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Pic] 유신의 절명
37년 전 10월26일, 그러니까 1979년 10월26일 서울 궁정동 비밀연회장에서 코드 원, 대통령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권총 두 발을 맞고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뒤 유신독재로 영구집권 기반을 확실히 다진 독재자가 집권 18년 만에 가장 가까이에 둔 부하의 총탄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사건 후 국군수도통합병원에 실려 온 그의 시신을 확인한 군의관은 피범벅이 된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배꼽 아래의 흰 점을 보고서 사망자가 대통령인 것을 확인해야 했다. 대통령 피살 다음 날인 10월27일 새벽 4시, 나중에 허수아비 제10대 대통령이 된 최규하 국무총리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 뒤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는 1026사태부터 이듬해인 1980년 518까지를 일컫는 서울의 봄 비극, 그리고 1993년 2월 32년 군부통치의 마지막 실력자 노태우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총 13년에 걸쳐 56공 천하를 연 신군부독재시대가 막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1979년 10월 26일10월 26일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밀실에서 열린 만찬장에는 대통령 박정희, 비서실장 김계원, 경호실장 차지철, 중정부장 김재규가 참석했고, 2명의 여성 연예인이 동석했다. 만찬은 6시5분 쯤에 시작됐다.당시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를 주도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의 수사발표 등에 따르면, 박정희는 식사를 하면서 바로 열흘 전인 10월15일 부산대에서 촉발된 부마민중항쟁사태를 중앙정보부의 정보 부재 탓으로 돌려 힐책했다. 이에 동석한 경호실장 차지철도 나서 김재규를 과격한 어조로 공격했다. 흥분한 김재규는 밖으로 나가 권총을 갖고 만찬장 안으로 들어가 박정희와 차지철에게 두 발씩 쏘았다. 두 사람은 절명했다.대통령 박정희의 급사에 대한 반응은 크게 엇갈렸다. 무려 20년 가까이 박정희와 공화당의 선전선동에 눈이 가린 채 살았던 상당수 국민은 슬픔을 감추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한 부류는 헌정파괴자, 독재자가 측근의 총탄을 맞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하지만 신은 얄밉게도 민주주의와 정반대, 독재자들의 편에 섰다. 김재규는 권총을 쏜 후 맨 처음 정승화 육참총장을 궁정동 안가로 불렀다. 대통령이 쓰러졌음을 알리고 비상사태인 만큼 안보상황을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중앙정보부 쪽으로 가던 중 정승화가 비상이니 육군본부 벙커로 가자고 하는 바람에 국방부장관실로 갔다. 이로써 그는 일만 저질렀을 뿐 사후 주도권을 쥐는 데 실패했다.26일 자정 무렵, 김재규는 김계원과 함께 국방부 장관실에 있었다.병원에서 박정희의 시신이 확인되자 국무위원들이 비상국무회의를 준비했고, 국방부장관실에는 최규하 국무총리, 노재현 국방부장관, 김계원 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자리했다. 비상국무회의가 열리면 김재규는 대통령 사망과 관련한 설명을 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전개해 나갈 생각이었을 것이다.그런데 탈이 났다. 총격 현장에 있었던 비서실장 김계원이 김재규에게 비수를 겨눈 것이다. 김계원이 바로 옆방으로 노재현 국방장관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러 내 각하를 시해한 범인은 김재규 부장이라고 밀고한 것이다.노재현과 정승화는 곧바로 김재규 체포작전에 들어갔다. 노재현은 직속기관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불러 정승화 육참총장을 도와 대통령 시해범 김재규 체포를 도우라고 명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은 불과 47일 만에 정승화를 총격 체포하는 하극상을 저지른다.)김재규는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한 채 국방장관실 옆 회의실에 앉아 있다가 국방장관 보좌관 조익래로부터 육참총장님께서 뵙자고 한다는 전언을 듣고 따라나섰다가 헌병감 김진기 등에 의해 전격 체포됐다. 김재규는 부마사태의 참혹한 현장을 목도하고 박정희 정권에 회의를 품어 범행했다고 말하는 등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음을 주장했지만 전두환 일파가 조정하는 재판부에 의해 1980년 5월21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신군부는 불과 사흘만인 24일 광주민중항쟁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 그의 부관 박선호 등과 함께 사형을 집행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신속한 사형집행은 김재규가 신군부 독재에 부담이 될 것을 우려한 탓이다. 경북 구미 동향 선후배 사이인 박정희와 김재규는 신뢰가 깊었던 것 같다. 이후락, 김형욱 등 믿었던 중정부장들이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등 내심 불안감이 가중되자 76년 말 동향 후배 김재규를 중정부장에 임명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 이것은 불의는 결국 심판받고 만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1979년 12월 12일박정희는 516쿠데타 후 반혁명 사태 등을 통해 친위 측근 그룹을 한층 정예화하는 한편 전두환과 노태우 등 TK 중심의 육사 출신 젊은 장교들의 모임인 하나회를 육성했다.산 박정희는 전두환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생전의 박정희는 전두환이 자신의 뒤를 이어 군부독재를 이어갈 수 있는 결정적 사인을 하나 한다.전두환은 516쿠데타 때 박정희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육사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때부터 전두환은 중정과 보안사 등을 돌며 박정희의 신임을 받는 정치장교로 컸다. 그의 정치적 야심을 알아본 박정희가 쿠데타 이듬해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했을 때는 군에 남아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하나회를 결성해 박정희를 든든하게 했다.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박정희는 항상 군부 속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불안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뒤엎어버릴 세력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밤잠 이루기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쿠데타 직후인 1961년 김종필이 만든 중앙정보부 등 친위조직들이 샅샅이 감시하고 뒤지고 고문하고 설치긴 했지만 안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의 하나회가 있기에 그는 다소 안심할 수 있었고, 그 중심에 전두환이 있었다.전두환은 운명의 해인 1979년 2월 1사단장에서 보안사령관으로 무려 2단계를 뛰어넘는 승진을 한다. 당시 영남 군벌 대표 격인 노재현 국방장관이 진종채가 떠나는 보안사령관 자리에 전두환을 단수 추천, 박정희 사인을 받아낸 것이다. 이는 관례가 없는 파격이었다.전두환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기회는 비상사태시 범죄수사 등을 총괄하는 자리인 합동수사본부장 자리를 꿰차게 된 결정이었다. 박정희는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한 후 계엄령과 전시에 보안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도록 하는 대통령령에 사인했다. 이 결정은 직전까지 보류 상태였다. 1026사태 당시 계엄령하에서 합수부장을 맡게 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검찰총장과 치안본부장,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휘하며 거리낌 없이 야욕을 채울 수 있었다. 신이 있다면 분명 전두환 편이었고,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두 번째 불행이었다.박정희 사후 계엄령하에서 보안사령관으로서 합수부장이란 막강한 권한을 손에 거머쥔 전두환은 노태우 박희도 장세동 등 하나회 핵심을 주축으로 음모를 꾸몄다. 전두환은 경복궁에 위치한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단장 장세동 대령)에 반란군 본부를 차린 다음 거사일인 1979년 12월12일 저녁 식사에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본 헌병감(이들은 하나회가 아니었다)을 서울 연희동의 고급 요정에 초청, 감시망을 흐리게 한 뒤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참총장을 체포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 신군부에 압도당했고, 이날 밤 뒤늦게 반란군 대응에 나선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은 치밀하게 계획한 반란군에 응대조차 못 한 채 체포되고 말았다.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는 박정희의 그것을 대부분 답습했다. 내 편이 아니면 철저하게 응징했고, 일어설 수 없게 만들었다. 박정희는 자신을 두 번이나 구해준 은인 장도영을 배신했다. 김형욱 이후락 사례에서 보듯 측근이라도 배신할 것이 우려되면 잘라냈다. 전두환이 정승화 장태완 정병주 등을 총격 체포, 하나회 세상을 만든 것과 다를 바 없다. 두 독재자 공히 언론을 탄압,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 가렸다.1961년 5월 16일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은 군부 독재에 굴복하지 않았다. 회유당하지 않았다. 일제 36년의 치욕을 딛고 광복을 얻은 국민은 1948년 헌법에 기초한 민주국가의 이념, 자존심을 끝까지 지키고자 싸웠고, 전두환이 유신의 악령을 재현하려던 1987년 413 호헌조치 철폐 등 값진 승리를 이끌었다. 그 선봉에 젊은 학생이 있었고, 의기 넘치는 지식인층과 일반 시민이 있었다.1960년 3월15일 저질러진 이승만의 장기집권 야욕 315 부정선거는 국민을 분노케 했다. 남원 출신의 김주열 군(19세마산상고1년)이 마산지역 315부정선거 항의 데모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된 뒤 참혹한 주검으로 발견되면서 국민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고 위대한 419혁명으로 이어졌다.당시 이승만이 물러난 뒤 정권을 잡은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의 정권이 정치 경제 사회 등 전반의 혼란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잘못은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군부에서는 부정부패와 승진적체 등으로 하극상이 일어나는 등 혼란도 컸다.그렇다고 박정희 등 정치군인 집단이 단지 권력욕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헌정을 뒤집은 것은 명백한 반란이다. 일제 앞잡이 황군 장교였고, 1948년 여순반란 사건 당시 남로당 끄나풀이었던 박정희가 일으킨 쿠데타는 어떠한 명분도 정통성도 인정될 수 없는 범죄행위일 뿐이었다. 이에 동조한 세력이 육사 5기와 8기 출신의 김종필 김형욱 등이었고, 전두환이 만든 하나회였다.박정희와 김종필은 1960년부터 쿠데타를 모의했지만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가 1961년 5월15일 1군창설기념일 밤인 5월16일 0시를 기해 거사하기로 했다. 행사 후 국무총리는 서울로 귀환할 것이고, 야전군 지휘관들은 술을 마시고 잠들었을 시간을 틈탄 반란작전을 꾸몄다. 박치옥, 차지철 등이 이끄는 공수부대와 해병대, 경기도 일대의 야전군 등이 전격 작전에 동원돼 반도호텔에서 장면 총리를 체포하고 방송국 등을 장악, 정부를 전복했다. 어정쩡한 기회주의자였던 장도영은 박정희의 꾐에 빠졌다가 결국 토사구팽당했다.집권한 박정희는 공화당과 중앙정보부 등에 포진한 쿠데타 출신과 전두환 등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회의 군부 등 도움으로 장기집권 준비를 진행한다. 일제에서 벗어난 지 불과 15년 정도 지난 가난한 국민을 향해 경제개발계획을 내세우며 자신의 집권 당위성을 펼쳐나간다.그의 통치는 전적으로 군부에 의존됐다. 그는 독재권력이 위협받을 때 군과 중앙정보부 등을 동원, 국민을 짓눌렀다. 1961년 5월 군대를 동원해 정권을 찬탈한 그는 1964년 대학생과 종교인 등이 나서 한일외교 정상화를 반대하자 63계엄령으로 대중의 입을 틀어막았다. 1969년 3선개헌을 강압적으로 관철시킨 다음 1971년 4월27일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대학생들이 장기집권 반대, 대학교련철폐, 중앙정보부 해체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자 1971년 10월15일 위수령을 선포하고 시위 대학생들을 잡아들이는 한편 군부대를 대학 캠퍼스에 주둔시켰다. 또 1972년 10월17일 비상조치를 내리고 개헌을 단행하면서 국회에 군병력을 투입했다. 국회에 탱크를 진주시켜 유신헌법 제정을 강제한 것이다.그는 죽기 직전까지 군대의 총칼로 민중을 탄압했다. 부마민주항쟁(1979년 10월15~20일)에 공수부대를 투입, 무참히 진압한 것이다. 부마민주항쟁은 10월 15일 부산대 학생들이 민주선언문을 배포하고 시위를 벌이다 시내버스 등을 타고 부산시내로 진출하면서 촉발됐다. 부산은 물론 마산까지 확산됐고 시민들도 가세, 학생들과 함께 정치탄압 중단,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격렬히 시위했다. 이에 박정희는 비상계엄령과 위수령을 내리고 공수부대로 진압했다.1972년 10월 17일박정희의 18년 독재에서 압권은 1972년의 유신헌법을 강제한 것이다.1972년 10월 17일 독재자가 내린 비상조치 속에서 이뤄진 이 제7차 개정헌법(제4공화국 헌법)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를 목적으로 내세운 포장과 달리 대통령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보장하기 위한 치졸한 정치공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가 총탄의 비명에 간 뒤 그를 쏙 빼닮은 전두환이 역시 장기집권을 획책하며 만든 1980년 10월 22일의 개정 헌법(제5공화국 헌법)으로 사라진 악법이었다.전두환은 1212 군사 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을 통해 집권한 뒤 제5공화국 헌법을 만들었는데 1980년 10월27일 발효됐다. 박정희 유신헌법을 그대로 답습,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선출하고 그 임기를 7년으로 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전두환은 이 헌법을 근거 삼아 1988년 3월3일 취임한 뒤 1987년 4월13일 국민의 직접선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밝히며 장기집권 야욕을 숨기지 않았지만 결국 1987년 6월 국민항쟁에 굴복했다. 김영삼 정권시절 517 내란음모, 광주민중항쟁 발포 시민 학살 등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과 노태우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사면받고 풀려났다. 권력은 부패하게 마련이고 정의는 언제나 멀다. 권력욕에 휩싸인 일부 정치군인들에 의해 유린된 과거 32년 간의 역사를 뒤돌아볼 때 1026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어떤 이유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김재규가 18년 동안 민중을 짓누르며 독재권력을 휘둘러온 대통령 박정희를 시해, 군부독재의 틀 속에서 꼼짝 못하던 대한민국 사회에 변화의 물꼬를 텄다는 사실이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신군부가 똑같은 수법으로 정권을 장악해 군부독재정권을 출범시켰지만 박정희 시해사건은 국민 사이의 민주화 열기를 한층 더 고조시켰다. 광복 후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했다. 일본 제국주의를 거치면서 자유와 독재가 뭔가를 뼈저리게 알았다.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교육이 계속 이어지면서 지식인층이 두터워졌고, 경제기반도 탄탄히 할 수 있었다. 이런 속에서 국민들의 의식은 한층 성숙해졌다. 권력욕에 두 눈이 뒤집힌 박정희와 전두환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거스르고, 성숙해 가는 국민의식을 앝보았다. 북한을 통일의 대상으로 대하지 않고 집권 연장의 수단으로만 삼았다. 박정희가 1971년 미중간 핑퐁외교 등 탈냉전 데탕트 분위기를 역이용, 국지안보위기론을 내세운 것과 1986년 전두환의 하수인 장세동 안기부장이 나서 북한의 수공에 대비한 평화의 댐을 건설하자고 국민을 선동한 사건이 그것이다. 2016년 10월ing최근 박근혜 대통령은 이들의 유전자를 그대로 이어받은 듯한 행보 때문에 적잖은 비판을 사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과 로켓발사 등 군사적 위협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국민의 안위와 국토 수호를 위해 일하는 대통령으로서 자세는 군사적 대치 상황을 피하면서 평화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그렇지 않은 모습이다. 박정희가 74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내면서도 끊임없이 남북긴장을 최고조로 높이며 집권에 이용했던, 그런 부류의 대북정책을 선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또 박정희가 전두환 등 하나회 정치군인들을 권력 유지의 핵심으로 삼았던 것처럼 국정을 펴고 있지 않느냐는 의혹을 받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지난 25일 대통령 본인이 춘추관 기자회견장에 나서 국민 앞에 사과한 최순실 국정개입 의혹은 야당은 물론 여당의 분노를 하늘 끝까지 치솟게 했다.국민과 국가 앞에 정의롭지 못한 정권은 절대 오래 유지될 수 없다. 새누리당이 그동안의 청와대 비호 자세를 털고 나선 것은 그들의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의 집권 연장을 위협하는 작금의 상황 전개가 진실의 전모를 밝히는 데 큰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인가. 국민들은 빙산의 전모를 언제 다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