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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명인명물] 남원 연극 막 올린 배수연씨

1985년 12월, 남원지역 학교의 교사들을 중심으로 연극 단체를 한번 만들어보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다음해인 1986년 2월 겨울방학을 끝낸 교사들은 한 식당에 모여 발기인 모임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남원 연극의 시작을 알리는 극단 둥지는 그렇게 출범했다. 총 20명의 둥지 회원 중 16명은 당시 남원지역 중고등학교에 근무중이었고, 이들은 첫 작품으로 만선을 택했다.배수연(59) 씨는 남원 연극의 막을 올린 둥지의 중심 인물에 속한다. 첫 작품의 연출도 그가 맡았다.배 씨는 둥지가 탄생했을 당시 남원은 연극의 불모지였다. 첫 작품에 참여했던 회원 중 연극을 한번도 구경하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전문성은 전혀 없었다면서 하지만 1980년대는 연극예술에 대한 갈증이 심했던 시절로, 우리는 2개월 동안 맹연습을 통해 1986년 4월에 만선을 무대에 올렸다. 이틀동안 2000명 이상이 찾을 정도로 첫 공연은 성황을 이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배수연 씨는 이후 방황하는 별들(1987년), 노비문서(1988년), 한씨연대기(19891990년), 반녀의 봄(1990년), 오장군의 발톱(1991년), 반녀의 겨울(19992000년), 정유재란(2001년) 등 많은 공연을 연출하게 된다.하지만 극단의 가난한 살림은 공연장 임대료(한달 10만원 정도)를 낼 수 없는 실정으로 내몰기도 했다. 그래도 연극예술을 통해 즐거움을 찾고 남원에 연극문화를 확산시켜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는 지금까지 공연을 이어올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고 배 씨는 설명했다. 그는 현재 둥지의 57회 작품인 아! 그날이여!의 연출가로 남원시민들과 함께 공연을 준비중이다. 12월14일과 15일에 공연될 이 작품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남원 출신)에 대한 내용이다. 2010년 만인의사 추모공연에 이어 남원이 가지고 있는 역사문화유산을 체계화하겠다는 신념이 이번 작품에도 반영된 것이다.그는 역사, 사랑, 민주화 등 남원의 소재는 다양하다. 남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공연예술작품으로 지역의 이미지를 높이고 남원의 연극을 브랜드화 하고 싶다는 목표를 내세울 정도다. 그리고 한가지를 꼭 당부했다. 몇명의 후배들이라도 안정적으로 연극을 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즉 풍류와 예술의 고장에서 연극 무대가 지속될 수 있도록 남원시가 관심을 가져달라는 주문이다.제6회 전북연극제 우수작품상 및 연출상(1990년), 계원연극상(1999년), 동화연극상(2013년) 등을 수상한 바 있는 배수연 씨. 고등학교 교사와 연출가, 대학교 교수(명신대 연극영화학과와 사회복지학과)로 인생 2막을 살았다는 그는 끊임없이 노력하며 완성하는 연극 무대처럼, 내년에는 인생 3막을 올릴 것이라는 새로운 각오로 이어졌다.

  • 기획
  • 홍성오
  • 2013.11.26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 정읍 '헌혈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 강동열·강성 씨

정읍 헌혈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정헌모) 회장 강동열(46정읍농협 내장지점)씨와 부회장 강성(46샘고을시장 신영미곡상회)씨는 정읍중학교 동창(32회)이다.친한 친구사이인 이들은 헌혈봉사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있다.강동열 회장은 헌혈봉사 15년차로 지난 10월에 총 300회째 헌혈을 실천했다.정읍헌혈센터에서 가장 많은 횟수를 기록했다.또 강성 부회장은 지난달까지 총 215회째 헌혈하며 정읍헌혈센터에서 두번째로 많은 횟수를 자랑하고 있다.강동열 회장은 고등학교 3학년때 처음 헌혈을 시작해서 이후 군대생활중에도 헌혈에 참여하고 제대후 고향인 정읍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헌혈을 지속해왔다."당시에는 모임이 있던것도 아니고 남들에게 보여주려는 것도 아니고 혼자 헌혈봉사를 실천한다는 생각으로 기회만 되면 헌혈의 집을 찾았었다"고 말했다.이렇게 실천한것인 2004년 7월에 100회, 2008년 11월에 200회를 거쳐 300회를 맞게되었다.강 회장이 지금까지 헌혈한 양을 합하면 15만㏄에 달하는데 이는 성인 남성 36명분(60㎏ 기준으로 1인당 4200㏄)에 해당하는 양이다.강성 부회장의 헌혈봉사는 친구인 강동열회장의 권유로 시작했다.2004년에 처음 헌혈의집을 찾아 봉사한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강 부회장은"친구가 헌혈을 자주 하는것이 신기해 이유를 물었더니 봉사하는 마음에 자기스스로의 건강관리법이라는 대답을 듣고 헌혈을 했는데 왠지 기분이 묘하다고 할까 아무튼 스스로 대견한 마음을 느꼈고 차츰 헌혈하는 횟수가 늘어났다"고 말했다.두 친구는 정기적인 헌혈을 하면서 몸관리에도 신경을 쓴다.보통 2주에 한번씩 헌혈하는 주기가 다가오면 술과 고기, 약등 음식도 절제하게 된다는 것. 스스로 헌혈을 할수 있는 몸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이들의 헌혈봉사는 가족들에게도 전파됐다.강동열회장의 대학생 아들 2명과 강성 부회장의 고등학생 아들은 물론 부인과 누나도 헌혈 봉사에 나서고 있다.강동열 회장은 "내 몸이 건강하기 때문에 헌혈봉사를 할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다며 앞으로 헌혈정년 60세까지 두아들과 함께 건강하게 헌혈을 계속할수 있기를 바란다"고 희망했다.두 친구의 헌혈봉사가 알려지면서 헌혈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연락도 자주 오고 있다.헌혈증 한장이면 500cc 수혈을 받을수 있기때문이다.이에따라 처음에는 연락오면 그냥 나눠주었던 헌혈증을 요즘에는 쉽게 건네주지는 않는다."가급적이면 필요로 하는 사람이나 주변의 가족들이 헌혈을 했었는지, 헌혈봉사의 정신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는지 확인한다"는 강성 부회장은 "헌혈증을 받아간후 연락도 없는 사람들을 보면 꼭 보답을 받는다기 보다는 결과를 알려주면 좋은데 아쉬운 마음이다"고 덧붙였다.이들 두 친구의 헌혈봉사는 주변의 헌혈봉사자를 늘리면서 몇년전 헌혈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발족했다.헌혈의 집을 찾는 사람들끼리 가끔씩 얼굴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모임으로 구성되었다.20여명의 회원들이 매월 셋째주 화요일 정례모임을 갖고 헌혈 활성화 방안등을 논의하면서 헌혈캠페인도 전개하고 있다.정헌모 회원들은 올해 초에는 정읍헌혈센터가 문을 닫자 여론을 환기시키며 정읍시의 지원을 이끌어내 전국 최초로 민관합동의 헌혈공간인 정읍헌혈사랑터를 시기동 구 파출소자리에 개소하는 등 헌혈문화 확산에도 기여하고 있다.

  • 기획
  • 임장훈
  • 2013.11.19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 나창기 호원대 야구부 감독

지난 9월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에 이어 지난 24일 군산상고의 전국체전 우승소식이 들려오자 야구의 도시 군산이 다시 한번 들썩였다.전국대회 2연패 소식에 나창기(63) 호원대학교 야구부 감독은 "내가(호원대가) 우승한 것도 아닌데 전국에서 축하전화가 계속 걸려 온다"며 "군산 야구를 이끌고 있는 후배와 제자들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나 감독은 군산상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1년 제52회 전국체육대회 우승으로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신화의 탄생을 예고한 장본인이다.지난 2011년 7월 군산상고와 경남고 출신 스타 선수들이 겨루는 2011 레전드 리매치에서 군산상고 감독을 맡을만큼, 자타가 공인하는 군산 야구의 대부이다.학창 시절 육상과 축구 등 운동에 남다른 소질을 보이던 나 감독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와 인연을 맺었다. 1969년 신생팀인 군산상고로 진학한 나 감독은 이듬해 평생 스승인 故 최관수 감독을 만났다.나 감독이 기억하는 최관수 감독은 선수들에게 욕설은 물론 거친 말을 단 한번도 하지 않았던 덕장이었다."최 감독님이 정말 화가 나시면 '이 녀석이...'라고 하시는 게 전부였다"며 "선수 개인별 특성을 파악해 적재적소에 배치하시는 능력이 뛰어나셨다"고 기억했다.이런 최관수 감독의 모습은 훗날 나 감독을 군산상고 감독직 제의가 들어왔을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하도록 만들었다.졸업 후 실업팀인 제일은행에 입사해 20년 가까이 현역 선수로 활약했던 나 감독은 1991년 해체 위기에 놓여 있던 군산상고 감독직을 제의받았다.군산상고 야구부를 직접 창단하고 본인을 스카웃했던 이용일 전 KBO 총재대행이 군산상고 야구를 부활시킬 사람은 나창기 뿐이라고 추천했기 때문이다.나 감독은 "91년에 군산지점으로 발령이 나 은행에 근무하면서 선수들을 지도했다"며 "무엇보다 편견없이 선수들을 대하자고 마음먹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나 감독은 부임하자마자 전국대회 3위를 시작으로 준우승을 3차례 연거푸 차지하더니 1996년 봉황기, 1998년 전국체육대회, 1999년 황금사자기 우승으로 전통의 강호 자리를 기어이 되찾았다.당시 제자들이었던 이진영, 정대현, 이승호, 김상현, 신경현, 이대수, 문규현 등 프로야구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석수철 현 군산상고 감독, 이경태 군산중 감독 등 나 감독과 함께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나 감독은 "제자들이 허튼 유혹을 받지 않고 오직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힘과 울타리가 돼 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고 강조했다.2003년부터 호원대 야구부 감독 겸 스포츠레저학부 전임교수로 재직해 온 나 감독은 "야구밖에 모르고 살아온 인생이지만 너무 멋진 인생이었다"며 "9회를 치르는 동안 반드시 기회가 오는 것이 야구로, 우리네 삶도 슬기롭게 위기를 넘기며 오는 기회를 살릴 수 있도록 준비해 나가는 것 아니겠느냐"고 자신의 야구 철학을 이야기했다.

  • 기획
  • 이일권
  • 2013.10.29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 친환경 뽕재배 박원택·조은영 부부

부안 대표 작물인 뽕을 재배해 연간 4억~5억원의 고소득을 올리는 농업인이 있어 화제다. 보안면 이레농원 대표 박원택(68)씨는 부인 조은영 목사( 61)와 함께 2만㎡의 뽕밭에서 연 4~5억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박씨는 늦깎이 농부다. 뽕 재배를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원래 부안읍내에서 토목업체를 운영하던 박씨는 뛰어난 사업수완과 건설경기 활황으로 사업가로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5년 전 갑작스런 위암 발생으로 수술을 받은 뒤 건강을 되찾기 위해 20여년 전에 사둔 땅에 뽕나무를 심기 시작했다.박씨가 뽕 재배를 선택한데에는 부안군의 정책적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마침 부안군이 뽕 산업 육성을 위해 친환경 재배 비닐하우스 설치비 70%와 묘목대 50%를 지원하는 등 각종 기자재를 지원하고 생산된 오디는 지역농협을 통해 전량을 수매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처음에는 어려움도 많았다. 처음 해보는 뽕 재배는 전문적인 기술 부족으로 오디 생산량이 다른 농가에비해 턱없이 적었다. 하지만 박씨는 좌절하지 않고 농업기술센터 담당직원의 전문적인 기술전수와 도움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은 최고 생산량을 자랑한다.박 대표가 생산하는 오디는 일반 오디 보다 배 이상 비싸다. 친환경재배를 한 덕에 당도가 높고 알이 굵어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판로도 걱정이 없다. 생산되는 오디의 70~80%는 인터넷을 통해 소비자와 직거래된다. 나머지 물량도 수확한지 한두 달이면 모두 팔려나간다.박씨는 지난해부터 오디를 생산한 후 버려지는 뽕잎을 이용해 누에를 사육해 건강식품으로 판매하고 있다. 또 뽕잎과 줄기를 이용해 뽕잎차도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 뽕나무 전체를 소득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박씨는 "뽕나무는 열매부터 뿌리까지 버릴 것이 없어 모든 것을 소득과 연계시킬 수 있다"며 "좀 더 연구하면 더 많은 제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최근에는 박씨 농장을 찾아오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다. 뽕 재배를 계획하고 있는 신규 농가들이 현장견학차 방문하면 직접 나서서 재배기술과 경험담 등을 실감나게 설명해 준다. 또 이레농장이 부안군의 뽕산업의 대표 농장으로 전국에 알려지면서 급증한 언론사 취재도 성실하게 응하며 뽕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설명해 준다.박씨는 "5년 전에 발생한 위암도 이제 완쾌 판정을 받았는데 이 것도 뽕을 재배하면서 큰 욕심 없이 자연과 더불어 지내온 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든다"며 뽕을 재배하며 지내온 지난 5년 동안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고 경제적으로 여유도 생겼다. 뽕은 나에게는 행운이다"고 말했다.또한 박대표 부부는 3년 후부터는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사람들이 모아 함께 일하며 자립하는 사랑의 이레공동체을 설립 그들이 자립할 수 있는 삶의터전을 마련해주는 것이 소박한 꿈이라고 말했다.(이레농원 064-584-5252011-322-4567 박원택)

  • 기획
  • 양병대
  • 2013.10.22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 전통자수 장인 방정순 여사

"외래문화에 우리 것이 묻혀 흔적을 유지하기 어려운 이때, 전통자수가 버팀목이 되고 유지되도록 눈이 허용하고 생명이 다 할 때까지 자수를 계속할 것입니다."손으로 놓는 수가 좋아서 70평생을 자수와 함께 살고 있다는 전통 고창자수 전수자 방정순(73고창군 상하면 자룡리) 여사. 방 여사가 자수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10살 되던해 625전쟁을 맞아 외갓집(영광군 홍농읍 상하리 하봉마을)에 피신하여 살면서 부터다. 근동에서 수 잘놓기로 소문난 외할머니(故하봉산)와 친정어머니(故고산예)로 부터 자수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전통자수의 기법과 부족함을 수련하기 위해 1998년부터 故이학(전 문화진흥원장) 여사로 부터 사사 받았으며, 2006년부터 동국대학교 사회교육원 전통자수과(최고지도자 과정)를 4년 수료하고 5년째 연수중이다. 오직 자수만을 고집하며 70평생을 살아온 방 여사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 한다.자수는 중국에서는 수문(繡文), 일본에서는 누이도리, 영국에서는 Embroider, 프랑스에서는 Broderie라는 어원을 가지고 전 시대를 걸쳐 풍속, 기후, 사회적 여건, 종교 등의 영향으로 다양하게 발전되어 왔다. 우리의 전통자수는 의복은 물론이며 병풍에서부터 방석, 상보, 주머니, 댕기, 버선 등에 수를 놓는다. 자릿수, 자련수, 평수, 선수, 징금수, 씨앗수, 사슬수, 가름수, 깃털수, 솔잎수, 접수, 이음수 등 자수기법도 다양하다. "무명배 아홉쎄 배라하여 가늘게 실을 뽑아 짠 배로 거기에다 놓기 쉬운 들꽃부터 시작하여 베개수, 글자수, 골침, 퇴침, 수복침, 목단, 연꽃 등을 등잔불 밑에서 눈썹을 그을려 가며 수를 놓았습니다."방 여사의 자수기법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전통기법으로, 본인이 손수 누에를 키워 실을 뽑고, 주변의 식물과 광물을 활용하여 염색을 하기 때문에 소박하면서도 자연스런 색상표현을 주는 특성을 갖고 있다.자수의 특성상 대부분 도시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방 여사의 자수는 작은 포구가 있는 전형적인 농촌에서 순박하면서도 섬세하게 만들어져 더 예술성이 높다.자수에 대한 방 여사의 쉼없는 노력은 많은 결실을 맺었다. 전통공예 전국공모전 특선, 대한민국 황실공예전 특선, 전통공에 전국대전 특선 등 많은 상을 수상했다. 현재 전통공예협회 초대작가로 활동 중이며 다수의 작품전을 개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펴고 있다. 고창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자연의 혜택을 받아 살기좋은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인지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들이 이곳에 많이 살아, 옷과 장신구는 물론 생활도구까지 품격높은 전통자수가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그러나 산업화되면서 고창자수의 명맥이 사라지고 있는 가운데, 방 여사는 옛것을 지키기 위해 명주실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누에를 손수키워 작품에 사용하는 등 50여 년간 전통자수 그대로를 고집하고 있다. "기회와 여건이 주어진다면 남은 여생 후진양성을 위해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는 그의 전통보존을 위한 소박한 꿈이 꼭 실현될 수 있도록 관계기관의 적극적인 지원을 기대해 본다.

  • 기획
  • 김성규
  • 2013.10.15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 이기수·김희선씨 부부 "표고로 2남4녀 키웠어요"

순창의 67%를 차지하는 산림지역에서 나는 임산물로 연간 1억원의 고소득을 올리는 농업인이 있다.구림면 월정리 오정자 마을에 살고 있는 이기수(68), 김희선(60)씨 부부는 산림소득분야의 선구자로서, 표고버섯과 영지버섯, 밤을 판매한 소득으로 2남 4녀를 거뜬히 키워냈다.구림이 고향인 이기수씨를 따라 시집오면서부터 농사를 시작한 김희선씨는 남편과 함께 37년간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처음에는 논농사로 시작했지만 산에서 나는 밤을 판매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임업분야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2000년에 임업후계자로 선정된 이기수씨 부부는 소득이 높다는 영지버섯을 키우기 시작해 표고버섯까지 같이 하면서 13년째 이어오고 있다.특히 이들 부부는 서울 등 전국에 직거래를 10년째 확보하고 있어 판로로 인한 어려움 없이 이들이 생산한 버섯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처음에 시작한 직거래가 상품이 좋다보니 주위사람들에게 입소문으로 전해지면서 더욱 인기가 높아졌다"고 이씨 부부는 전했다.이씨 부부는 또 "우리는 판로를 확보하게 되고, 도시민들은 믿을 수 있는 친환경 상품을 유통과정 없이 저렴한 가격에 살수 있게 되니 상호 윈윈한다"고 말했다.총 660㎡ 8동의 비닐하우스에서 버섯을 키우고 있는 이들 부부는 하루종일 함께 일하면서도 항상 즐겁다.이들 부부는"버섯을 키워 애들 대학까지 가르치고, 3명은 결혼까지 시켰으며, 미혼인 자녀 3명도 다들 열심히 직장에 다니고 있으니 그야말로 세상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다"고 말했다.표고버섯은 지금부터 내년 3월까지가 수확철이니 날마다 비닐하우스를 나와 버섯을 살핀다.버섯에게도 사랑을 주고 관심과 보살핌이 있어야 쑥쑥 자란다. 버섯에 대해서라면 13년 경력이 있어 웬만한 전문가보다 더 잘 알고 있다.그래서인지 이웃주민들이 버섯에 대해 문의하러 오고, 또 현장견학도 오면서 배우곤 한다.평소에 말이 없는 이씨지만 버섯에 관한한 열변을 토하면서, 버섯으로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꼭 덧붙인다.또 이들 부부는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특히 김희선씨는 구림면 적십자사와 구림면 새마을지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이웃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이기수씨는 회원으로 활동하지는 않지만, 행사가 있을때마다 묵묵히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한다. "꿈이요? 꿈이 있다면 계속 버섯이 잘 돼 편안하게 살면서 남은 자녀들 잘 결혼시키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이죠"계속 아내의 말을 듣고만 있던 이기수씨가 내린 결론이다.묵묵한 남편, 활기찬 아내그야말로 천생 찰떡궁합인 이들 부부는 농촌에서도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롤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표고버섯은 항암 다당체 물질인 '레티난'이 함유되어 있어 콜레스테롤을 낮춰 주고 암을 예방하는 효능이 있어 고소득에 좋은 작물이다. 또 혈압을 낮추는 작용도 하기 때문에 고혈압이나 동맥경화 예방에도 효과적이어서 표고버섯을 이용한 의약품이 개발 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순창=ing6531

  • 기획
  • 임남근
  • 2013.10.08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 임실 작은별 영화관

농촌인 임실에서 영화상영이 중단된지 30여년만에 재개될 예정이어서 주민들의 관심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특히 규모는 작지만 대도시에서만 볼 수 있는 개봉작을 전국과 동시에 상영한다는 계획이어서 영화마니아들의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지난해 2월부터 추진된 영화관은 임실군민회관 지하에 설치된 수영장을 개축, 사업비 9억3000만원을 들여 이달초에 완공됐다.'작은별영화관'으로 명명된 이곳에는 17억2000만원을 따로 들여 게임장과 공연장, 휴게실 등 다목적실도 갖춰 주민복지시설로 거듭났다.다목적 문화공간 조성을 바탕으로 군민의 문화향유 기회를 확대하고 삶의 질 향상을 기여키 위해 개설된 영화관은 전북도와 전북은행도 사업비를 투자했다.지난 10일 관내 유명인사를 초청해'스파이'를 첫 상영작으로 시험을 마친 작은별영화관은 1관의 경우 37석에 이어 2관은 53석으로 마련됐다.이와 함께 14일부터는 매일 오후 4시와 7시 2회에 걸쳐'가디언즈'와'광해'가 상영됐고 24일부터는 가족영화'로렉스'와'토탈리콜'이 무료로 운영중에 있다.작은별영화관의 정식 개장일은 10월 5일부터 본격 상영에 들어가고 개봉작으로는 1관에서 모자간의 끈끈한 정을 담아낸 유아인김혜숙 주연의'깡철이'가 선보인다.또 2관에서는 딸이 성폭행을 당한 상황에서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을 그려낸 설경구엄지원 주연의'소원'이 상영될 예정이다.상영시간은 매일 오전 10시부터 시작되고 1일 5~6회에 걸쳐 밤 11시까지 운영되며 팝콘과 각종 음료 등을 판매하는 매점도 설치됐다.영화관 이정현 매니저는"대부분의 영화들은 서울 등 대도시와 동시에 상영할 계획"이라며"군민들에 사랑받는 휴식공간이 될 수 있도록 최대한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임실에 영화관이 들어섬에 따라 그동안 전주 등지에서 영화를 즐겨야했던 주민들에는 시간적, 경제적 혜택을 톡톡히 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이곳에서는 2D와 3D 영화의 상영도 가능하고 입장료도 각각 5000원과 8000원으로 책정, 도시보다 비교적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이를 통해 그동안 가족단위로 전주에서 영화를 관람했던 주민들은 식사와 교통비 등 최소 10만원이 소비됐으나 이곳에서는 절반의 비용이면 충분할 것으로 보여진다.특히 오고 가는 시간과 영화를 보기위해 대기했던 시간도 대폭 단축될 것으로 보여 주민 이용율도 점차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작은별영화관은 (주)글로벌미디어테크 영화전문업체가 임실군으로부터 위탁운영권을 체결, 관리를 맡는 것으로 알려졌다.신현택 군수대행은"영화관 개설로 군민에 대한 문화복지 혜택이 늘어났다"며"사랑받는 휴식공간이 될 수 있도록 다각적인 지원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 기획
  • 박정우
  • 2013.10.01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 장수 주촌마을

장수군은 임진왜란때 젊은 나이에 왜장을 껴안고 진주 남강에 투신한 의암 주논개가 태어난 고장이다.장수군 장계면에서 26번 국도를 따라 육십령쪽으로 4㎞쯤 가다 오동, 대곡의 군도를 따라 3.5㎞쯤 거슬러 올라가면 깊숙한 산골에 40호 정도의 농가가 있는데 이 마을이 한국여성의 귀감이 되고 있는 의암 주논개의 태생지인 주촌마을이다. 논개는 선조 7년(1574) 9월 3일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훈장 주달문과 밀양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논개는 장수현감을 지냈던 최경회의 부실이 됐고,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되고 평생을 함께 하려던 남편 최경회 마저 순국하자 복수를 결심한다.논개는 슬픔으로 날을 새우다 왜병들이 7월 7일을 기해 촉석루에서 승전잔치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기생으로 가장, 잔치에 참석해 왜장 게야무라 로꾸스케를 의암(순국한 바위)으로 유인한 뒤 그의 허리를 껴안은 채 남강으로 몸을 던졌다. 그때 그녀의 나이 19세였다.주촌마을의 기원은 40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을 건너편의 범바위골에 살던 주논개의 부친인 주달문이 주촌에 새터를 잡아 서당을 차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고 한다. 장수삼절의 주벽이요, 충렬의 여신으로 추앙받는 의암 주논개가 이 마을에서 출생해 13세까지 성장하면서 부친으로부터 글을 배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촌마을은 장수군에서 우리 고유의 전통민속마을로 조성했으며, 다양한 농촌체험과 논개 생가 유적지 등 문화교육자료, 오미자를 이용한 먹을거리 등으로 가족단위의 농촌체험관광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초가와 물레방아, 디딜방아 등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농촌전통테마마을이기도 하다. 몇 년 전에는 드라마가 촬영되고 각종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지역주민 뿐만 아니라 많은 외지인들이 찾고 있는 관광명소로 급부상하고 있다.이곳에선 문화관광 해설사와 함께 하는 논개생가지 투어를 비롯해 논개기념관 전시체험, 김장체험, 이엉얹기, 고구마캐기 등 다양한 민속생활도 체험할 수 있다.마을에선 산유화, 국화네, 흙까비네, 복지관, 전통주막집 등 굴피와 죽데기로 만든 전통가옥의 숙박시설을 조성해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곳에선 콩, 청국장, 오미자, 손두부, 도토리묵 등 마을 주민들이 직접 가꾸고 만든 농특산물을 구입할 수 있다.주촌마을 김생진 이장은 "한국 여인의 영원한 충절의 표상인 의암 주논개님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 "후손들이 논개님의 살신성인의 정신을 이어받아 사회적 약자나 서민을 위해 힘쓰도록 거룩한 진상을 알리는 홍보사절의 역할에도 충실하겠다"고 말했다.△ 주촌마을 352-5465, http://nongae.go2vil.org

  • 기획
  • 정익수
  • 2013.09.24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 무주 사선암

이 가을, 여유롭게 쉬기를 원한다면 무주에 가보자! 깨끗하고 아름다운 산을 배경으로 신선놀음이 가능한 곳에서 자연을 마셔보자! 오지 중의 오지로 알려진 무주군 무풍면 골짜기에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기가 막힌 바위가 있다. 오늘은 신선들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사선암(四仙岩)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무주군 무풍면은 산세가 유독 거센 곳이다. 깊고 넓어 신비감과 아름답기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주변 경관을 보다 보면 신선들이 내려와 노닐 던 곳이라는 말이 비로소 실감이 된다. 얼마 전 철목리 철목마을에서 사선암까지 '신선길'이 정비되면서 신라시대 화랑들이 호연지기를 연마했다던 '사선암'이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사선암(四仙岩)은 신라(현 무풍면 철목마을)와 백제(현 설천면 벌한마을)의 경계 거칠봉(7명의 신선을 상징) 정상 부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에 속한 국경의 요새로 화랑의 사선, 영랑과 술랑, 남랑, 안상이 국경의 요충을 살피며 호연지기를 연마하던 곳이라 해서 이름 붙여졌다는 설화가 전해진다.사선암의 암면은 7~8명이 앉아도 될 만큼 넓으며, 바닥의 중심에는 옛 선인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바둑판도 새겨져 있다. 바둑판을 앞에 두고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 산이 불어주는 바람을 맞고 있노라면 그곳이 바로 무릉도원이요, 내가 바로 신선이 된다.하늘을 향해 치솟은 암벽에는 무풍면 출신 이시발 선생이 각자해 둔 고유문이 남아있는데 이 고을의 선비였던 '하재만'과 '이해교', '권철로', '하연'이 학문과 인격을 존경해 새긴 것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 암벽의 웅장함도 볼거리지만 바위에 새겨진 선비들의 이름이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또 사선암 주변에는 큰 바위들이 곳곳에 자리해 있으며, 사람들이 오색실과 엽전을 걸어놓고 소원을 빌었을 만큼 약효가 있었다는 약물탕도 자리해 신비감을 더해준다.사선암을 만나기 위해 걷게 되는 '신선길'은 무풍면 철목마을에서 시작되는 3km 정도의 등산로로, 무풍 승지권역 방문자센터를 출발해 마을길을 따라 마련된 이정표를 따라 오르면 된다.등산객들의 안전을 위해 등산로 폭을 확장하고 종합안내판과 방향표지판, 수목이름표, 편익시설 등이 설치돼 있으며 숲이 울창하고 코스도 부담스럽지 않아 가벼운 산행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가을바람 불어 마음이 술렁이기 시작할 때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아 호젓하고 산속에 숨겨져 신비롭기까지 한 그곳에 가보자.신선길 끝 사선암에서 내려다보면 서쪽으로는 설천면 벌한마을이, 동쪽으로는 무풍면 소재지가 한 눈에 들어와 가슴 탁 트이는 시원함을 만끽할 수 있다.신선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사선암은 오르며 여름 내 지쳤던 마음을 달래고 정상에선 가슴 탁 트이는 시원함을 껴안고 내려오는 길에는 내일을 위한 각오를 새로이 다질 수 있는 곳이다.△ 찾아가는 길무풍승지권역 방문자센터 - 사선암까지 3km구간 (왕복 6km)

  • 기획
  • 김효종
  • 2013.09.17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 진안 마이산 능소화 만개

영험한 도량, 마이산 탑사(주지 청파진성 스님) 경내 암마이봉 서측 깎아지른 절벽에 수 놓아진 '능소화'가 진안의 새로운 명물로 등장하고 있다.탑사의 능소화는 한 여름이면 암벽 30여m에 1만 여송이의 탐스런 꽃을 피우는데, 주변 80여기의 돌탑과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케 한다.절벽을 타고 오른 이 능소화 줄기는 낮에 보면 하트 모양을, 탐조등을 비춘 밤이 되면 도깨비 뿔 형태를 띄는 등 그 형상 또한 매우 독특하다.특히 일명 금등화(金藤花)라 일컬어지는 탑사 경내의 능소화는 최고 성장 높이인 10m를 훌쩍 넘겨 규모 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암벽 흉부(7부능선)에 까지 다다른 능소화가 자태를 뽐낼 즈음(7~8월)이면 밋밋한 잿빛에 홍황빛의 물감을 흩뿌려 놓은듯, 몽환적인 풍경을 자아낸다.이 능소화가 심어진 것은 1983년.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탑사 주지인 혜명(80)스님이 낙석 방지를 위해 1년생 모종 20수를 식재한 게 기원이 됐다.그렇게 심어진 탑사의 능소화는 1년에 1m씩 자라 현재의 모습을 갖췄으며, 능소화를 접한 관광객들은 아름답고 이색적인 풍광에 매료되고 있다.탑사 측은 돌탑과 함께 마이산의 새로운 명물로 등장한 이 능소화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천연기념물로 등재할 복안까지 마련중에 있다.이와 함께 '소원바위'로 유명해진 솟대탑(천지탑) 주변에 3년산 3그루의 능소화를 더 식재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이를 통해 탑박물관 건립과 함께 이뤄질 힐링도량의 기반을 갖춰 명실상부한 세계 제일의 기(氣)찬 명상도량으로 탈바꿈시킨다는 게 청파진성 스님의 계획이다.청파진성 스님은 "살아 남은 12수의 능소화를 위해 1년에 10여 차례 자연거름(막걸리)을 주는 등 정성으로 관리하고 있다"면서 "현재의 능소화 풍광도 그런 노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고 전했다.한편 낙엽덩굴식물인 능소화는 중국이 원산지로, 주로 중부이남 절에서 관상용으로 심어왔으며, 10월 경이면 길고 네모진 삭과라는 열매도 맺는다. 꽃말로는 '명예', '자랑', '자만' 등이 있다. 또한 능소화는 통경약으로 산후병, 월경불순, 이뇨제, 해열제로 쓰였으며, 어혈로 인해 여자의 생리가 없는 증상 및 징가, 산후의 유방염에도 효험이 있다고 옛 문헌에 나와 있다.

  • 기획
  • 이재문
  • 2013.09.10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 장연주 부모교육 전문강사

완주군이 2008년부터 저소득층 아동들의 개별적인 욕구와 상황에 맞춰 건강보육복지 서비스를 맞춤형으로 통합 제공하는'드림스타트사업'. 이 사업에서 2009년부터 부모교육을 진행하는 장연주씨(51)가 완주군을 비롯 관련 기관들로부터 부모-자녀 가족관계에 대한 전문지식과 열정을 두루 갖춘 전문가로 주목을 받고 있다."이른바 결손가정이라고 불리는 이이들의 문제를 풀어나가려면 아이들 문제의 근원인 부모들과의 관계와 각각의 정신적 치료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을 꺼낸 장연주씨는 "교육이 시작되면 자기 자신 알기, 자녀 알기, 가족관계 알기 등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며 피교육생이 처한 물리적 정신적 현실에 점차 접근해 나간다"말했다.대학교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한 장연주씨는 이후 부모코칭 교육과정까지 마치며 부모-자녀 교육 전문가로서의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인생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이끈 건 장연주씨가 처한 상황도 큰 역할을 했다. "첫째 아이는 남부럽지 않게 자랐고 이제 한의학을 공부하고 있어요. 그런데 둘째 아이는 어린 시절부터 미덥지 않게 성장했어요. 둘째 아이가 초등 4학년때 자폐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장연주씨는 처음엔 주어진 상황에 낙담하기도 했지만, 곧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있는 그대로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부모와 아이들의 교육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고, 이 같은 뜻이 진행되면서 교육전문가가 되었다.장연주씨의 교육방식은 특이하고, 열정 또한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고 있다. 푸근한 엄마같은 태도로 드림스타트 사업의 결손아동들을 챙겨나가기로 정평을 얻고 있는 완주군 왕미녀 담당은 "장연주씨의 열정은 누구도 따를 수 없다"며 "수업시간이라는 경계를 벗어나 자신이 도와줘야 할 피교육생이 있으면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과 열정을 쏟아 부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결과를 도출해 낸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드림스타트에는 이혼한 딸이 낳은 외손자를 키우는 할머니, 아들이 정신적인 문제로 집에만 틀어박혔다고 호소하는 어머니, 먼 이국에서 시집 와서 부적응 현상을 보이는 조선족 등 사회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숱한 사람들이 드나든다.장연주씨는 이들과의 첫 만남에서 시(詩)를 통해 교감을 시도한다. 상황에 적절한 시를 골라 읽으며 서로의 느낌을 나누면 그 높던 마음의 장벽이 하나씩 절로 허물어 진다.뇌성마비 어머니를 둔 한 초등생은 학부형 총회에 엄마가 참석하는 걸 극구 말렸다. '장애인 엄마가 부끄럽다'는 철없는 아이의 마음이 부모와 자녀의 사이를 무참히 갈라 놓았다. 장연주씨는 이들 가족에 대한 컨설팅에 들어갔다. 부모에 대한 마음가짐과 역할 교육, 자녀와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마음 나누기가 결실을 맺었다. 이젠 뇌성마비 엄마는 드림스타트 부모교육생들의 회장을 맡고 있고, 초등학교 5학년 딸은 엄마와 함께 부모교육에 참가할 정도로 '오순도순 모녀'로 변모했다."부모교육과 자녀교육은 하면 할수록 소명의식 속으로 빠져들어요. 교육을 마치고 나면 제가 가진 모든 마음의 에너지를 피교육생들에게 쏟아부어 버려 파김치가 되지만, 빈 가슴 속에선 또 다른 기쁨과 희망이 밀려오는 걸 느끼죠. 평생동안 이 일을 하고 싶어요.

  • 기획
  • 김경모
  • 2013.09.03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 김제 전통옹기장이 안시성씨

조선 말, 천주교 박해를 피해온 이주민들이 옹기를 구어 생업을 유지하고자 생성되었던 김제시 백산면 부거리 부창마을(옹기마을)에 대학졸업한 후 1992년에 들어와 당시 옹기장인으로 명망이 높았던 고(故) 변동순 선생으로 부터 전라도 옹기의 특징인 쳇바뀌태렴(옹기를 타래미를 이어붙인 모양이 마치 체의 몸체가 되는 쳇바뀌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을 사사 받는 등 고(故)변동순 선생과 함께 동고동락 하며 전통옹기만들기 비법을 전 과정에 걸쳐 전수 받은 안시성(47)씨.안 씨는 어려서 부터 미술감각이 탁월하여 소조부문에 두각을 보이다 고등학교 때 부터 미술공부를 체계적으로 공부한 후 대학 도예과에 입학, 전문적으로 토기 및 자기분야에 대한 능력 연마에 매진했다.당시 안 씨는 옹기만들기에 대한 기능뿐만 아니라 옹기장인으로서의 정신까지 배우고 익혀 부거리 옹기마을에 몇 남지 않은 옹기가마를 지키고 가꿔 한평생을 옹기장이로 살겠다는 마음으로 국가등록문화재로 신청, 2008년도에 제403호로 등록시켰다.최근에는 전통옹기작업장과 전통옹기가마를 옛 모습대로 복원하는 등 국내 최초로 등록문화재로 등록된 옹기가마와 작업장을 이용. 전통시설 뿐만 아니라 전통기법으로 옹기만드는 것에 전력을 다 하고 있다.안 씨는 "자랑스러운 전북의 전통옹기기법을 널리 전수하고 알리고자 수 많은 체험객 및 외국인들을 상대로 수시로 옹기체험 및 가마불때기행사, 외국인들과의 예술적 교류활동을 활발히 추진 하고 있다"면서 "전북은 맛의 고장으로서 높은 상징성과 자부심을 보유하고 있는 지역으로, 최근 전주음식이 지닌 창의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로 선정된 이후 음식을 지역 대표브랜드로 설정하므로 인해 발효음식의 저장용기인 옹기는 음식문화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볼 수 있어 전라도 쳇바뀌태렴기법인 옹기의 생산은 전통문화의 보급과 계승 발전의 가치가 있고, 전북의 대표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그는 "농경생활을 해 온 우리 민족의 식생활에 있어 옹기는 토기의 발전과 함께 발달돼 옹기의 형태나 제작기법, 번조방법과 온도의 차는 조금 있을지언정 현재의 옹기와 별반 다를것이 없다"면서 "즉, 곡물을 담아 저장하고 장이나 술을 담아 먹는 등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의 기후에 옹기는 단열이 되고 보온이 되기도 하며, 기벽의 기공을 통해 공기가 순환되는 등 발효식품을 저장해 먹는 우리의 식생활에 알맞은 용기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안 씨는 "세계에서 유일한 쳇바뀌태렴 기법을 이용한 놀라운 기술력과 기능의 높은 수준은 짧은 기간 발전한 자기와는 다르다"면서 "이러한 옹기의 특성이나 역사성을 볼때 옹기는 우리 민족에게 없어서는 안될 생활용품으로서 문화의 한 부분으로 발전 계승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덧붙였다.

  • 기획
  • 최대우
  • 2013.08.27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 남원 '헌혈왕' 정정호씨

남원에서 수화통역사로 근무 중인 정정호씨(43)는 '헌혈맨'으로 통한다. 지난 7월초에 남원시가 발표한 '남원 기네스'에 최다 헌혈자로 등재되기도 했다.그의 헌혈 인생은 1987년 고등학교 2학년 당시 학교로 찾아온 헌혈버스에 우연히 오르면서 시작돼 2013년 8월초 현재까지 26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184회에 걸쳐 헌혈을 실시한 정 씨는 혈액을 필요로하는 수혈자 및 가족을 위해 앞으로도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겠다는 각오다.그런 그도 헌혈에 대한 첫 경험을 묻자 웃음부터 보였다. "수업을 빠질 수 있고 빵과 음료수가 탐이 났어요. 어떤 목적의식이나 희생정신으로 시작한 일은 아니었어요." 철없던 시절에 시작된 헌혈이 분명한 목적의식으로 변한 때는 1992년 봄이다. 국내 헌혈로 충당하지 못해 혈액을 수입해야 한다는 언론 기사를 접하고 부터다. 이후 자신이 다니던 대학교 게시판에 혈액을 구한다는 광고를 접한 뒤 여러 학우들과 함께 헌혈을 실시했고, 수혈을 받은 학우가 1년 뒤 건강하게 학교에 복귀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 필요성에 확신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그 때부터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헌혈버스를 보면 무작정 올라 전혈(적혈구, 백혈구, 혈장, 혈소판 등 혈액의 모든 성분) 헌혈을 실시했다. 그러다가 전주 헌혈의집에서 전혈은 2개월, 성분(혈소판, 혈장) 헌혈은 2주에 한번이 적당하다는 것을 파악하게 됐다. 그는 짧아진 헌혈 주기로 2000년 10월에 헌혈 유공장 은장, 2001년에는 금장을 받았다. 대한적십자사는 헌혈 횟수 30회 이상에게는 은장을, 50회 이상인 사람에게는 금장을 수여한다. 그는 "한때 헌혈 횟수에 집착해 수혈자에게 필요한 헌혈 보다 자기만족 및 보여주기에 급급했었다. 헌혈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헌혈하는 사람들 다모여라'라는 카페에 가입해 활동하게 됐다"면서 "헌혈자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헌혈 문진표에 나와 있는 배제사유에 해당된다면 수혈자를 생각해 본인 스스로가 헌혈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말을 이었다.그는 또 헌혈 1주일 전부터 술자리를 자제하거나 감기에 걸리지 않게 개인위생에 신경을 쓰는 등 건강관리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현재 남원지역에는 헌혈을 실시할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정 씨는 "전주에서 출퇴근을 할 때에는 헌혈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남원에서는 헌혈 버스가 온다거나 별도로 시간을 마련해서 전주를 찾아야 하는 등 제약이 뒤따르고 있다"면서 남원에도 헌혈의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하기도 했다.

  • 기획
  • 홍성오
  • 2013.08.20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 정읍시 홍보전도사 김수웅 "신문, 보고 버릴게 하나도 없죠"

40여년의 교직생활을 마치고 2010년부터 정읍시 황토현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는 김수웅(69)씨는 매일 발간되는 신문을 스크랩하며 매일 정읍을 홍보하는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이다.정읍시 수성동 정읍시청뒤에 위치한 김씨의 자택 신문방에는 지난 40여년 간 스크랩한 자료들이 벽면에 가득한 가운데 1m자와 커트칼, A4용지가 책상위에 가지런하게 놓여있었다.김씨는 "인터넷 시대에 정신나간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 있지만 자료 찾기와 읽기 편하고 정리한 자료를 언제든 다시 볼 수 있어 좋다"고 스크랩하는 이유를 밝혔다.김씨가 신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 1973년 도교육청 공보실에 근무하면서 부터다.정읍농고(51회)와 전주교대를 졸업(67년)하고 정읍 입암초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한 김씨는 당시 전우태 정읍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청 시청각담당(영사기와 환등기 등 활용 교육)에 임명되어 교육청 각종 행사 사진을 찍고 자료를 언론에 배포하는 업무를 담당하다 73년에 전북도 교육청 공보실로 발령되었다."정읍농고 70주년 행사에 전북도교육청 설인수 교육감이 참석했었는데 내가 사진을 찍으며 행사장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유심히 보았던지 정읍교육청에 지시하여 전북도교육청으로 불러올렸습니다".전북도 교육청 공보실에 근무하며 중앙일보 주최 경호(목포 ~서울)역전마라톤대회를 비롯한 교육감이 참석하는 행사에서 사진을 찍었던 김씨는 행사 없는 날에는 사무실에서 중앙지와 전북도내 일간지를 보면서 스크랩을 하기 시작했다.도교육청 근무 3년만에 다시 정읍군 일선 초등학교로 부임한 김씨는 신문 스크랩을 지속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모토를 갖고 남들보다 많이 알아야겠다는 각오로 신문을 읽고 자료를 수집했는데 교사로서 포괄적 지식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설명했다.신문 스크랩은 종이절약을 위해 A4용지 이면지를 주로 활용하는데 사설을 비롯해 정치, 교육, 종교, 문화, 관광, 청소년 등 각 분야별로 분류한다. 또 미담기사는 주로 인물기사 위주로 수집하고 각 지방자치단체별로 홍보하는 기획기사도 분류하여 모았다.이처럼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다보니 단어를 조합하는 퍼즐퀴즈(99칸)를 만들어 정읍신문과 전북일보에 수년간 게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전 자료들이 일부분 없어져 아쉬움도 많다. "신문 스크랩 자료들이 이사를 다니면서 몇 차례 버려지기도 했고 집에 신문이 쌓여있는 모습을 탐탁지 않게 여긴 집사람이 내가 없을 때 몰래 고물상을 불러 팔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한 "지금도 정읍시청에서 내놓은 신문을 가져가고 어디든 신문이 모아져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2007년 정년 퇴직한 김씨는 정읍지역내에서 일어나는 각종 행사의 사진을 찍고 전북도내 일간 신문 스크랩을 지속하면서 자료를 활용해 정읍을 홍보하는 블로그 운영을 추가로 시작했다.그가 운영하는 '참 아름다운 정읍의 면면을' 이라는 블로그는 7년차를 맞아 현재 매일 300~500여명이 고정 방문한다. 이를 토대로 3년전 정읍시가 발족한 정읍시 블로그기자단 단장을 맡기도 했다.한 개면에 정읍시정 소식을 비롯해 경찰서, 문화, 박물관, 동학 관련 소식 등 16개 꼭지를 배치하고 '내장산' 노래를 BG로 깔아 보기 좋게 만드는데 매일 오후8시부터 새벽2시까지 블로그를 정리한다.김씨는 "돈으로 따질수 없지만 정읍을 홍보하며 가치를 올린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며 "스스로 하는 일이기에 힘 닿는데까지 지속하여 정읍시가 미래 지향적으로 가는데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 기획
  • 임장훈
  • 2013.08.13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 군산 윤민선 관장, 미군에 23년째 태권도 가르쳐

23년째 군산 미공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의 국기 태권도를 가르쳐 온 윤민선(49공인 6단) 관장.군산 미공군 장병들 사이에서 '마스터 윤'으로 통하는 윤 관장에게 지난 1990년부터 태권도를 배운 미공군 장병 수만도 1000여 명에 이른다.윤 관장은 파란 눈의 외국인들에게 23년간 태권도를 전파하며 지난해까지 10여 년간 전라북도 태권도협회 국제분과위원장을 맡아 태권도 국제화의 최일선에서 역할을 다 해왔다.최근 윤 관장은 부인 이은선(444단) 씨와 아들 윤승범(194단), 윤정호 (133품), 윤준혁(102품) 3형제와 함께 도합 19단(품)의 태권가족으로 더 주목받고 있다.이들 3형제가 지난 12일부터 19일까지 무주 반딧불체육관에서 열린 제7회 태권도문화엑스포 겨루기 부문 A매치, 태권도원배에서 각각 나란히 금메달을 차지했기 때문이다.특히 둘째 정호 군은 지난 5월 대구에서 열린 제42회 전국소년제천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2010년 이후 3년 만에 군산에 소년체전 금빛 쾌거를 전해 오기도 했다. 큰아들 승범이는 관원들이 태권도를 수련하는 모습을 보며 6살에 자연스레 도복을 입었다.2011년 전라북도 교육감배 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등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부친이 협회 국제분과위원장직을 맡은 임원인 관계로 직접 시합 지도에 나설 수 없는 불리함을 홀로 극복해 왔다.현장 지도자도 없이 홀로 경기를 벌이는 아들의 모습은 결국 태권도에 문외한이던 어머니 이은선 씨가 직접 지도자 자격을 갖추기 위해 태권도에 정식 입문하는 계기가 됐다.형을 따라 4살부터 태권도를 시작한 둘째 정호 역시 본보가 주최하는 전북일보배 태권도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는 등 뛰어난 태권도 실력과 함께 미성초등학교 어린이회장을 맡고 있는 당찬 소년이다.특히 어린이회장 공약으로 교내 태권도부 정식 창단을 위해 소년체전 금메달을 따 오겠다며, 이를 지키기 위해 지난해 찾아온 병마와 싸워가며 극복해 낸 사연은 감동으로 다가온다.지난가을 탈장 수술에 이어 겨울 천식까지 찾아오는 바람에 운동을 그만둬야 할 처지에 놓였던 정호는 친구들과 선생님들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며 아버지를 설득했다.천식이 악화되면 그만둔다는 조건으로, 한겨울 난방온도를 30도로 맞춰놓고 형에게 스파링을 요청하는 등 하루도 쉬지 않고 강도 높은 동계훈련을 자처하며 기어코 약속을 지켜냈다.애초 태권도가 싫다고 하던 막내 준혁이도 형들 앞에서 선보인 예사롭지 않은 발차기가 계기가 돼 현재 각종 지역대회에서 그 연령대에서 구사할 수 없는 화려한 발기술을 선보이며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있다.윤민선 관장은 "미군들에게 우리 태권도를 전파한다는 기쁨과 책임감으로 20여년을 지내다 보니 가족들까지 모두 함께 하게 됐다"며 "심신단련을 위한 태권도 정신에 맞게 운동을 잘하는 것보다는 아이들이 태권도를 통해 참되고 바른 길로 나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기획
  • 이일권
  • 2013.07.30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 부안 삼보죽염 김인석 대표

"죽염은 오염된 몸의 노폐물과 독소를 잘 제거해주어 모태에서 나올 때의 건강 상태에 가깝게 되돌려주는 환원력이 강한식품입니다"지난 1989년부터 죽염과 인연을 맺어온 (주)삼보죽염 김인석 대표는 국내 최초로 죽염제조장의 전수지도를 받아 죽염을 제조하고 있다.무더위 속에서도 강렬한 열기를 내뿜는 황토가마 앞에 선 그의 이마를 비롯한 온 몸에는 굵은 땀방울이 비 내리듯 흘러내린다.김 대표는 "우리가 흔히 먹는 소금은 정제염으로 Nacl 함량이 99% 이상이어서 미네랄이 거의 없는 단점이 있기 때문에 천일염을 권장해 왔다. 그러나 천일염도 유해성분과 유익한 성분이 공존하고 있다"고 들고 "대나무와 송진, 황토 등을 이용해 천일염 속의 유해성분을 제거하고 9회 법제를 통한 죽염의 기능을 배가시킨 전통 죽염은 우리의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현재 죽염제조장 이수자로 지정된 그는 "죽염 분야 최초 무형문화재(죽염제조장 제23호) 효산 스님의 기술 전수 지도로 황토가마에서 토종 소나무만을 이용해 전통 방식 그대로 자죽염을 생산하고 있다" 면서 "죽염은 우리 민족의 전통 민방요법의 하나로 역사적 전통과 독창성이 있는 매우 귀중한 문화자산"이라고 말했다.김 대표는 특히 "고객을 우선으로 진실만을 추구하는 마음, 전통의 맥을 이어가는 혼이 깃든 장인정신을 발휘해 올바른 식품문화를 위해 제품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며 "정직하고 정성을 다한 올바른 죽염을 만들기 위해 무거운 책임감으로 혼신을 기울이겠다"고 강조했다.하지만 죽염의 가치가 왜곡돼 알려져 어려움이 처했으나 이를 극복했던 애잔한 경험도 있다. 어려움을 극복한 데는 전통방식의 죽염 생산과 고객우선주의가 몸에 밴 그였기에 가능했다.김 대표는 "죽염의 가치가 왜곡돼 알려진 게 안타까웠다. 당시 죽염산업 전체가 어려움을 처했으나 꾸준한 노력 끝에 죽염의 참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게 됐다" 면서 "앞으로도 우리의 훌륭한 문화유산이 한식의 세계화에 큰 보탬이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삼보죽염은 서해안에서 생산된 천일염에 지장수를 뿌려 3~5년 된 직경 7~8㎝의 생대나무통에 잘 다녀넣은 뒤 소나무장작불로 850℃~1000℃까지 올린 황토가마에 구워낸다. 이 과정에서 대나무의 천연 유황성분 등이 스며들어 소금기둥이 남게 된다. 이 기둥을 다시 잘게 부수어 대나무에 다져 넣기를 8번. 마지막 9번째는 소나무 장작에 송진을 더해 마치 용광로에서 쇳물처럼 흘러내리는 죽염을 식혀 분말 또는 원석으로 만든다.

  • 기획
  • 양병대
  • 2013.07.23 23:02

[고창농악보존회장 이명훈 명인]전문 굿쟁이 예인의 삶 외길

"25년 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삶이었습니다. 행복, 기쁨, 아픔, 고됨의 연속이었지만 그 세월 속에서 굿을 통해 만난 인연들과 함께한 시간들은 참으로 큰 행복이었습니다"고창농악보존회 이명훈 회장은 1968년 고창군 고수면 예지리에서 태어났다. 1989년 서울예대에 입학하여 민요동아리(임실필봉농악, 이리농악 전수) 활동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굿쟁이 수업을 받게 됐으며, 1991년 전북 무형문화재 제7-8호 고창농악 상쇠 기능보유자 고(故) 황규언 선생과 60세에서 80세까지의 원로선생님들을 만나면서부터 고창농악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그 후로 25여년의 세월동안 고창농악을 배우고 익히며 고창농악보존회를 다지고 고창농악 전문교육기관인 고창농악전수관을 운영하며 고창군민, 전국의 젊은이들에게 문화생활로써 고창농악의 저변확대에 힘쓰고 많은 후학들을 길러냈다. 이명훈 회장은 90년대 초. 고창농악을 전수하려는 고 황규언 선생을 비롯한 고창농악인들과의 첫 만남을 계기로 고창농악의 계보를 잇게 됐다.이 회장은 고창만의 색깔있는 전통문화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여러 가지 공연, 체험, 교육사업이 이루어지길 희망했으며, 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고자 했다. 고창농악보존회장의 자격이 아닌, 전문 굿쟁이로서의 예인의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다.이 회장의 고창농악사랑은 그가 이룬 많은 결실들로 나타났다. 1994년 제12회 전국농악경연대회 대상, 1996년 일본 아마기시 축제 초청공연(설장구), 1998년 제24회 전주대사습놀이 농악부문 장원, 광복 60주년 기념 한러 유라시아 대장정 풍물공연팀 참가(상쇠), 2007년 중앙아메리카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2개국 순회공연(예술감독, 상쇠), 2008년 서울 국제무용축제 개막공연 '처용굿' (상쇠), 2011년 제14회 서울세계무용축제 '풍무-고깔소고춤'(총감독) 등이 그가 이룬 결실들이다. 또한 '굿과 사랑에 빠지다', '고창농악고창의 마을굿', '고창농악을 지켜온 사람들의 삶과 예술세계' 등 다수의 저서도 그의 농악사랑 결실이다. 이 회장은 특별히 지난 2009년부터 사람과 사람을 통해 전해진 고창만의 소리, 가락, 몸짓을 활자로 정리 100여년의 대기록을 집대성해 후대에 이르기까지 고창농악의 가치를 보존전수하는 데 힘쓰고 있다. 이명훈 회장의 오랜 꿈은 소박하지만 정취 있는 흙집과 한옥들을 만들어 그곳에서 글을 쓰는 사람과 춤을 추는 사람, 음악을 하는 사람, 조각을 하는 사람, 굿을 치는 사람 그리고 오래도록 황토빛 흙을 일궈온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은 것이다.일상의 생활에서 항상 굿이 함께 하는 굿치는 마을을 이루어 살고자 하는 이 회장의 꿈이 꼭 이루어 지기를 기대해 본다. 한편 (사)고창농악보존회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6호 고창농악 보유단체다. 고창농악은 호남우도지역에서 발달된 농악으로 고창, 영광, 장성을 중심으로 한 영무장농악의 맥을 정통적으로 잇고 있으며, 박성근, 김만식 등 전문예인들 중심으로 완성된 판굿, 문굿, 풍장굿, 도둑잽이굿, 매굿 등 굿의 형태가 원형 그대로 전해오고 있다. 부포놀이, 설장구놀이, 통북놀이, 고깔소고춤, 잡색놀이 등이 화려한 가락과 함께 멋드러진 춤사위로 남아있는 오늘날 최고의 무형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 기획
  • 김성규
  • 2013.07.16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순창 동계면 장군목 계곡

순창군 동계면에 위치한 장군목 계곡은 섬진강의 상류에 천혜의 수석공원으로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회문산 골짜기에서 섬진강에 합류돼 장군목에 이르는 500여리 가량 물길은 섬진강 중에서도 가장 향토적이며 자연미 넘치는 풍경을 연출한다.강물은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일 정도로 깨끗하고, 강물 따라 이어지는 길 자체만으로도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한다.장군목은 경치 뿐 아니라 풍수로 보아서도 명당 중의 명당이며, 용궐산 장군이 건너편 적장의 목을 칼로 쳐 그 목이 장군목에 떨어졌다 하여 장군목이라 부른다.순창의 명가 남원양씨가 장군목 앞 구미리에서 600여년동안 터를 닦을 수 있었던 것은 다 장군목이 사악한 것을 막아주는 덕분이라고 여기고 있다.장군목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기묘하게 움푹 패인 바위들이다.천태만상의 바위들이 물줄기를 따라 3km 정도 늘어서 있는 가운데 요강처럼 생긴 바위인 "요강바위"는 장군목의 상징이다.널찍하게 깔린 판석에 거인의 발자국인 듯 구불구불 깎여 파인 바위들 속에서 보면 마치 기계로 뚫어낸 듯한 둥근 구멍이 뚫린 바위가 바로 요강바위다.높이 2m, 폭 3m에 무게가 무려 15톤이 된다는 요강바위는 어른이 들어가도 넉넉할 정도로 깊은 웅덩이가 패여 있다.한국전쟁때 마을 주민 중 바위에 몸을 숨겨 화를 면한 사람도 있고,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네들이 장군목을 찾아 요강바위 위에 앉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속설로 전국의 수많은 여인네들이 찾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바위를 타고 넘는 강물이 바위를 깎아내 부드러운 곡선을 빚어놓은 요강바위는 15년전에 도난을 당해 경기도까지 옮겨지는 수난을 당했다. 도난당하게 된 내력은 어느날 외지인이 마을로 이사를 와 마을사람들에게 인심을 후하게 한다음 어느날 하루 마을 주민들을 단체로 관광을 시켜줬단다.그 틈에 외지인은 중장비를 끌고 와서 무려 15톤이 넘는 요강바위를 실어내가고, 그 바위를 팔 요량으로 경기 광주시의 한 야산에 숨겨놓았다가 붙잡혔다.바위는 증거품이 돼서 전주지검 남원지청 마당에 놓였으며,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바위를 옮겨오는 데 든 돈만 500만원이었다.주민들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3년 만에 요강바위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주민들의 노력으로 다시 제자리에 돌아온 뒤로는 여전히 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요강바위 뿐 아니라 주변에 널린 바위들은 가운데가 둥글게 패여 장군목을 흐르는 물살이 빚어낸 신묘함 그 자체다.하나같이 일부러 조각해 놓은 듯 섬세하고 정교하지만, 실은 수천 수만 년의 세월 동안 강물이 쓰다듬고 어루만져 태어난 작품들이다.

  • 기획
  • 임남근
  • 2013.07.09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국내 最古 장수향교

장수읍 장수리에 위치한 장수향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다. 조선 태종 7년(1407년) 장수읍 선창리 당곡에 창건됐다는 점에서 600여년의 세월을 자랑한다. 향교는 덕행이 훌륭한 사람들을 모셔 제사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나라에서 세운 조선시대의 지방교육기관이다. 선조 30년 정유재란(1597)때 왜군이 남원성을 침공하고 북상 중 장수 향교를 불태우려하자 향교 지기 정경손(丁敬孫)은 "이 곳은 성전이니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 침범하려거든 나를 죽이고 가라"고 목숨을 걸고 항거했다. 이 의기에 탄복한 왜장이 오히려 "이 곳은 성전이니 침범하지 말라"며 본성역물범(本聖域勿犯이 성역에는 들어가지 말라)이라는 신표(信標)를 써주고 물러나 왜군 후속부대의 피해를 당하지 않고 장수향교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후손들은 향교 정면에 정경손을 기리는 비각(정충복수명비전북도 문화재자료 제38호)을 세워 그의 덕을 기리고 있다. 매년 음력 3월 15일 그의 얼을 기리는 제례를 지니고 있다. 향교의 부강문(扶鋼門)은 외삼문으로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장수향교에서는 옛 성현들을 기리기 위한 제례봉행은 매월 음력 1일과 15일에 대성전에서 전교, 장의들이 분향하고 있으며 일반인도 참여할 수 있다. 또한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춘추계석전대제(釋奠大祭)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후세들을 위해 한자와 예절교육으로 향교일요학교를 수시로 운영하고 있으며, 여름과 겨울방학 동안은 성균관유도회 장수군지부 주관으로 한자 및 충효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대성전은 조선시대 향교 건축의 대표 건물 중 하나로,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광복후 1957년 국보 제420호로 지정됐으며,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72호로 변경 지정됐다. 정충복수명비(정충복수명비)도 1985년 8월 16일 전북도 문화재자료 제38호로 지정됐다. 전북도 문화관광해설사 안충현씨는 "장수향교가 다시 국보로 지정돼 대한민국 역사적 산물로서의 가치를 높이 인정받는 것이 앞으로의 바람"이라고 말했다.

  • 기획
  • 정익수
  • 2013.06.18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무주 '반딧불이와 먹이 서식지'

선선한 바람이 좋은 초 여름밤. 캄캄해진 시골 길을 걷노라면 '졸졸졸' 물소리, 풀벌레 소리, 그리고 여기저기서 메아리쳐 들리는 개구리 소리가 '쿵쿵' 가슴을 두드린다. 유난히 산이 많아 밤도 깊던가! 무주에서 느끼는 한 밤의 정취는 오랜 여운을 남긴다. 환경 1번지다운 자연의 소리들과 더불어 생명의 빛을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주에는 천연기념물 제322호 '무주 일원의 반딧불이와 그 먹이 서식지'가 있다.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는 서식지들은 무주읍 가옥리 가림마을과 설천면 장덕리 수한마을, 무풍면 금평리 올림픽 숲 등 3곳으로, 1982년 지정 당시에는 설천면 청량리 앞 남대천 신계 취입보를 기점으로 설천면 소천리 평지마을에서 동북쪽으로 구부러진 대불천 중간 지점인 나림마을 앞 개울가까지였다.그러나 반딧불이 서식 여건의 변화로 그 서식 밀도가 낮아짐에 따라 해당 기관과 학계에서 수년간의 조사와 연구를 진행해 지정구역이 해제됐고 2002년에 현재의 지역으로 변경됐다. 명칭도 '무주 설천면 일원의 반딧불과 그 먹이(다슬기) 서식지'였다가 '무주 일원의 반딧불이와 그 먹이 서식지'로 바꿨다. 예전 보호구역이었던 설천면 청량리 일원에는 현재 반디랜드가 조성돼 자연생태 학습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반딧불이연구소에서는 반딧불이의 생태와 개체수 증식, 그리고 서식지 확대 등에 관련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깨끗한 환경에서만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진 반딧불이는 보호지역 외에도 무주읍 용포리 잠두마을과 가옥리 갈골, 반디마실길, 적상면 괴목리 하조마을과 내도리 내동마을 등에서 주로 출현하고 있다. 특히 잠두마을과 갈골, 반디마실길(무주읍 잠두~부남면 굴암리 간) 등은 해마다 6월 반딧불축제(운문산애반딧불이)의 신비탐사를 비롯해 8월의 늦반딧불이 탐사지가 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별빛, 달빛 벗 삼아 자연으로 떠나는 반딧불이 신비탐사는 해마다 인기. 촘촘히 박힌 별빛, 환하게 길잡이가 돼주는 달빛을 친구삼아 걷다가 만나는 반딧불의 감동은 이루 말로 다 형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9일 막을 내린 제17회 무주반딧불축제에서도 1만 5000여 명이 반딧불이 신비탐사 지역을 찾아 초여름 밤 자연이 발하는 생명의 빛에 탄성을 질렀다. 무주군에서는 반딧불이 서식지 보존을 위해 반딧불이 다발생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좌담회를 개최하고 친환경농업실천(유기질 비료, 부직포 등 친환경 농자재 지원)을 유도하는 등의 노력을 펼치고 있다. △반딧불이반딧불이는 흔히 반디, 반딧불, 개똥벌레 등으로 불려 지기도 하는데 이는 각 지역에서 쓰고 있는 방언이며 정확한 명명 표기는 '반딧불이'가 맞다. '반딧불'은 반딧불이가 내는 불빛을 뜻한다.반딧불이가 내는 빛은 반딧불이의 배에 있는 발광세포에서 나오는데 루시페린과 루시페라제라는 성분이 산소와 작용하여 발생하는 일종의 산화에너지다. 98%가 빛 에너지이며 발광색은 황색 또는 황록색이고 그 파장은 500~600㎛이다.

  • 기획
  • 김효종
  • 2013.06.1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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