대그룹 경영권 다툼인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 정주영 회장의 2남인 정몽구 회장은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 등의 자동차 전문그룹으로 분가했으며 5남인 정몽헌 회장은 현대아산과 현대상선, 현대증권, 현대건설 등을 맡으면서 자동자 전문생산업체로 위상을 구축했다. 현대자동차는 세계 100대 브랜드 중 하나이며, 판매량 세계 5위의 자동차 회사이다. 국내에 3개 공장(울산, 아산, 전주)을 비롯하여 미국, 유럽, 인도, 중국 등에 현지 생산법인을 두고 있으며2010년 9월 현재 최대주주는 현대모비스로 20.78%, 정몽구 회장은 5.17%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1967년: 12월 29일 현대자동차(주) 설립. 초대 사장 정주영. △1968년: 코티나 시판. △1968년: 울산공장 착공. △1975년: 울산공장 준공. △1976년: 기업 공개. △1976년: 현대 포니 시판. △1977년: 현대 HD 1000(1톤 트럭, 승합차)시판. △1982년: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로 인해 HD 1000, 바이슨(5톤 트럭)생산 중지.(~1987년까지) △1986년: 그랜저,엑셀 시판. △1986년: 미국 수출. △1986년: 캐나다 퀘벡 주 브로몽 시에 현지공장 착공. △1989년: 브로몽 공장 준공. △1989년: 승용차 생산 100만 돌파. △1990년: 전주 상용차 공장 준공. △1995년: 아산공장 준공.(초창기에는 기아자동차 아산 공장) △1995년: 브로몽 공장 폐쇄.[2] △1996년: 터키공장 준공. △1997년: 강동구 성내동에 쇼룸 개관. △1998년: 10월, 기아자동차(주) 매각 국제입찰에서 낙찰자로 선정. △1998년: 12월 1일, 기아자동차(주)와 기아그룹 관계사 인수. △1998년: 인도공장 준공. △1999년: 4월 1일, 현대자동차써비스(주) 흡수합병. △1999년: 8월, 현대정공(주) 자동차생산부문 양수. △2000년: 9월, 현대자동차그룹 공식 출범. △2001년: 10월, 한국철도차량(주) 및 (주)다이너스클럽코리아 인수. △2002년: 2002년 한일월드컵 공식 파트너 선정. △2005년: 미국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 현지공장 준공. △2006년: 세계 6위의 자동차 회사로 발돋움. △2008년: 체코공장 준공. △2009년: 아반떼 LPI 하이브리드 개발 성공 △2009년: 아반떼 판매 500만대 돌파 △2009년: 싼타페 SUV최초 판매 200만대 돌파 △2009년: 판매 부진을 이유로 일본 시장에서 철수 (유니버스 제외) △2010년: 세계 5위의 자동차 회사로 발돋움. △2011년: 브라질공장 기공
현대자동차는 1967년 12월 설립이래 끊임없는 연구개발 등을 통해 새로운 모델을 출시해왔다.현대자동차의 출시 1호는 미국 포드사와 협력해 국내에 부품을 들여와 조립한 코티나였다.코티나는 1598cc 4기통으로 최고마력 5000rpm, 최고속도 160㎞/h였다.이어 현대자동차는 최초의 국산 고유모델인 포니를 출시했다.포니는 국내 도로 사정에 맞는 경제형 차량이어서 당시 큰 인기를 끌어 현대자동차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다.그 당시 단일 차종으로는 국내 최초로 50만대 생산을 돌파했던 차량이었다.현대자동차는 이어 국내 최초의 국산 중형차인 스텔라를 선보였다.스텔라는 디자인 변화를 통해 현대자동차의 수출 경쟁력을 키운 모델이며 88올림픽 당시 공식 승용차를 지정돼 엄청난 홍보효과를 거뒀다.수출전략형 차량인 국내 최초의 앞바퀴 굴림 차량 엑셀은 미국에서 높은 경쟁력을 보이며 3년간 100만대의 판매고를 올리기도 했다. 국내 고급차의 대표적 브랜드로 자리매김한 그랜져도 현대자동차의 역작이다.1986년 첫 생산이후 1992년 뉴그랜져, 1998년 XG그랜저 시리즈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현대자동차의 대표적 중형차 모델인 쏘나타는 1985년 출시한 첫 모델인 Y1이 실패작으로 끝났지만 이후 1988년 출시한 뉴쏘나타(Y2)가 성공을 거두며 쏘나타3, EF쏘나타, NF쏘나타, YF쏘나타를 연이어 출시하며 국내 중형차 시장을 석권했다.준준형 차량으로는 처음으로 에어백과 ABS를 장착한 엘란트라도 현재자동차의 효자 차종이었다.엘란트라는 1992∼1993년 베스트 셀러로 군림하다 1995년 후속 모델인 아반떼에게 자리를 넘겨주며 생산이 중단됐다.현대자동차는 쌍룡의 코란도가 석권하고 있던 국내 지프시장에 캘로퍼를 선보이며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다.이후에도 현대자동차는 SUV시장에 기폭제 역할을 했던 싼타페를 비롯해 제네시스, 에쿠스 등을 선보이며 국내시장은 물론 해외시장에서도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며 한국자동차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1989년 1일 생산 2톤의 PET 모노필라멘트 생산으로 시작된 삼양사의 산업자재사업은 초기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수출시장을 중심으로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990년대에는 전주공장의 설비 증강과 함께 산자부문의 신증설도 이어져 모노필라멘트에서 고강력사, 스펀본드, 방사형 부직포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혀 나갔다. 삼양사는 1994년 전주2공장에 연산 3000톤 규모의 스펀본드 공장을 완공하고 트리본이란 제품명으로 시판에 돌입했다. 스펀본드는 주로 기저귀, 생리대 등 위생용품과 농업용, 쇼핑백, 양복커버, 자동차 인테리어, 필터류 등에 사용되었다.1998년 1일 소재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스펀본드 공장을 합리화해 연산 4500톤 규모로 생산능력을 확대했다.스펀본드 사업은 위생용품 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1999년부터 3년여동안 생산설비를 풀가동해 생산량의 80%를 본에 수출하며 전례없는 호황을 누렸다.그러나 경쟁사의 증설경쟁으로 규모의 경쟁에서 뒤지며 17%까지 이르렀던 위생용 시장점유율이 5%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에 삼양사는 수요가 늘고 있는 농업용과 생활용 시장으로 진출하며 차별화를 시도했다.또한 타이어코드, 컨베이어벨트 등 산업자재용으로 쓰이는 폴리에스테르 고강력사 생산능력을 1996년까지 연산 2만5400톤으로 증대해 트럭커버와 천막지 등을 만드는 PVC코팅직물 제직회사에 공급했다.특히 국내 타포린 시장의 지속적인 성장세와 토목공사 및 자동차 등 관련 분야의 수요 증가에 부응해 2000년대에는 기능성 부직포, 수지벨트, 지오그리드, 저수축사 등의 품종 개발에 역점적으로 추진했다.그러나 1990년대 중반까지 34개 메이커가 주도했던 산업자재시장은 이후 15개 업체가 난립하고 경쟁규모을 갖추기 위한 증설이 잇따르며 수익구조가 악화됐다.이에 삼양사는 경영구조를 수익중심으로 개편하기 위해 전주공장의 합리화에 중점을 두고 신제품 개발 및 첨단제품으로의 전환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또한 공급이 과잉된 시장에서 부가가치를 확보하기 위해 판매법인의 합작 설립을 추진했다.전주공장은 초 저원가 실현을 목표로 전 생산부문이 참여하는 TOPTPM 활동을 전개해 단기간에 현장의 창의성과 잠재력 발굴, 체질 개선을 꾀했다.노동집약적인 모노필라멘트사업에 대한 합리화 추진과 154㎸ 선로 변경 공사 등도 공장합리화 차원에서 시행됐다.모노필라멘트는 1997년 생산과 판매를 분리하는 분사형태로 합리화했다.이 같은 임가공체제로의 전환은 구조조정의 예봉을 피하면서도 양쪽 모두 부가가치를 살리는데 유익했다.고강력사의 적자를 극복하기 위해 성과를 거둔 품목은 토목섬유 지오그리드 개발이었다.지오그리드는 산업자재용 폴리에스테르 원사를 이용한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그동안 미국과 일본 등에서 100%로 수입에 의존했다.삼양사는 본격적인 고강력사 연구에 착수한지 2년여만인 1998년 개발을 완료했다.이 제품은 건설교통부 산하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서 약 2년여에 걸친 테스트 결과 수입품에 뒤지지 않는 우수성을 인정받아 한국일보가 선정한 100대 우수 특허제품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산업자재사업 흑자 전환은 자생 노력과 고강력사 판매법인인 시스코의 출범이 시너지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삼양사는 1999년 고합, SK케미칼과 세계적인 첨단소재 생산업체인 미국의 얼라이드시그널(현재 하니웰)과 제휴, 하니웰시스코를 설립했다.국내외 경쟁사가 합작해 공동으로 판매법인을 설립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관련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한편 삼양사는 지주회사인 (주)삼양홀딩스, 사업회사인(주)삼양사, (주)삼양바이오팜 등 3개로 인적, 물적 분할을 하고 지난달 1일 지주회사 체제로 새롭게 출범했다. (끝)
삼양사는 1999년까지 화학섬유부문의 합리화를 강도 높게 추진했지만 기존 구조의 틀 안에서 시도한 구조조정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근본적인 구조 개혁없이는 개선 효과 이상의 성과를 창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가장 큰 원인은 국내 10여개 업체간의 과당경쟁이었다.또한 싼 임금을 경쟁력으로 하는 중국과 인도네시아 등 후발국의 추격도 하나의 원인이 됐다.이에 따라 삼양사는 3년째 수백억원의 적자를 내고 있는 섬유부문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자 고심했고, 동종업계도 마찬가지 상황에 직면해 있던 터라 합섬사업의 재편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삼양사와 SK캐미칼, 새한, 한국합섬 등 4개사의 통합을 모색하던 중 새한이 워크아웃 됨에 따라 삼양사와 SK캐미칼의 합섬부문 합병안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두 회사는 마침내 2000년 7월 3일 폴리에스테르 사업부문의 통합에 합의했다.삼양사가 폴리에스테르 장섬유, 단섬유 및 고상중합사업을, SK캐미칼은 폴리에스테르 장섬유 및 단섬유사업을 신설법인에 양도하기로 하고 양사가 50대50 비율로 출자해 (주)휴비스를 출범시킨 것. 공정거래위원회의 승인을 받고 2000년 11일 1일 공식 출범한 (주)휴비스는 자본금 2500억, 부채 4500억, 자산규모 7000억, 매출규모가 1조원에 달하는 국내 최대 폴리에스테르 업체로 급부상했다.이에 따라 전주공장 종업원 1300명 가운데 990명이 통합법인에 소속되며 기존의 전주공장은 규모가 급격히 축소됐다.그러나 그룹의 기간사업인 화섬부문을 분리하는데는 많은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경영진이 용단을 내려 민간 최초의 자율 통합법인을 출범시킴으로써 실의에 빠진 화섬업계에 생기를 불어넣었다.삼양사는 이 통합을 계기로 미래의 핵심 역량 발굴 육성에 집중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통합의 의미를 찾았다.
삼양사 전주공장은 경기가 회복세로 돌아서던 1975년 2차 스테이플 화이버(SF) 증설을 단행해 국내 최대의 생산능력은 물론 기술면에서도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했다.이로 인해 중합능력이 하루 100톤으로 증가돼 물량 부족을 해소해 나갔다.필라멘트는 SF증설이 2차례 이뤄진 것과 달리 초기시설에 의존하다가 1976년 FDY와 DTY의 30톤 증설에 착수했다.이 증설의 특징은 유럽의 최신 기술 및 설비를 도입했다는 점과 필라멘트에 사용할 고품질의 칩 생산을 위해 국내 최초로 연속중합공법을 채택했다는 점이다.내자 90억원과 외자 2000만달러가 투자된 이 증설로 전주공장의 연면적은 3만3000㎡(1만평)으로 늘어났다.1978년에는 국내 경기의 활황에 힙입어 SF 3차 증설에 착수했다. 이 증설에는 최첨단의 합성섬유 기술인 직접방사방식이 국내 최초로 도입됐다.또한 필라멘트도 수요가 늘어나면서 하루 7.5톤의 제2차 필라멘트 증설도 이뤄졌다.1982년에는 제 3차 필라메트 증설도 완료함으로써 연간 1030만 달러의 외화대채 효과와 1200만 달러의 수출 증대 실적을 이룩했다.화학섬유설비의 증설은 1980년대에 보다 집중적으로 이뤄졌는데 이는 1980년 말부터 중국 수출 및 내수가 증가함에 따라 폴리에스테르 경기가 회복됐고 필라멘트 수출이 호조를 보였기 때문이다.실제 삼양사 전주공장은 1983년 무렵 원사의 공급부족 현상이 나타나자 138억원을 투자해 SF 4차 증설 및 필라멘트 4차 증설을 단행해 1984년에 완공했다.이로써 전주공장은 하루 SF 165톤의 생산능력을 보유한 대단위 공장으로 발돋움했고 이어 필라멘트 5차 증설에 나섬으로써 중합연신방사공정의 획기적인 개선이 이뤄졌다.전주공장은 SF 콘쥬게이트 복합사 생산기술도 개발, 1986년 국내 최초로 양산체제를 구축했다. 이는 완구제조업계의 원료 부족을 해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또한 같은 해 하루 80톤 규모의 SF 5차 증설 및 하루 140톤의 중합 증설도 완료, SF생산능력이 하루 400톤으로 늘어나며 국내 최대의 생산체제를 확립했다.이후에도 전주공장은 공급부족 현상을 빚고 있던 필라멘트의 증설을 통해 하루 170톤의 생산능력을 확보하고 1988년에는 하루 80톤 규모의 6차 SF 증설을 완료했다.이와 함께 대규모 SF 증설에 필수적인 중산시설을 갖추기 위해 하루 200톤의 중합 증설에도 착수해 1989년 완공했다.폴리에스테르 연속 중합설비의 가동으로 관련 기술을 축적해온 전주공장은 1980년대 들어 자체 시설과 기술을 활용한 PET병 생산도 적극 검토하게 되었다.PET병은 기존 칩으로는 점도가 낮아 생산이 불가능했지만 일부 공정만 추가하면 원료인 고상중합 칩을 제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 칩은 병의 원료는 물론 산업용 원료로도 사용돼 날로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다. 당시 국내에는 선경과 동양나이론 등 몇 몇 업체만 시장에 진출해 있었고 수출 전망도 밝았다.이에 삼양사는 1985년 12월 전주공장에 하루 20톤 생산능력의 고상중합 칩 생산라인을 구축하고 비섬유분야에 첫 발을 내딛었다.또 소비자의 욕구가 점차 질적으로 우수한 신합섬, 고급 합섬 등으로 옮겨감에 따라 소규모 라인인 1-2KYE를 개조해 특수제품의 생산설비를 갖추는 합리화 노력에도 심혈을 기울였다.거듭되는 증설로 포화상태에 이른 전주공장은 설비 확충에 대비해 1987년 전주 제2공단에 대지 14만8500㎡(4만5000평)을 매입, 1988년부터 필라멘트 8차 증설 및 신규영역 진출을 위한 모노 필라멘트, 고강력사의 신설을 추진했다.삼양사는 1980년대 전주공장 설비 증설을 마무리하면서 모노 필라멘트와 고강력사의 생산기초를 다져 폴리에스테르 사업 다각화의 기반을 닦아 나갔다.특히 1989년 SAMY-10 가동을 계기로 멀티사 등 차별화 제품의 생산비율이 크게 향상됐고 고강력사와 모노 필라멘트 등 산업용 자재 생산이 시작됨으로써 1990년대 비섬유분야로의 진출을 넓혀나갔다.강현규기자 kanghg222@
삼양사 전주공장이 비약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근간에는 삼양종합연구소의 역할이 컸다.1979년 4월 발족한 삼양종합연구소는 다양한 연구개발에 주력한 결과 1984년 폴리에스테르 중공복합섬유를 국내 최초로 생산했다.이를 통해 삼양사는 신소재 개발 우수업체로 선정되는 개가를 올렸고, 그해 기술진흥확대회의에서 이 제품이 '신소재 우수 개발제품'으로 선정돼 은탑산업훈장을 수훈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또 1987년에는 각종 부직포 원료로 사용되는 프리론 저충격 섬유를 개발함으로써 삼양사 화학섬유사업의 내실있는 성장을 주도했다.양과 질에서 세계적 메이커로 부상한 화학섬유부문은 1980년 처음으로 삼양사의 1억불 수출탑 수상을 견인했다.삼양종합연구소는 1980년대부터 본격화된 기술수출에도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1985년 멕시코 Celmex사에 SF기술을 수출한데 이어 파키스탄에도 플랜트 기술과 트리론 제조기술 및 폴리에스테르 제조기술을 수출할 수 있었던 원동력였기 때문이다.이 기간 삼양사의 '트리론(TRIRON)'상표는 파키스탄 정부에 정식으로 등록돼 상표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뿐만 아니라 내셔널 파이버에 SF방사 플랜트를 수출해 현지 기업은 물론 정부 당국자로부터 기술과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받는 등 신뢰를 쌓기도 했다.이를 기반으로 삼양사는 1990년 일보 미쓰비시상사 및 파키스탄의 디완그룹과 합작해 폴리에스테르 SF공장을 건설하는 개가를 올렸다.이후 삼양종합연구소는 1993년 8월 삼양그룹연구소로 승격되면서 그룹차원의 연구개발을 담당하고 있다.
삼양사 창립자 수당 김연수(秀堂 金秊洙18961979)는 1896년 전북 고창에서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개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문묘(文廟)에 배향된 거유(巨儒) 하서 김인후의 13대손으로 태어났다.그는 일제 강점기, 해방공간, 6.25 전쟁, 4.19 와 5.16, 경제 근대화의 시대를 살아 오면서 정치사회적 격동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나라 경제근대사의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다.1921년 일본 경도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수당은 이듬해 형님인 인촌 김성수 선생이 설립한 경성방직을 성공적으로 경영하였으며, 1924년 삼양사를 창업하여 한국 근대기업사의 큰 이정표를 세웠다. 또한 일제 강점기의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만주에 진출, 1939년 '남만방적'을 설립하여 한국기업 해외 진출사의 첫 장을 기록하기도 했다.수당이 기업인으로 남긴 또 하나의 모습은 '사람'이었다.인촌을 도와 고려대와 중앙학원 등의 재정을 적극 지원하며 교육에 극진한 정성을 쏟은 것이나, 만주에서 남만방적을 가동하며 공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개교한 공장학교가 좋은 예다.공장학교를 열며 학습시간을 위해 근무시간을 두 시간씩이나 줄이는 당시 노동관행에도 없는 용단을 내렸다. 또 재정난을 겪던 봉천의 교포학교에 구대농장을 기부하고, 고향 줄포에 수당초등학교를 열도록 지원했다.1939년에는 한국 최초의 민간 장학재단인 양영재단을, 1968년에는 수당재단을 설립하여 장학금 지급 및 연구비 지원 등 인재육성에도 적극 나섰다.1961년 한국경제협의회(현 전국경제인연합회) 초대 회장, 1975년 삼양사 명예회장으로 경제활동을 해오던 수당은 1979년 84세로 영면했다.'인간존중의 원칙' 을 소중히 여기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던 수당은 일관된 실천을 통해 많은 교훈을 남겼다. 이러한 업적들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아 금탑산업훈장, 철탑산업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상했다.
삼양사는 제당과 함께 섬유산업을 향후 주력산업으로 육상한다는 구상아래 사업종목에 대한 검토를 실시한 결과 당시 국내에서는 볼모지와 다름없는 화학섬유에 승부를 걸었다.당시 모방은 이미 시설 과잉상태였고 면방은 진출 여지가 있기는 했지만 경방과 겹치는 부담이 있었기 때문이다.삼양사는 화학섬유 진출을 결정하면서 장차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예측했는데 이러한 전망은 후일 그대로 적중했다.실제 제 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기간을 거치면서 화학섬유산업이 한국경제의 새로운 성장엔진으로 떠올랐다.삼양사의 섬유산업 진출은 1963년 전주방직 인수로 시작됐다.1942년 조선마방 전주공장으로 출발한 전주방직은 해방후 불하과정을 거쳐 조업을 재개했으나 6.25전쟁에 휩쓸리며 경영난에 빠진 회사였다.삼양사는 전주방직을 삼양모방(주)로 상호를 변경하고 경영 정상화에 나섰지만 좀처럼 경영 개선이 이뤄지지 않았다.소모방은 원료를 전량 수입해야 했고 국내 생산시설의 증가로 출혈경쟁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이에 삼양사는 업종을 견방업으로 전환해 정상화를 꾀하면서 화학섬유분야로의 신규 진출을 추진했다.그 핵심은 1966년 확정된 화학섬유공장(폴리에스테르) 건설 계획이었다.삼양사는 스테이플 화이버 12톤, 필라멘트 1통 등 총 13톤 생산규모의 공장 신설을 위해 일본 레이온과 기술 제휴 및 용역 도입 계약을 체결했다.당초 이 공장은 울산 제당공장 옆에 세울 계획이었지만 고창 출신인 창업주 수당(秀堂) 김연수 회장이 낙후된 전북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해 2억원의 공사비가 추가되는 부담을 안고도 전주로 정했다.이에 따라 전주시 팔복동 공업단지에 10만여 평의 부지를 매입해 전주공장을 건설하게 됐다.전주공장은 1차로 7700평의 공장 건설을 계획하고 1969년부터 신축공사에 들어갔다.이와 함께 기술사원을 모집해 일본 제휴사로 파견, 기술연수를 실시했다.1969년 여름, 일본에 발주했던 시설재가 속속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기계 설치작업에 착수한 전주공장은 마침내 1969년 12월 스테이플 화이버와 필라멘트 방사연신공정이 가동되고 이듬해 3월에는 중합시설이 준공됨으로써 전주공장의 대역사가 시작됐다.4850평 규모의 본공장과 3090평의 부대건물로 준공된 전주공장에는 하루 13톤의 폴리에스테르 칩을 생산하는 국내 최초의 중합시설과 하루 3톤을 생산할 수 있는 톱시설 등이 갖추어졌다.새 제품의 상표도 사내 공모를 통해 '트리론(TRIRON)'으로 정했고, 삼양 폴리에스테르 제품의 간판 브랜드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사업 초기에는 불안정한 시장 상황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이는 오히려 생산과 품질을 조기에 안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1972년부터 살아나기 시작한 폴리에스테르 수요는 원면, 원사의 심한 물량 부족사태를 빚으면서 국내 가공업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이에 삼양사는 1973년 일본산 스테이플 화이버 30톤 증설을 골자로 한 전주공장 1차 증설에 착수했다.이 증설에는 새로운 공법이 도입됐다. 대표적인 것이 TPA공업이다. 기존에는 DMT공법을 사용했으나 일본 미쓰비시화성의 직접교환반응식을 국내 최초로 도입한 것이다.이 증설로 전주공장의 중합시설의 원료 반입공급설비가 대폭 개선되고 방사시설의 생산능력 대형화, 설비의 균형이 이뤄졌다. 또한 합리화를 통해 필라멘트 생산능력을 하루 3톤으로 늘렸다.이에 힙입어 전주공장은 1974년에 전년보다 36% 늘어난 736만 달러어치를 수출했고 내수 판매 또한 전년대비 39%나 증가하는 실적을 거뒀다.
[배리어프리, 공공디자인에서 인권을 찾다] ⑦ 포용적 교통수단을 늘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권리 보장이 배리어프리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