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4-11-29 11:33 (Fri)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기획 chevron_right 짠 뉴스

[전북일보 카드뉴스] 구제역에서 구제해 줘!

구제역에서 구제해 줘!#표지.구제역에서 구제해 줘!#1.조류 인플루엔자(AI)의 충격에서 좀 벗어나나 했더니(달걀아 반갑다!)#2.이번엔 소돼지들이 아프답니다.#3.구제역은 발굽이 갈라진 동물(우제류)들이 걸리는 질병입니다.#4.입과 발굽 주변에 물집이 생기는 증상이 특징적인데요.전염성이 매우 높고, 어린 가축은 치사율도 높습니다.#5.전북지역은 그간 구제역 청정지대로 불릴 만큼 안전한 편이었지만,#6.지난해 1월 김제와 고창에서 구제역이 발생하면서 돼지 1만여 마리가 도살 처분됐고,#7.이번에 다시 정읍의 한우 농가에서 구제역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8.구제역 위기경보 심각 단계로 격상가축시장 폐쇄우제류 이동 금지등의 조치가 취해졌고#9.전북도는 급히 일제 백신 접종에 들어갔습니다.#10.(백신? 그런 게 있는데도 왜 난리인 거지?)#11.원래 농가에서는 소돼지에 백신을 맞혀 구제역에 대한 항체를 만들어야 하는데요,#12.전북도 통계 속 항체형성률: 96.6%구제역 발생 농가 실제 항체형성률: 5%#13.주변 농가 12곳 중 6곳이 기준(80%) 미만(심지어 0%인 곳도)#14.(왜죠?)#15.도축장에 출하된 소 중에서 일부만 선별해서 검사하는 기존 검사 방식에도 문제가 있고,#16.백신 유통-보관-접종 체계에 허점이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17.백신이 사실은 별 효과가 없는 물백신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됩니다.#18.(한숨)#19.(텅 빈 마트 육류유제품 코너)/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7.02.16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 이 포켓스톱에는 저항의 전설이 있어

이 포켓스톱에는 저항의 전설이 있어#표지.이 포켓스톱에는 저항의 전설이 있어#1.포켓몬 성지로 떠오른 전주 덕진공원!이곳에는 그동안 잘 모른 채 지나쳤던 우리 지역의 이야기가 있다는데요!#2.한 번 떠나볼까요?(가취가욥~!)#3.연못 동쪽, 동상 하나가 서 있습니다.이 동상의 이름은 전봉준 선생 상.#4.동학농민혁명을 이끈 바로 그 전봉준 장군을 기리는 동상입니다.#5.다만 지도에서 위치가 조금 어긋나 있어, 실제 위치를 찾으려면 눈썰미가 조금 필요합니다.#6.덕진공원에는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손화중 장군을 기리는 조형물도 있습니다.보국안민 척양척왜라고 쓰인 비석이 그것인데요.#7.사실 덕진공원 자체는 동학농민혁명과 큰 연관이 없어 논란도 있었습니다만,#8.전주라는 도시가 혁명의 절정이었던 전주성 점령과 전주 화약의 도시였기에 의미가 적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풍남문과 전라감영 터, 한옥마을 동학혁명기념관도 포켓스톱으로 지정돼 있습니다.)#9.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포켓스톱은 전북대 캠퍼스에도 있습니다.#10.구정문을 지나 학생회관 맞은편을 보면 건물 한쪽 벽에 그려진 벽화가 보입니다.#11.제1과학관의 이 벽화는 전북지역미술공동체가 1988년 그린 것인데요.#12.동학농민혁명에서 출발한 민중 저항의 역사를 담아낸 그림으로, 그 힘과 기운이 느껴집니다.#13.그 바로 앞에는 1980년 5월 18일, 518 민주항쟁 당시 첫 희생자인 이세종(리세종) 열사를 기리는 비석이 있습니다.#14.518과 저항 정신의 상징과도 같은 조형물로, 지난해 전북대 학생들의 시국선언도 이 자리에서 진행됐죠.#15.다만 포켓스톱 이름에서 리세중으로 오타가 나 있는 점이 아쉽습니다.#16.구정문 옆에는 419 혁명의 진원지라는 글귀가 박힌 비석이 있습니다.#17.1960년 419 혁명 정국에서 전국 대학가 최초의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였던 전북대 44 시위가 이곳에서 벌어졌다는 의미입니다.#18.때마침 4월 4일은 전북대 개강일이었습니다. 정치과 학생이라면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전대열 씨, 당시 정치학과 3학년)#19.그간 무심코 지나치곤 했던 우리 지역의 저항의 기록들. 이제 조금은 새롭게 다가오지 않나요?/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7.02.09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 설 특집, 전북도민 촛불 연대기

(동영상 카드입니다. 재생을 눌러주세요.)(동영상 카드입니다. 재생을 눌러주세요.)설 특집, 전북도민 촛불 연대기#표지.설 특집, 전북도민 촛불 연대기#1.이건 바로 전북도민의 엄청난 열기#2.준비됐나요?#3.전북일보가 여러분께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4.이화여대국정감사태블릿 PC 에서#5.드러난 국정농단#6.전북에서는10월 27일#7.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한 전북지역 비상시국회의 시국선언대통령 사퇴새누리당 해체#8.10월 28일#9.전북대전주대 시국선언성역 없는 수사와 관련자 엄중 처벌#10.그리고첫 번째 촛불집회#11.10월 29일 토요일,#12.분노한 시민들의 행진과시내버스 경적시위#13.(동영상)#14.쏟아지는 시국선언과대자보,#15.청소년들의 행진#16.11월 5일#17.제1차 전북도민총궐기(주최 측 추산 3500명)#18.11월 12일#19.서울로, 서울로민중총궐기#20.100만 촛불 함성'하야정국 횃불'로 번지다#21.그리고매주 토요일,전주 관통로 사거리#22.혹은 풍남문 광장#23.군산, 익산, 정읍,#24.남원무주장수임실순창고창부안에서도#25.캠퍼스의 대학생도거리의 상점도바다의 낚시꾼도농민의 트랙터도#26.(동영상)#27.12월 9일#28.가 234표#29.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30.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31.해가 바뀌고#32.1월 9일#33.세월호 참사가 벌써 1000일#34.날이 추워도눈이 내려도#35.함께 외친적폐청산#36.적폐?#37.국정원 대선개입 의혹공공부문 민영화 갈등세월호 참사메르스AI 등 위기 대응 실패쌀값 폭락물대포와 국가 폭력한-일 위안부 합의개성공단 폐쇄사드(THAAD) 갈등대학 구조조정 문제문화계 블랙리스트...#37.아직 안 끝났습니다.#38.전북도민의 목소리,설날 이후에도 계속#39.전북일보사/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7.01.26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 전북 여행자랑: 2017~2018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전북 관광 6선

전북 여행자랑: 2017~2018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전북 관광 6선#표지.전북 여행자랑: 2017~2018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전북 관광 6선#1.이불 밖은 위험해. 역시 누워있는 게 최고야.#2.뭐, 재미있는 거라도 있나 볼까?#3.>>>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2017~2018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4.뭐야 이게?#5.>>>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전라북도에 있는 관광지는 6곳<<<#6.호오.#7.전주 한옥마을은 전라북도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관광지 중 하나죠.온갖 먹거리와 함께, 한복 입고 즐겨보는 가장 한국적인 동네 한 바퀴.#8.1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는 곳. 근대문화유산을 간직한 군산으로 시간여행 다녀오는 건 어떨까요?#9.바다와 산이 공존하는 곳, 변산반도. 변산격포에서 바닷바람도 쐬고, 내소사에서 속세의 짐도 덜어보고.#10.하나, 둘, 셋, 치즈!디디에 세스테벤스(지정환) 신부가 산양 두 마리를 키우며 시작된 곳, 우리나라 치즈의 원조, 임실 치즈마을. 치즈를 직접 만들어볼 수도 있어요.#11.하늘로 쫑긋 솟은 귀 두 개. 진안을 상징하는 마이산은 사시사철 언제 찾아도 훌륭한 여행지.겨울엔 위로 솟는 역고드름에, 봄엔 산을 둘러싸는 벚꽃에, 여름엔 바위와 어울리는 푸른 수목에, 가을엔 코스모스와 단풍에 감탄하는 곳.#12.전주의 관문, 예(禮)의 고장 삼례. 옛 양곡창고와 시설물들을 꾸며 내놓은 삼례문화예술촌은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잡아끕니다.비비정에 앉아 만경강을 바라보는 풍경도 일품이죠.#13.호오.#14.이 정도면 이불 바깥이라도 괜찮을 것 같은데?(주섬주섬)/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7.01.11 23:02

[전북일보 만화뉴스] 본격 2017년 새해 소감 만화

#표지.본격 2017년 새해 소감 만화#1.안녕하세요, 전북일보 디지털뉴스국 K 기자입니다.#2.오늘은 새해를 맞아서 제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 해요.#3.12월 31일, 2016년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여느 주말처럼 촛불집회 현장을 영상으로 담기 위해 풍남문 광장으로 나갔죠.#4.유명한 사람이 와서 그런지 술렁술렁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어쨌든 별 탈 없이 취재를 마치고 SNS에도 소식을 전했습니다.#5.저녁을 먹고 디지털뉴스국의 L 기자와 함께 2016년 전주시 제야 축제 모습을 담으러 다시 나왔습니다. L 기자는 라이브 촬영을, 저는 클립 촬영을 했죠.#6.10987654321 해가 바뀌고, 종이 울리고,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7.까만 밤하늘에 펑펑 터지는 불꽃은 아름답고 황홀했습니다.#8.그리고 출근할 때 20대였던 저는 퇴근할 때 30대가 되어 있었죠.#9.20대의 저는 때로는 무모했지만 또 때로는 지나치게 소극적이었고, 때로는 생각이 너무 길어 일을 그르친 반면 또 때로는 우물에서 숭늉 찾듯 조급했습니다.#10.시간의 흐름만으로 저절로 바뀌는 것은 없다고 믿어요. 30대의 전 조금은 더 지혜로워지고 조금은 더 유능해졌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제게 달렸죠.#11.이제 햇수로 출범 두 번째 해를 맞은 전북일보 디지털뉴스국도 그러할 것입니다.#12.2017년 정유년, 여러분의 새해맞이는 어떤가요? 여러분의 목표는 어떤가요?#13.여러분의 행복한 한 해를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그림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7.01.05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 AI(조류 인플루엔자) 창궐! Aㅏ니 Iㅣ럴 수가

#표지.AI(조류 인플루엔자) 창궐! Aㅏ니 Iㅣ럴 수가#1.2016년 10월.계란 한 판 주세요!네, 5000원입니다.#2.2016년 11월.계란 한 판 주세요!네, 6000원입니다.#3.2016년 12월.계란 한 판 주세요!네, 7000원입니다.#4.2017년 2월.계란 한 판 주세요!네, 1만2000원입니다.#5.2017년 X월.계란 한 판 주세요!네, x만xxxx원입니다.#6.(혼돈)#7.흔히 조류독감으로 불리던 전염병, 조류 인플루엔자. 영문 약자로 AI라고도 하지요.#8.전북지역에서는 11월 16일 만경강 변에서 포획된 야생 조류에서 H5N6형 고병원성 AI가 처음 발견됐는데요.#9.불과 한 달여 만에 전국으로 퍼졌고, 도내에서 121만 마리, 전국에서 2085만 마리(2016년 12월 21일 기준)나 되는 닭오리 등 가금류가 살처분됐습니다.#10.AI가 퍼질 대로 다 퍼진 뒤인 12월 15일에서야 정부는 AI 위기경보를 심각 단계로 올립니다.(정부의 위기단계 격상에 따라 김일재 전북도 행정부지사와 관련 부서 실국장 등이 전북도재난안전대책본부 상황실에서 긴급 차단방역 대책을 논의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전북도)#11.이 바이러스는 국내에서는 이번에 처음 발견된 것으로, 2014년 4월 이후 중국, 홍콩, 베트남, 라오스 등에서 발생했습니다.#12.야생 조류에 의해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피해를 키운 것은 허술했던 방역 시스템이었습니다.반경 3㎞ 방역대 안에는 육용오리 농가 수가 미미해 역학적 관계가 적고, 토종닭 농가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테니까(전북도)#13.특히 농장과 농장 사이로 수평적 전파가 이뤄졌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14.그리고 이제는 겨울 철새가 대거 이동합니다.전북에는 고창 동림저수지, 군산 금강하굿둑 등 철새 도래지가 있어 더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15.2014년 1월과 11월, 2015년 4월, 그리고 1년 반 만에 또 반복된 재앙. 왜 무너지지 말아야 할 것이 자꾸 무너지는 걸까요./기획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6.12.22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 지방의원 재량사업비와 불투명사회

지방의원 재량사업비와 불투명사회#표지.지방의원 재량사업비와 불투명사회#1.₩3,750,000,000.37억5000만 원.#2.익산시의원(25명) 1인당 1억5000만 원.#3.익산시민(30만798명, 2016년 11월 기준) 1인당 1만2467원.#4.>익산시 1인당 주민세 1만원.#5.이른바 의원 재량사업비. 관행적으로, 행정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소소한 주민 민원을 해소하는 데 드는 돈.#6.하지만 그 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공개되지 않기 때문이다.#7.한 초선 시의원이 관행을 깨뜨렸다. 그는 매년 재량사업비 사용내역을 SNS에 공개하고, 주민들의 의견을 받는다.검증 없이 편성사용되는 재량사업비를 공개해 불신을 종식시켜야죠.(임형택 의원, 바 선거구)#8.(머쓱해진 의원들)#9.왜 우릴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10.의원 총회 개최!임형택 의원 징계!#11.최근 전북도의회에서도 재량사업비 뒷돈 거래 의혹이 불거지면서 검찰이 해당 의원의 사무실과 자택 등을 압수수색하기도 했다.#12.익산참여연대는 유독 의원 재량사업비만 검증절차 없이 집행된다. 도의원기초의원들은 재량사업비를 검증할 수 있도록 즉각 공개하고, 공개 못한다면 재량사업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3.12월 14일, 소병홍 익산시의회 의장은 재량사업비를 공개할 제도적인 방안을 찾겠다고 밝혔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 의원 재량사업비가 투명하게 공개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14.주민은 자신들이 낸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 권리가 있다.그들이 지켜보고 있다.기획 신재용, 취재 김진만,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6.12.15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 탄핵, 전북의 선택은?

#표지.탄핵, 전북의 선택?#1.12월 9일, 운명의 날.#2.선출한 이도 국민, 끌어내릴 이도 국민.#.3대의제(代議制)의 대의(大義).전북 국회의원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4.김광수(전주갑/국민의당)박근혜 대통령은 이미 대통령의 자격을 상실했다. 국회는 탄핵을 통해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법적으로 정지시켜야 한다.(12월 5일, 기자회견에서)#5.정운천(전주을/새누리당)촛불민심은 즉각 퇴진을 원했다. 이제 국회에서 헌법절차에 따라 탄핵으로 가야 한다.(12월 5일, 기자회견에서)#6.정동영(전주병/국민의당)국회는 주권자의 대리인일 뿐, 12월 9일 탄핵을 완성하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12월 3일, 국회 본회의 긴급발언)#7.김관영(군산/국민의당)탄핵은 탄핵이고, 사임은 사임이다. 설사 오늘 사임의사를 표시하더라도 탄핵을 통해 대통령의 권한을 정지시켜야 한다.(12월 6일, 페이스북에서)#8.이춘석(익산갑/더불어민주당)국민을 바라보느냐, 청와대를 바라보느냐의 싸움이다. 관련자들은 청와대가 아닌 교도소에 있어야 맞다.(12월 5일, 기자간담회에서)#9.조배숙(익산을/국민의당)오는 9일, 나라를 망친 대통령에 대한 예의보다 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국민들에 대해 예의를 보여줘야(12월 5일, 국민의당 제57차 비상대책위원회의 모두발언)#10.유성엽(정읍고창/국민의당)본인의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국민을 시험하며 국회와 게임을 하려 하는 박근혜 대통령은 한시도 대통령의 자리에 앉아있어서는 안 된다.(12월 5일, 페이스북에서)#11.이용호(남원임실순창/국민의당)본인이 못 물러나겠다고 하니 탄핵밖에 길이 없다. 탄핵은 당연히 해야 한다. 국민은 국가적 혼란은 우리가 책임질 테니 정치권에서는 무조건 탄핵하라고 주문했다.(12월 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12.김종회(김제부안/국민의당)탄핵은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정농단과 헌법질서 파괴, 재단설립을 통한 기업들의 강제모금이 대통령과 연관돼 있다.(12월 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13.안호영(완주진안무주장수/더불어민주당)박근혜 대통령의 퇴진까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회복될 때까지 도민 여러분과 함께 촛불을 밝히겠다.(12월 4일, 페이스북에서)#14.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본회의 표결은 12월 9일 이뤄진다.기획 신재용, 취재 김세희,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6.12.08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국정교과서, 밖으로 나와!” 다시 불 붙은 ‘역사전쟁’

국정교과서, 밖으로 나와! 다시 불 붙은 역사전쟁#표지.국정교과서, 밖으로 나와! 다시 불 붙은 역사전쟁#1.2014년 1월, 전주 상산고.#2.우편향수준미달 논란을 빚은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채택한 것으로 알려지자, 재학생졸업생시민들의 항의가 이어졌습니다.#3.상산고는 결국 교학사 역사교과서 채택을 철회했습니다. 이 교과서의 채택률은 사실상 0%.#4.그러자 정부는 역사 교과서를 국정체제로 전환하는 것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2015년 11월 3일, 정부는 중고교 역사교과서 발행체제를 국정으로 확정 고시합니다.#5.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죠.전체 책을 다 보면 그런 기운이 온다.(2015년 10월 22일 여야 지도부와의 5자 회동에서)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2015년 11월 10일 국무회의에서)#6.그러자 전북교육청과 광주강원세종교육청은 보조교재로 맞불을 놓습니다.절대 왕조 시대에도 왕이 역사에 손을 대지 못했다. 권력자가 손을 대는 순간 그 역사가 오염왜곡되고 거짓이 들어가기 때문(김승환 전북교육감, 2015년 12월 1일 직원조회에서)#7.2016년 11월 28일,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 검토본 공개.국민 여러분들께서 직접 확인하시고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이준식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8.건국절 논리로 연결될 수 있는 대한민국 수립 표현,#9.8쪽(516까지 포함하면 9쪽)이나 되는 박정희 정권 관련 내용과,#10.청일전쟁 관련 내용과 합쳐서 3쪽에 불과한 동학농민혁명.#11.그리고 비판은 단 한 줄뿐인 새마을 운동 서술 등, 앞으로 수많은 논란이 예고됩니다.#12.역사교과서는 우리 학생들의 교육에 관련된 내용이다. 대통령이 누가 되든 어떤 정권이든 지지율이 어떻든 그런 것과는 무관하다.(김정배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13.의견 제출 기간은 12월 23일까지. 과연 국민은 이 교과서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6.12.01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 아무도 소외되지 않는 광장을

(동영상 카드입니다. 재생을 눌러주세요.)#표지.아무도 소외되지 않는 광장을#1.지난 19일, 전주 충경로 사거리(관통로 사거리).짧게라도 한마디 해야겠다는 대학생이 있습니다. 모셔보도록 하겠습니다.#2.(동영상)저는 대학교 3학년인 여성입니다. X년이라는 소리를 듣고 저는 올라올 수밖에 없었습니다.우리 모두 박근혜의 하야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성, 여성, 모두 다 계시죠. 그런데 저는 강남아줌마, X년이라는 말을 듣기가 거북합니다.우리는 성차별적, 여성혐오적인 발언을 하지 않고도 박근혜의 하야를 바라는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위에 올라와서 발언하시는 많은 분, 너무 용기 있으시고, 제게 큰 희망을 준다는 말을 하고 싶고요. 하지만 'X같은 마음'이라는 말로 박근혜를 욕하는 건 듣는 여성이 기분 나쁩니다. 부디 여성과 장애인, 청소년,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발언을 하지 말길 바랍니다.마지막으로, 박근혜는 하야하십시오.#3.거리의 도민들은 그의 발언에 환호로 답했습니다.#4.X년과 같은 성차별적 표현을 하면 가장 먼저 기분이 상하는 것은 거리에 나온 동료 시민입니다. 대상의 여성됨이 아니라 본질을 비판하도록 해요.#5.미친, 병원으로 가라 등의 표현 역시 사안과는 무관하게 장애인을 끌어들여 비하하는 표현입니다.#6.청소년 참가자에게 반말을 하거나 기특하다는 말을 하는 것도 자제해야 하겠지요.동등한 시민이지 아랫사람이 아니니까요.#7.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은 지난 18일 광장은 우리 모두의 것, 평등과 연대를 위한 집회시위 행동이라는 제목으로 가이드라인을 제작했습니다.또 앞서 민중총궐기가 열린 지난 12일에는 앞서 지적된 내용이 포함된 사과문을 페이스북 페이지에 게재했습니다.#8.억압과 불평등을 강요하는 세력들과 맞서는 우리는, 그리고 이 광장은 자유와 평등과 우애를 공유했으면 좋겠습니다.(지난 19일, 유기만 전북비상시국회의 상황실장)#9.더 많은더 다양한 동료 시민이 찾는 광장, 아무도 소외되지 않는 광장을 만들어 가요.그것이야말로 이기는 길 아닐까요?/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6.11.23 23:02

[글Pic] 이리역 폭발사고 39주년…'달콤 씁쓸' 11월 11일

11월 11일은 연인들,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빼빼로데이다. 좋아하는 지인들끼리 달콤한 초콜릿을 선물하며 우정과 사랑을 확인한다. 달달함, 얼마나 낭만적인가.그러나 아쉽게도 어떤 이들에게는 11월 11일이 더는 낭만의 빼빼로데이가 아니다.11월 11일은 농업인의 날이다. 농민들의 자부심을 고취하고, 농업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정부가 만든 법정기념일이다. 2006년부터는 이날에 가래떡 데이란 이름이 붙었다. 11월 11일이 가래떡 데이가 된 것은 쌀 수입과 쌀 소비 감소 등 영향으로 침체기에 빠진 쌀산업 보호 필요성이 갈수록 커진 탓이다. 가래떡 데이 단 하루만이라도 쌀로 만든 제품을 많이 소비해 달라는 농부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 안타깝고 우울한 날이다.11월 11일은 또 천지를 뒤흔든 이리역 폭발사고가 발생한 날이다. 이 사고 또한 성장우선주의 대한민국에 만연했던 안전불감증, 부정부패의 소산이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사회가 반성하고 나아가야 할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다.당시 참사를 직접 겪은 익산 시민들로서는 꿈에서도 떠올리기 싫을 만큼 충격적이었던 이리역 폭발사고 39주년을 맞아 당시 사고를 되짚어 본다.1977년 11월 11일 금요일 이리역(現 익산역)은 평온했다. 호남선과 전라선이 갈라서는 철도교통의 중심역으로 자리 잡은지라 여객열차와 화물열차가 전주역에 비해 훨씬 빈번했지만 역을 통과하는 열차들은 정해진 시간과 신호에 따라 목포로 가고, 서울로 갔다.한국-이란 축구경기이날 밤이다. 텔레비전에서는 월드컵 축구 한국과 이란 A매치가 생중계되고 있었다. 당시 한국축구는 이란에 크게 열세였다. 1974년 9월 테헤란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이란과 첫 대결을 벌인 한국축구는 2대 0으로 완패했다. 그 3년 뒤인 77년 이날, 아르헨티나 월드컵 최종 예선 경기에서 만난 한국과 이란의 경기는 온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13만여 명의 이리 시민들도 상당수가 텔레비전 앞에서 축구경기를 보고 있었다. 이날 테헤란 원정경기에서 한국은 이영무 선수가 2골을 넣었지만 역시 2골을 허용하고 말았다.삼남극장 하춘화 리사이틀똑같은 시각, 이리역 코앞에 있는 이리시 창인동 삼남극장에서는 700여 명의 관객이 모인 가운데 인기 가수 하춘화 리사이틀이 열리고 있었다. 코미디언 이주일 사회로 진행된 이날 쇼에서 하춘화는 히트곡을 10분가량 부른 뒤 분장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주일 씨도 휴식하며 넥타이를 고쳐매고 있었다.세상은 그렇게 평온했다.밤 9시 15분 꽈광 꽝!!!테헤란 축구경기장, 한국과 이란팀이 멍군장군하며 골을 주고받는 치열한 접전이었다. TV 앞에서 응원하던 시민들의 손에는 땀이 배었다. 3년 전 분패를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한국팀이 이란 골문을 향해 강슛을 날리고, TV 앞 시민들이 골인을 염원하며 환호성을 울리는 그 순간이었다.꽈광! 꽝! 꽝!...천지를 뒤흔드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천장과 벽이 무너지고 유리창이 깨져 파편이 튀었다. 평화롭게 축구경기를 시청하던 시민들은 안방에서, 가게에서, 사무실에서 아비규환에 빠졌다.가수 하춘화의 히트곡 열창으로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른 삼남극장 안.갑자기 꽈광하는 폭발음과 함께 2층 천장이 붕괴하면서 5명이 깔려 사망하고 100여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극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하춘화 씨도 벽돌 파편에 맞아 어깨 부상을 당했고, 함께 있던 이주일 씨도 벽돌에 머리를 크게 다쳤다. 이주일 씨는 느닷없는 재난 현장에서 하춘화를 등에 업고 극장 밖으로 대피했다. 훗날 하춘화 씨는 이주일 씨는 제 생명의 은인이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당시 이주일 씨는 무명이었지만, 이리역 폭발사고 이후 인기 코미디언으로 크게 성공했다.안전불감증1977년 11월 9일 인천에서 화약류를 잔뜩 싣도 광주로 향하던 한국화약(주)(이 회사는 훗날 '한화'가 된다. '한국화약'을 두 글자로 줄여보자)의 화약열차는 10일 오전 11시 31분 이리역에 도착했다. 곧이어 1605호 화물열차에 중계됐고, 이리역 구내 4번 입환대기선(入換待期線)에 섰다. 화약류 등 위험물을 적재한 화물열차는 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곧바로 통과시켜야 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리역 측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 이른바 '급행료'와 연관돼 있다는 진술이 후에 나왔다.한국화약 호송직원인 신무일 씨(당시 35세)는 화약 수송이 늦춰지자 역 앞에 있는 식당에서 술을 잔뜩 마신 뒤 화약열차 안에 촛불을 켠 다음 닭털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잤다. 발끝이 뜨거웠을까. 어느 순간 신무일은 잠을 깼다. 일어나보니 촛불이 넘어졌는지 침낭과 화약상자에 불이 붙은 것을 보았다. 깜짝 놀란 그는 화약열차 밖으로 뛰쳐나와 불이야를 외치며 힘껏 달아났다.화약 호송 담당자인 그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화약열차 안에는 무려 30톤에 달하는 화약류가 실려 있다. 다이너마이트 상자가 914개나 실려 있다. 무려 22톤이다. 초산암모니아 상자도 200개(5톤)나 되고, 초안(硝安) 폭약 상자 100개(2톤), 뇌관상자 36개(1톤) 등을 합하면 모두 1250상자 30톤가량의 화약류다. 이게 한꺼번에 폭발하면. 끔찍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화재를 진압하기는커녕 불이야를 외치고선 달아났다.참혹한 현장9시 15분, 어둠 속으로 도주하는 신무일 뒤에서 엄청난 폭음과 함께 수많은 파편이 튀어 날았고, 폭발 충격과 파편 등으로 현장 반경 8㎞가 쑥대밭이 되다시피 파괴됐다. 이리역에서 불과 700m 떨어진 창인동의 한 가옥에는 10톤이 넘는 기관차 몸통이 날아와 집을 박살 냈을 정도였다. 사고 후 모습을 드러낸 폭발 현장도 참혹했다. 깊이 10m, 직경 30m가 넘는 거대한 웅덩이가 생겼고, 화약열차와 함께 입환대기선에 서 있던 열차들은 폭발 충격으로 뒤집혔다. 철로는 잘리고 엿가락처럼 휘었고, 그 엿가락들이 곳곳으로 날아가 모든 것을 파괴해버렸다. 이는 1945년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600분의 1 정도 폭발력으로 추정됐다.폭발과 함께 발생한 정전으로 갑자기 암흑천지가 되자 놀란 시민들은 손전등과 양초 등을 동원해 부상자를 응급조치했다. 시내 곳곳에서 경보 사이렌이 울렸고, 사람들은 건물 밖으로 대피했다. 625전쟁이 다시 터졌나, 지진이 일어났나 싶어 시민들은 공포에 떨며 밤을 지새웠다.이날 폭발사고 후 전라북도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사망 59명, 중상 185명, 경상 1158명 등으로 총 1402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이리역 근무 역무원과 열차 기관사는 물론 일반 시민들의 피해가 컸다. 가옥은 전파 811동, 반파 780동, 소파 6042동 피해로 집계됐다. 공공시설물을 포함한 재산피해 총액이 61억 원으로 파악됐다. 집을 잃고 모현동 일대에 마련된 천막생활을 하며 겨울을 나야 했던 이재민도 1674세대 7873명에 달했다.신속한 복구 조치폭발사고 후 당시 황인성 전북도지사는 전투복장으로 현장을 찾아 상황 파악 등 수습에 나섰고, 사고발생 1시간여 만인 10시 30분께 내무부에 상황 보고한 것으로 알려진다. 박정희 대통령도 이튿날 오전 육군 헬리콥터를 타고 이리에 도착, 도지사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았다. 정부의 복구 지원은 신속했다. 일요일인 11월 13일 최규하 국무총리 주재로 관계장관 회의를 개최했고, 청와대도 11월 19일 회의를 열어 신속한 복구지원을 결정했다. 육군 공병단이 투입되는 등 민관군이 신속한 복구에 힘을 모았다.아이러니하게도, 이리시는 폭발사고로 처참하게 파괴됐기 때문에 복구사업을 통해 신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리역이 신축됐고, 중앙동 간선도로가 4차선으로 뚫렸다. 모현동에는 1180세대 규모의 주공아파트가 들어섰다. 이 아파트는 2010년 재건축됐다. 사고 1년여 만에 140억 원이 투입돼 이리시는 그나마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솜방망이 처벌신무일은 도주했다가 시민들에게 붙잡혀 경찰에 인계됐다. 그는 1978년 2월 24일 전주지법 군산지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화약열차를 역 구내에 대기시킨 철도 직원은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이리역 폭발사고는 부안 위도 서해훼리호 사고, 전남 진도 앞바다 세월호 사고와 다를 바 없는 인재였다. 화약류는 통과시키고 역 구내에 두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화약호송담당자가 만취상태에서 화약상자 위에 촛불을 켜둔 채 곯아떨어졌다. 실화 혐의 등으로 기소된 신무일은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냈음에도 불구, 징역 10년을 받았을 뿐이다.KTX 익산역으로 거듭나다이리역은 1912년 3월 6일, 대전~이리 간 호남선과 군산선 개통을 계기로 문을 열었다. 1929년 9월 준공된 역사는 이리역폭발사고로 무너졌고, 1978년 11월 10일 새 역사가 준공됐다.이리시와 익산군 통합으로 역명이 1995년 9월 1일부터 익산역으로 바뀌었다. 2008년 장항선 종착역이 군산역에서 익산역으로 바뀌면서 익산역은 충청 서부지역을 경유하는 상행선을 확보하게 됐다. 또 KTX 시대에 맞춰 진행된 신역사가 2015년 9월30일 준공됐다.2015년 4월 2일 고속열차(KTX) 호남선이 개통, 익산역은 초고속열차 시대를 맞았다. 익산역에서 출발한 KTX는 용산역까지 1시간6분만에 주파한다. 이어 오는 12월에는 수서발 고속열차(SRT)가 개통된다. 이에 따라 익산역은 용산발 23회, 수서발 20회 등 모두 43회의 호남선, 그리고 14회의 전라선 고속열차가 통과하는 중심역으로 우뚝 서게 됐다.국민의 고향역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이쁜이 꽃분이/ 모두 나와 반겨주겠지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익산역은 순창 출신의 작곡가 임종수 선생이 학창시절에 황등역과 익산역을 오가며 통학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지은 대중가요 고향역에 얽힌 사연으로도 유명해졌다. 익산역 측은 수년 전부터 플랫폼에 고향역 노래를 흘려보내며 국민 애창곡이 된 고향역의 본향임을 알리고 있다. 역 광장에는 고향역 노래비도 건립될 예정이다.

  • 기획
  • 김재호
  • 2016.11.11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 논에 웬 마시멜로? '곤포 사일리지'랍니다

논에 웬 마시멜로? 곤포 사일리지랍니다#표지.논에 웬 마시멜로가?곤포 사일리지랍니다#1.~마시멜로 이야기~#2.마시멜로는 전북지역의 대표적인 농산물입니다. 가을에 논에서 흔히 볼 수 있죠!#3.아, 저기 마시멜로 열매가 많이 열려 있네요! 껍질을 뜯으면 안에 조그만 마시멜로가 들어 있어요. 우리가 먹는 마시멜로는 바로 이것이랍니다.#4.는 농담!#5.저것의 이름은 곤포 사일리지입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남은 볏짚을 돌돌돌 말아 만들죠.(지름 1.2~1.5m, 무게 400~500㎏)#6.왠지 쫄깃해 보이는 저 하얀 표면은 자외선 차단 코팅을 한 비닐인데, 이 비닐은 나중에 수거합니다.#7.그런데 이걸 만들어서 어디에 쓰는 걸까요?#8.(김원호 국립축산과학원 연구관)마치 김치를 담그는 것과 비슷하게, 이렇게 만들면 발효가 일어나서 소가 먹고 소화하기 좋게 됩니다.#9.이런 조사료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전체 볏짚의 약 80%를 차지한다고 해요. 축산 농가는 사룟값을 줄일 수 있어서, 벼 농가는 이윤을 더 많이 낼 수 있어 선호한다고 합니다.#10.하지만 볏짚 대부분이 마시멜로가 돼 버리면 부작용도 생긴다고 해요.#11.(농촌진흥청 관계자)볏짚에는 유기물이 들어 있고, 벼에 필요한 성분은 다 볏짚에 들어 있거든요. 그래서 볏짚은 2~3년에 한 번 정도는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12.(농촌진흥청 관계자)물론 그렇다고 조사료를 안 만들 수는 없죠. 상생이 필요한 겁니다.#13.볏짚에 모인 대지의 기운. 이것이 마시멜로의 정체였습니다.오늘의 탐구생활 끝!/기획 신재용, 취재 김윤정,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6.11.09 23:02

[글Pic] 유신의 절명

37년 전 10월26일, 그러니까 1979년 10월26일 서울 궁정동 비밀연회장에서 코드 원, 대통령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권총 두 발을 맞고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뒤 유신독재로 영구집권 기반을 확실히 다진 독재자가 집권 18년 만에 가장 가까이에 둔 부하의 총탄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사건 후 국군수도통합병원에 실려 온 그의 시신을 확인한 군의관은 피범벅이 된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배꼽 아래의 흰 점을 보고서 사망자가 대통령인 것을 확인해야 했다. 대통령 피살 다음 날인 10월27일 새벽 4시, 나중에 허수아비 제10대 대통령이 된 최규하 국무총리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 뒤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는 1026사태부터 이듬해인 1980년 518까지를 일컫는 서울의 봄 비극, 그리고 1993년 2월 32년 군부통치의 마지막 실력자 노태우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총 13년에 걸쳐 56공 천하를 연 신군부독재시대가 막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1979년 10월 26일10월 26일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밀실에서 열린 만찬장에는 대통령 박정희, 비서실장 김계원, 경호실장 차지철, 중정부장 김재규가 참석했고, 2명의 여성 연예인이 동석했다. 만찬은 6시5분 쯤에 시작됐다.당시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를 주도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의 수사발표 등에 따르면, 박정희는 식사를 하면서 바로 열흘 전인 10월15일 부산대에서 촉발된 부마민중항쟁사태를 중앙정보부의 정보 부재 탓으로 돌려 힐책했다. 이에 동석한 경호실장 차지철도 나서 김재규를 과격한 어조로 공격했다. 흥분한 김재규는 밖으로 나가 권총을 갖고 만찬장 안으로 들어가 박정희와 차지철에게 두 발씩 쏘았다. 두 사람은 절명했다.대통령 박정희의 급사에 대한 반응은 크게 엇갈렸다. 무려 20년 가까이 박정희와 공화당의 선전선동에 눈이 가린 채 살았던 상당수 국민은 슬픔을 감추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한 부류는 헌정파괴자, 독재자가 측근의 총탄을 맞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하지만 신은 얄밉게도 민주주의와 정반대, 독재자들의 편에 섰다. 김재규는 권총을 쏜 후 맨 처음 정승화 육참총장을 궁정동 안가로 불렀다. 대통령이 쓰러졌음을 알리고 비상사태인 만큼 안보상황을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중앙정보부 쪽으로 가던 중 정승화가 비상이니 육군본부 벙커로 가자고 하는 바람에 국방부장관실로 갔다. 이로써 그는 일만 저질렀을 뿐 사후 주도권을 쥐는 데 실패했다.26일 자정 무렵, 김재규는 김계원과 함께 국방부 장관실에 있었다.병원에서 박정희의 시신이 확인되자 국무위원들이 비상국무회의를 준비했고, 국방부장관실에는 최규하 국무총리, 노재현 국방부장관, 김계원 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자리했다. 비상국무회의가 열리면 김재규는 대통령 사망과 관련한 설명을 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전개해 나갈 생각이었을 것이다.그런데 탈이 났다. 총격 현장에 있었던 비서실장 김계원이 김재규에게 비수를 겨눈 것이다. 김계원이 바로 옆방으로 노재현 국방장관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러 내 각하를 시해한 범인은 김재규 부장이라고 밀고한 것이다.노재현과 정승화는 곧바로 김재규 체포작전에 들어갔다. 노재현은 직속기관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불러 정승화 육참총장을 도와 대통령 시해범 김재규 체포를 도우라고 명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은 불과 47일 만에 정승화를 총격 체포하는 하극상을 저지른다.)김재규는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한 채 국방장관실 옆 회의실에 앉아 있다가 국방장관 보좌관 조익래로부터 육참총장님께서 뵙자고 한다는 전언을 듣고 따라나섰다가 헌병감 김진기 등에 의해 전격 체포됐다. 김재규는 부마사태의 참혹한 현장을 목도하고 박정희 정권에 회의를 품어 범행했다고 말하는 등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음을 주장했지만 전두환 일파가 조정하는 재판부에 의해 1980년 5월21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신군부는 불과 사흘만인 24일 광주민중항쟁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 그의 부관 박선호 등과 함께 사형을 집행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신속한 사형집행은 김재규가 신군부 독재에 부담이 될 것을 우려한 탓이다. 경북 구미 동향 선후배 사이인 박정희와 김재규는 신뢰가 깊었던 것 같다. 이후락, 김형욱 등 믿었던 중정부장들이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등 내심 불안감이 가중되자 76년 말 동향 후배 김재규를 중정부장에 임명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 이것은 불의는 결국 심판받고 만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1979년 12월 12일박정희는 516쿠데타 후 반혁명 사태 등을 통해 친위 측근 그룹을 한층 정예화하는 한편 전두환과 노태우 등 TK 중심의 육사 출신 젊은 장교들의 모임인 하나회를 육성했다.산 박정희는 전두환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생전의 박정희는 전두환이 자신의 뒤를 이어 군부독재를 이어갈 수 있는 결정적 사인을 하나 한다.전두환은 516쿠데타 때 박정희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육사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때부터 전두환은 중정과 보안사 등을 돌며 박정희의 신임을 받는 정치장교로 컸다. 그의 정치적 야심을 알아본 박정희가 쿠데타 이듬해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했을 때는 군에 남아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하나회를 결성해 박정희를 든든하게 했다.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박정희는 항상 군부 속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불안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뒤엎어버릴 세력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밤잠 이루기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쿠데타 직후인 1961년 김종필이 만든 중앙정보부 등 친위조직들이 샅샅이 감시하고 뒤지고 고문하고 설치긴 했지만 안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의 하나회가 있기에 그는 다소 안심할 수 있었고, 그 중심에 전두환이 있었다.전두환은 운명의 해인 1979년 2월 1사단장에서 보안사령관으로 무려 2단계를 뛰어넘는 승진을 한다. 당시 영남 군벌 대표 격인 노재현 국방장관이 진종채가 떠나는 보안사령관 자리에 전두환을 단수 추천, 박정희 사인을 받아낸 것이다. 이는 관례가 없는 파격이었다.전두환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기회는 비상사태시 범죄수사 등을 총괄하는 자리인 합동수사본부장 자리를 꿰차게 된 결정이었다. 박정희는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한 후 계엄령과 전시에 보안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도록 하는 대통령령에 사인했다. 이 결정은 직전까지 보류 상태였다. 1026사태 당시 계엄령하에서 합수부장을 맡게 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검찰총장과 치안본부장,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휘하며 거리낌 없이 야욕을 채울 수 있었다. 신이 있다면 분명 전두환 편이었고,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두 번째 불행이었다.박정희 사후 계엄령하에서 보안사령관으로서 합수부장이란 막강한 권한을 손에 거머쥔 전두환은 노태우 박희도 장세동 등 하나회 핵심을 주축으로 음모를 꾸몄다. 전두환은 경복궁에 위치한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단장 장세동 대령)에 반란군 본부를 차린 다음 거사일인 1979년 12월12일 저녁 식사에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본 헌병감(이들은 하나회가 아니었다)을 서울 연희동의 고급 요정에 초청, 감시망을 흐리게 한 뒤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참총장을 체포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 신군부에 압도당했고, 이날 밤 뒤늦게 반란군 대응에 나선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은 치밀하게 계획한 반란군에 응대조차 못 한 채 체포되고 말았다.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는 박정희의 그것을 대부분 답습했다. 내 편이 아니면 철저하게 응징했고, 일어설 수 없게 만들었다. 박정희는 자신을 두 번이나 구해준 은인 장도영을 배신했다. 김형욱 이후락 사례에서 보듯 측근이라도 배신할 것이 우려되면 잘라냈다. 전두환이 정승화 장태완 정병주 등을 총격 체포, 하나회 세상을 만든 것과 다를 바 없다. 두 독재자 공히 언론을 탄압,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 가렸다.1961년 5월 16일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은 군부 독재에 굴복하지 않았다. 회유당하지 않았다. 일제 36년의 치욕을 딛고 광복을 얻은 국민은 1948년 헌법에 기초한 민주국가의 이념, 자존심을 끝까지 지키고자 싸웠고, 전두환이 유신의 악령을 재현하려던 1987년 413 호헌조치 철폐 등 값진 승리를 이끌었다. 그 선봉에 젊은 학생이 있었고, 의기 넘치는 지식인층과 일반 시민이 있었다.1960년 3월15일 저질러진 이승만의 장기집권 야욕 315 부정선거는 국민을 분노케 했다. 남원 출신의 김주열 군(19세마산상고1년)이 마산지역 315부정선거 항의 데모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된 뒤 참혹한 주검으로 발견되면서 국민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고 위대한 419혁명으로 이어졌다.당시 이승만이 물러난 뒤 정권을 잡은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의 정권이 정치 경제 사회 등 전반의 혼란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잘못은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군부에서는 부정부패와 승진적체 등으로 하극상이 일어나는 등 혼란도 컸다.그렇다고 박정희 등 정치군인 집단이 단지 권력욕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헌정을 뒤집은 것은 명백한 반란이다. 일제 앞잡이 황군 장교였고, 1948년 여순반란 사건 당시 남로당 끄나풀이었던 박정희가 일으킨 쿠데타는 어떠한 명분도 정통성도 인정될 수 없는 범죄행위일 뿐이었다. 이에 동조한 세력이 육사 5기와 8기 출신의 김종필 김형욱 등이었고, 전두환이 만든 하나회였다.박정희와 김종필은 1960년부터 쿠데타를 모의했지만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가 1961년 5월15일 1군창설기념일 밤인 5월16일 0시를 기해 거사하기로 했다. 행사 후 국무총리는 서울로 귀환할 것이고, 야전군 지휘관들은 술을 마시고 잠들었을 시간을 틈탄 반란작전을 꾸몄다. 박치옥, 차지철 등이 이끄는 공수부대와 해병대, 경기도 일대의 야전군 등이 전격 작전에 동원돼 반도호텔에서 장면 총리를 체포하고 방송국 등을 장악, 정부를 전복했다. 어정쩡한 기회주의자였던 장도영은 박정희의 꾐에 빠졌다가 결국 토사구팽당했다.집권한 박정희는 공화당과 중앙정보부 등에 포진한 쿠데타 출신과 전두환 등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회의 군부 등 도움으로 장기집권 준비를 진행한다. 일제에서 벗어난 지 불과 15년 정도 지난 가난한 국민을 향해 경제개발계획을 내세우며 자신의 집권 당위성을 펼쳐나간다.그의 통치는 전적으로 군부에 의존됐다. 그는 독재권력이 위협받을 때 군과 중앙정보부 등을 동원, 국민을 짓눌렀다. 1961년 5월 군대를 동원해 정권을 찬탈한 그는 1964년 대학생과 종교인 등이 나서 한일외교 정상화를 반대하자 63계엄령으로 대중의 입을 틀어막았다. 1969년 3선개헌을 강압적으로 관철시킨 다음 1971년 4월27일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대학생들이 장기집권 반대, 대학교련철폐, 중앙정보부 해체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자 1971년 10월15일 위수령을 선포하고 시위 대학생들을 잡아들이는 한편 군부대를 대학 캠퍼스에 주둔시켰다. 또 1972년 10월17일 비상조치를 내리고 개헌을 단행하면서 국회에 군병력을 투입했다. 국회에 탱크를 진주시켜 유신헌법 제정을 강제한 것이다.그는 죽기 직전까지 군대의 총칼로 민중을 탄압했다. 부마민주항쟁(1979년 10월15~20일)에 공수부대를 투입, 무참히 진압한 것이다. 부마민주항쟁은 10월 15일 부산대 학생들이 민주선언문을 배포하고 시위를 벌이다 시내버스 등을 타고 부산시내로 진출하면서 촉발됐다. 부산은 물론 마산까지 확산됐고 시민들도 가세, 학생들과 함께 정치탄압 중단,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격렬히 시위했다. 이에 박정희는 비상계엄령과 위수령을 내리고 공수부대로 진압했다.1972년 10월 17일박정희의 18년 독재에서 압권은 1972년의 유신헌법을 강제한 것이다.1972년 10월 17일 독재자가 내린 비상조치 속에서 이뤄진 이 제7차 개정헌법(제4공화국 헌법)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를 목적으로 내세운 포장과 달리 대통령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보장하기 위한 치졸한 정치공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가 총탄의 비명에 간 뒤 그를 쏙 빼닮은 전두환이 역시 장기집권을 획책하며 만든 1980년 10월 22일의 개정 헌법(제5공화국 헌법)으로 사라진 악법이었다.전두환은 1212 군사 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을 통해 집권한 뒤 제5공화국 헌법을 만들었는데 1980년 10월27일 발효됐다. 박정희 유신헌법을 그대로 답습,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선출하고 그 임기를 7년으로 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전두환은 이 헌법을 근거 삼아 1988년 3월3일 취임한 뒤 1987년 4월13일 국민의 직접선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밝히며 장기집권 야욕을 숨기지 않았지만 결국 1987년 6월 국민항쟁에 굴복했다. 김영삼 정권시절 517 내란음모, 광주민중항쟁 발포 시민 학살 등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과 노태우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사면받고 풀려났다. 권력은 부패하게 마련이고 정의는 언제나 멀다. 권력욕에 휩싸인 일부 정치군인들에 의해 유린된 과거 32년 간의 역사를 뒤돌아볼 때 1026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어떤 이유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김재규가 18년 동안 민중을 짓누르며 독재권력을 휘둘러온 대통령 박정희를 시해, 군부독재의 틀 속에서 꼼짝 못하던 대한민국 사회에 변화의 물꼬를 텄다는 사실이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신군부가 똑같은 수법으로 정권을 장악해 군부독재정권을 출범시켰지만 박정희 시해사건은 국민 사이의 민주화 열기를 한층 더 고조시켰다. 광복 후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했다. 일본 제국주의를 거치면서 자유와 독재가 뭔가를 뼈저리게 알았다.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교육이 계속 이어지면서 지식인층이 두터워졌고, 경제기반도 탄탄히 할 수 있었다. 이런 속에서 국민들의 의식은 한층 성숙해졌다. 권력욕에 두 눈이 뒤집힌 박정희와 전두환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거스르고, 성숙해 가는 국민의식을 앝보았다. 북한을 통일의 대상으로 대하지 않고 집권 연장의 수단으로만 삼았다. 박정희가 1971년 미중간 핑퐁외교 등 탈냉전 데탕트 분위기를 역이용, 국지안보위기론을 내세운 것과 1986년 전두환의 하수인 장세동 안기부장이 나서 북한의 수공에 대비한 평화의 댐을 건설하자고 국민을 선동한 사건이 그것이다. 2016년 10월ing최근 박근혜 대통령은 이들의 유전자를 그대로 이어받은 듯한 행보 때문에 적잖은 비판을 사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과 로켓발사 등 군사적 위협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국민의 안위와 국토 수호를 위해 일하는 대통령으로서 자세는 군사적 대치 상황을 피하면서 평화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그렇지 않은 모습이다. 박정희가 74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내면서도 끊임없이 남북긴장을 최고조로 높이며 집권에 이용했던, 그런 부류의 대북정책을 선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또 박정희가 전두환 등 하나회 정치군인들을 권력 유지의 핵심으로 삼았던 것처럼 국정을 펴고 있지 않느냐는 의혹을 받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지난 25일 대통령 본인이 춘추관 기자회견장에 나서 국민 앞에 사과한 최순실 국정개입 의혹은 야당은 물론 여당의 분노를 하늘 끝까지 치솟게 했다.국민과 국가 앞에 정의롭지 못한 정권은 절대 오래 유지될 수 없다. 새누리당이 그동안의 청와대 비호 자세를 털고 나선 것은 그들의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의 집권 연장을 위협하는 작금의 상황 전개가 진실의 전모를 밝히는 데 큰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인가. 국민들은 빙산의 전모를 언제 다 볼 수 있을까.

  • 기획
  • 김재호
  • 2016.10.27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 유신의 풍경

유신의 풍경#표지.유신의 풍경#1.비상계엄 선포!1971년 대선에서 신민당 김대중 후보를 불과 100만 표 차이로 힘겹게 따돌리며 재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 집권 체제를 완성하기 위해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그리고 10월 27일, 제왕적 대통령제와 대통령 간선제 등의 내용을 담은 새 헌법을 공고한다.이것이 유신의 시작이었다.#2.정권은 헌법 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쳤다. 그러나 계엄으로 정치활동이 금지됐기 때문에 토론은 벌어질 수 없었다.1972년 11월 13일, 유신헌법 국민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지도계몽회.#3.물론 이런 관제 집회는 열렸다.1972년 11월 18일, 전주고에서 열린 유신지지대회.#4.1972년 11월 21일은 국민투표일이었다. 유권자가 들것에 실린 채로 투표를 하는 모습.그리고 새 헌법은 91.5%의 압도적인 찬성률로 통과됐다.#5.새 헌법에 따라 주권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행사되게 됐다.1972년 12월 8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벽보가 붙는 모습.#6.장발과 미니스커트가 금지된 때도 이때다.1973년 3월 9일, 경범죄처벌법의 개정을 알리는 전주 완산국민학교 학생들이 팔달로를 행진하고 있다. 멀리 전동성당의 첨탑이 보인다.#7.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교련. 당시는 고등학교에서 필수 과목으로 가르쳤다.1973년 5월 1일, 교련 시범공개 행사에서 전주여고 학생들이 시범을 보이고 있다. 본부석에 붙어 있는 표어를 보면 이 행사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8.남학생은 총을 들었다. 비록 실제 총알이 나가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1974년 6월 15일, 고등학교 교련 실기대회에서 총검술 시범을 보이는 학생들.#9.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이라는 사람의 총에 영부인 육영수 씨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최태민 목사는 이때 박근혜 현 대통령을 보살핀 사람으로, 이 인연은 최 목사의 딸 최순실(최서원)로 이어져 현재에 이른다.이튿날 전북도청에 마련된 빈소를 찾은 도민들.#10.1975년 2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 정권에 대한 재신임 투표를 실시했다. 물론 73% 찬성으로 유신 체제는 지속됐다.#11.삼엄한 긴급조치의 가운데서도 학생들의 저항은 계속됐다. 이들 중 더러는 구속되기도 했다.1975년 2월 15일,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던 학생들이 전주교도소에서 석방되는 모습.#12.그날 석방된 학생 중 이런 사람도 있었다. 전남대 이학영 학생이 어머니를 업고 기뻐하는 모습. 이 사람은 지금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다.#13.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것은 당시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을까?1977년 7월 20일, 유신이념 구현 초중고 교장 연수회.#14.박정희 하면 새마을.1977년 12월 8일, 지금은 없어진 전주 미원탑에 전국 새마을 지도자 대회 환영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15.그런 유신 7년. 심복의 권총 몇 발에 허무하게 끝나게 될지 누가 알았을까.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사망했다.다음날 박 대통령 사망 소식이 실린 신문을 보는 전북도민들./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6.10.26 23:02

[전북일보 만화뉴스] 기금운용본부와 무지갯빛 전북

1.2005년.하하하 우리 손을 잡고 넘어오세요!<토지공사><농촌진흥청><지적공사>#2.>>전북혁신도시<<#3.라는 것이 전북혁신도시의 미래입니다.오오[토공 등 공공기관 13개 전북 온다](2005년 6월 25일자)#표지.기금운용본부와 무지갯빛 전북#4.2009년.......(토공주공 합병, LH 출범)[토주공 통합법 통과전북혁신도시 '빨간불'](2009년 5월 1일자)#5.2011년.......(LH 경남 일괄이전)[LH 경남 일괄이전..전북엔 국민연금공단](2011년 5월 13일자)패키지가 더 효율적이지 않겠습니까?#6.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아, 걱정하지 마세요. 대신 연기금 400조 원을 굴리는 국민연금공단을 드리겠습니다.#7.그거 확실합니까?그럼요. 또 삼성도 새만금에 투자한다고 안 합니까, 하하.#8.2012년.......(새누리당, 기금운용본부 공사화 추진)[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전북유치 실낱희망 '가물'](2012년 10월 25일자)#9.그래서 전북 이전은 어떻게 되는 거죠?아, 예정대로 이전할 겁니다. 보세요, 현수막도 걸었잖아요.[기금운용본부 이전 놓고 또 공방](2012년 12월 12일자)#10.2013년.[기금본부 2016년까지 전북 이전](2013년 11월 28일)#11.이번엔 진짜겠죠?물론이죠!#12.2015년.......(공사화에 반대하던 최광 이사장 퇴임, 문형표 이사장 취임)[결국 물러난 최광전북 정치권 발끈](2015년 10월 28일자)#13.(facepalm)#14.2016년.그래서 기금본부 이전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전북이전은 이미 국민연금법 27조(사무소)의 규정에 따라 확정된 상태며, 올 연말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 전주사옥이 완공되면 본사가 차질 없이 이전할 계획입니다.(실제로 한 말)[국민연금공단 문형표 이사장 "올 연말 기금본부 전북 사옥 완공차질없이 본사 이전"](2016년 6월 13일자)#15.법으로 확정된 건데 쉽게 바뀔 리 없죠.휴, 괜히 걱정했네요!#16.2016년 10월.......[기금본부 전주이전 재검토 주장 파문](2016년 10월 11일자)#17.잠깐#18.~계속~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그림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6.10.19 23:02

[사진으로 비교해 보는 우리 동네] 전북대학교 69년

#표지.[사진으로 비교해 보는 우리 동네] 전북대학교 69년.#1.전라북도의 지역거점 국립대, 전북대가 생일을 맞았습니다.#2.1947년 10월 15일 도립 이리농과대학이 설립 인가를 받으면서 출발한 전북대.1951년 10월 6일, 전주 명륜대학군산대학과 통합, 전북대학교라는 이름을 얻습니다.#3.개교 69주년을 맞은 전북대, 전북일보의 사진 데이터베이스에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요?#4.1965년 2월 21일, 제14회 졸업식 모습입니다. 지금의 예술대학 미술관 앞이군요.#5.지금은 이런 모습입니다. 그다지 변하진 않았지요?#6.이듬해 2월 25일 열린 제15회 졸업식입니다. 지금의 기초교양교육원이네요.#7.지금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담쟁이 넝쿨이 건물을 뒤덮었네요.#8.같은 건물을 배경에 두고 1974년 1월 16일에는 이런 사진이 찍혔습니다.남성고 동문회에서 수험생들을 격려하는 모습입니다.#9.1979년으로 넘어갑니다. 그해 11월, 계엄령에 따른 휴교 조치가 풀릴 때의 당시 정문입니다.#10.지금은 정문 구조물의 모양도 조금 바뀌었고, 1979년엔 없던 건물도 들어서 있네요.#11.1985년, 당시 총학생회장 선거는 교내외로 비상한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것은 85년 4월 16일 촬영된 사진입니다.#12.같은 자리를 찾아보려 했는데, 광장이던 곳에 이제는 나무가 많이 들어서 있어서 건물이 보이지는 않네요.#13.격동의 현대사. 민주화를 이뤄냈지만, 군부의 위세는 여전했고 학생운동 또한 끊이지 않았습니다.1989년 11월 26일 89 민중대회가 열린 전북대 구정문.#14.같은 자리에서 열린 1990년 2월 26일, 전북대 구정문에서 벌어진 3당 합당 반대 시위입니다.#15.26년 뒤의 같은 자리입니다.#16.21세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16년 전만 해도 원서를 직접 제출하는 방식이었네요.2002년 12월 14일, 삼성문화회관에 마련된 원서 접수창구입니다.#17.같은 자리인데요.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다르죠?#18.내년이면 개교 70주년을 맞는 전북대. 개교 70주년 기념사업추진단을 조직해 미래 100년을 준비하겠다고 합니다.전라북도와 함께해 온 전북대, 그 새로운 미래를 기대해 봅니다.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6.10.14 23:02
기획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