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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⑥세기를 넘어선 미스터리, 사라진 사발통문(沙鉢通文)의 기록을 찾아서

세상에 난리가 났네 난리가 났다고 하면서 참 잘되었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까. 조선말기 조선의 상황이 바로 그러하였다. 민초들의 삶을 억누르는 지배자들의 수탈, 양반과 상놈을 갈랐던 신분차별, 하루하루 겨우 영위하는 삶의 끝자락, 사발통문이 희망의 불씨를 타오르게 했다. 2019년 봄 수개월에 걸쳐 방영된 모 방송국의 주말드라마 ‘녹두꽃’은 방영 초기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거의 모든 TV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런데 어느 한 장면을 보다가 필자는 숨을 멈춰버렸다. 전봉준이 붓을 들고 4대 결의와 20명의 서명자를 쓴 이후, 자신의 이름 한자와 한글로 마감한 통문 작성 장면이다.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그동안 역사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나? 원래 ‘사발통문(沙鉢通文)’은 조선후기 농민들이 봉기할 때, 주모자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가담자들이 원둘레에 각자 이름을 적어 돌린 것이다. 통문 발견으로 1894년 고부농민군이 처음부터 계획적이고 주도적으로 농민혁명을 일으킨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그런데 실제 사실을 기록한 것인가 하는 원본의 진실성을 놓고 논란을 빚었다. 발견과정부터 미스터리하다. 이 자료는 1968년 12월 전라북도 정읍군 고부면 신중리에 거주하는 송준섭(宋俊燮) 집 마루 밑에 묻혀있던 족보 속에서 나왔다고 한다. 1972년 외솔회에서 본격 검증에 나서, 김의환 교수가 그동안 보관해 오던 송후섭(宋後燮) 씨를 만났다. 그는 “아버지(송대화: 서명자의 한사람, 1919년 사망)이 세상을 떠났을 때 물려받은 서류궤짝에 있었다”고 했다. 그가 26살이던 1936년에야 도장이 찍혀 있는 봉투안에 문서를 확인하고 '여산송씨가보' 뒷표지에 간직해 오다가 송기태가 발표한 것이라고 했다. 1970년 동아일보 보도에 의하면, 신태인읍에 사는 송기태(당시 63세) 자택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송기태는 송두호의 증손으로 물려받아 가보로 간직해 왔던 것이라 전했다. 이렇게 전래 경위에 대해서는 다소 엇갈리는 부분이 있지만, 처음에는 통문이 1894년 당시 작성된 원본이라고 알려졌다. 1974년 6월에야 학술적 검토가 이루어졌다(<나라사랑> 15집, '녹두장군 전봉준 특집호'). 김용덕은 이 문서가 진본이라고 단정하지 못하고 판정을 보류했다. 결의사항 중 ‘경사로 직향할 사’를 용인할 수 없어서였다. 1980년대 중반 정창렬은 사발통문을 4부분으로 나누어, ‘계사 11월 일’에서 ‘각리리집강 좌하’까지(㉮부분, 서명자 20명), 이후 민심의 동향(㉯), 도인들의 선후책 토의(㉰), 결의이후 영도자를 뽑는다는 것(㉱)으로 구분하였다. ㉰의 경우 서명자 집단 내부만의 기밀사항으로 ㉮의 통문이 고부지역 전역에 유포되지 않았던 점을 의문시했다. 다만 ㉰의 결의를 수행한 세력을 금구취당과 연결시켜 거사계획이 전부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고부민란의 연구(하)' <한국사연구> 49, 1985). 한편 신용하는 1차 동학농민전쟁의 단계로서 3월 무장기포를 중시하면서 통문 내용을 재검토하였다. 그는 통문 본 내용이 잘려 나갔다는 전제하에 계사년의 등장(等狀), 이듬해 갑오년 1·2월의 고부민란, 3월의 제1차 농민전쟁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통문 ㉰와 ㉱부분을 하나로 통합하여 한 장의 종이위에 기록한 것이라 하였다. 그는 당시 통문의 원본(原本)이 아니라 어떤 분이 작성한 회고록(回顧錄)의 일부라고 추정하였다(<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1993). 두 연구자는 통문 내용 중 ㉮의 앞부분과 ㉰의 결의사항이 처음부터 동일한 차원에서 결의되었다고 가정하였다. 앞으로 사발통문이 진본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 더불어 통문 내용과 4가지 결의가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밝혀야 한다. 그런데 1900년과 1904년 2차례 일어났던 경기도 시흥 농민항쟁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이때에도 사발통문이 유포되었다. 당시 정부는 관련자들을 조사하면서 누가 수모자이고 추종자인지를 구별하고자 했다. 1904년 음력 8월 5일 시흥 한천교에서 민회를 소집하자는 통문을 작성한 혐의로 기소된 민용훈은 통문으로 민란을 촉발하지 않았고 단지 군중을 모으는 것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법부의 최종 판결은 통문으로 시흥군 42개 동의 집강과 동임들이 모였고, 이를 계기로 민란이 일어났으므로 관련 인사들 모두에게 중형이 내렸다. 이 사례는 통문의 잘려진 앞부분 내용이 4대 결의와 상관 없을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원래 고부군 각리 집강에게 모임을 갖자는 통지이며, 다만 서명자들의 사인이 둥그렇게 된 것은 민회 소집 주모자를 알 수 없도록 한 조치였을 뿐이었다. 실제 전봉준은 자신이 처음에는 주모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중민 수천명으로 추대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전봉준공초> 초초문록). 1893년 12월 전봉준은 60여명의 고부 농민과 함께 전주 감사 김문현에게 폐정을 시정해 달라고 등소(等訴)운동을 벌였다. 고부 농민들은 감사에게서 거절당해 쫓겨난 상황에서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결의를 다졌을 것이다. 따라서 1893년 11월 말 민회 개최를 위한 통문을 낸 이후 등소운동이 실패하자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가에 모여 4가지 방침을 새로 결의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렇게 보아야 고부 봉기 과정을 순차적이고 단계적인 변화상을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사발통문의 일부 내용이 조작됐다는 설도 있다. 주산마을 임두영 씨는 사발통문 내용이 같지만, 크기가 지금(42×30센티미터)보다 훨씬 컸으며(70×50센티미터), 서명자의 필체가 모두 달랐고, 재질도 기름에 젖은 창호지였다고 증언했다. 그는 1947년 초 동아일보 기자에게 넘겨진 뒤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고 덧붙였다(이이화, <발굴 동학농민전쟁-인물열전> 1994). 또 2001년에는 기존 통문이 아닌 새로운 이본(異本)이 발견되었다(김용섭, <한국근대농업사연구(Ⅲ)>). 사라진 통문의 앞 부분 내용이 첨부되어 있고, 서명자가 15명이며, 뒷부분 봉기 조직으로 전봉준 등을 선출한다는 것도 추가되어 있다(<동학농민혁명난과 전봉준장군실기> 1954). 새 자료의 저자는 송재섭(宋在燮, 1889~1955)으로 송두호(宋斗浩)의 손자이자 송주성(宋柱晟) 씨의 아들이었다. 그렇지만 이본에서는 당시 쓰지 않던 ‘만천하동포’, ‘동포형제’를 사용했고, 기존 통문 내용을 그대로 적으면서도 아래아(ᄋᆞ)를 생략하고 있다. 이로써 기존 사발통문을 일부 베끼고 앞뒤를 추가하여 새로 작성한 후대의 기록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발통문에 서명한 20명은 어떠한 삶을 지냈을까. 대부분 1894년 말부터 수개월 동안 전장에서 그리고 재판에서 희생되었고, 나머지는 일제하에서 숨어 지내며 불행한 삶을 살았다(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1994, 3판, 37~38쪽). 전주에서 사형(1894.12.~95.1.) – 황찬오, 황채오, 김응칠, 황홍모, 김도삼 나주에서 사형(1894.12~95.1.) – 손여옥, 송두호, 송주옥, 재판 후 서울서 사형(1895.3.) – 전봉준, 최경선(20명의 서명자 중 당시 사망자) 사발통문은 오늘날 한국의 거의 모든 역사교과서에 수록된 한 장 사진으로 수록되어 동학농민혁명 초기 민중 의식과 봉기의 계획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앞으로 통문에 사용된 종이 지질이나 먹의 형태에 대한 자연과학의 재질 분석도 필요하고, 국한문 혼용체로 쓰인 한글의 어미와 접속사 사용(예컨대 ‘ᄯᆞᄅᆞ서’)에 관한 근대국어학의 분석도 필요하다. 이제 지난 세기를 넘어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맞이했지만, 사발통문 문서는 아직도 여러 학문간 과학적 검증을 거치지 못한 채 ‘날 것’의 사료로 머물러 있다. 사발통문은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소장되어 있으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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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20 17:26

[세계 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⑤오횡묵 <고성부총쇄록> + 이헌영 <금번집략>

1894년 조선사회를 생생히 기록한 오횡묵의 <고성부총쇄록> △1900년대 말 사회상의 기록자 오횡묵 일기 때문에 최근 학계의 조명을 크게 받는 인물이 오횡묵(吳宖默 : 1834~1906)이다. 강원 경상 전라 충청 여러 도의 지방관으로 갖가지 일들을 꼼꼼히 기록한 일기가 주목된 것이다. 고성부사로 재임할 때 쓴 <고성부총쇄록(固城府叢瑣錄)>은 갑오년 기록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들어갔다. 총쇄록은 “소소하고 자잘한 사실들의 기록”이란 뜻이지만 그것이 지금에는 이만저만한 보물이 아니다. 해당 시∙군에선 번역본을 내고, 그 기록을 활용해 문화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전문 연구도 갈수록 성과가 대단하다. 강원도 <정선총쇄록>은 한 세기 전의 행로를 따라 아리랑길의 복원 사업을 하고 있다. 경상도 <함안총쇄록>은 향내 세력 연구는 물론 지방관 업무와 작성 문서를 검토한 연구가 나왔다. 초대 여수군수로서 기록한 <여수총쇄록>은 오늘날 지역문화의 설계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지도총쇄록>은 호적이나 전답 등 섬 생활뿐 아니라 배를 타고 한강과 강화를 거쳐 서해로 내려오는 노정이 관심사가 되었다. 최근 번역본이 나온 <익산총쇄록>은 1900년대 초의 모습을 전해주는 1차 사료가 된다. 지금은 경기도로 편입된 <평택총쇄록>은 행정의 근대 전환을 보여주는 사료가 된다. △지방관으로 성실했던 오횡묵 오횡묵이 지방관으로서 성실했던 모습은 총쇄록에서 거듭 나온다. 강원감사는 포상을 요청하는 장계를 올렸고, 경상감사는 향내 안정의 공을 들어 함안군수 연임을 요청하기도 했다. 여수와 지도군 등 신설한 군의 첫 군수 선정은 신뢰에서 비롯되었다. 정선 자인 함안의 백성들은 스스로 만인산(萬人傘)을 만들어 바치기도 했다. 총쇄록에는 수많은 시가 수록되었다. 오횡묵은 시 짓기를 즐겼다. 그는 중인들의 한시 모임인 칠송정시사(七松亭詩社)에 출입했다. 인왕산 아래 정자에 위항시인들이 모였고, 백운동에 집이 있는 그는 시사의 중심이었다. 친구 시인들은 임지로 찾아와 서울 소식을 전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총쇄록 기록에 그는 언제든 당당했다. 오횡묵의 배경은 국왕 고종과 민비였다. 무과 급제 후 궁궐 수문장을 지낸 그는 1884년 7월에 왕명을 직접 받고 공상소(工桑所)를 설치해서 감동(監董)이 되었다. 공상소는 궁궐에 필요한 각종 과일과 야채를 재배하던 기관으로 경무대 즉 현 청와대에서 창의문 일대까지 넓은 면적을 보유했다. 고종과 민비가 휴식을 위해 왕림할 때마다 감동 오횡묵이 직접 모셨다. 그러니 지존과 이런 인연으로 인해 여느 관리와는 격이 달랐다. 더구나 지방관 재임 중에도 공상소 임무를 계속 관계하였다. 재임 중 상경할 때도 공상소를 찾아온 민비를 만나고 있었다. 그런 위상을 가진 그는 임지의 향리나 백성에게 당당했고, 감사나 전운사에게도 과하게 저자세일 필요가 없었다. △사천 민란의 조사관 임무 오횡묵은 1893년 2월부터 1894년 9월까지 고성부사로 재임했다. 당시 향촌 실정에 정통했던 그는 면리 행정의 단속과 조세 수취상 폐단의 금지, 정부 시책의 전달 등 지방관 업무에 충실했다. 하지만 1894년 초 경상도 남부도 사정은 전라도와 다름없이 심각하였다. 정월에는 사천 난민이 읍내 민가 10여 채를 불사르고 향리를 징치하는 등 소란이 일어났다. 오횡묵은 조사관으로 파견되어 이를 수습하였다. 4월에는 김해 백성 수천 명이 봉기하여 부사를 쫓아내고 향리에게 분풀이를 해서 창원부사가 조사관으로 파견되었다. △총쇄록의 갑오년 기록 갑오년 동학 관련 기사는 4월 7일자부터 나온다. 감영이 경계하는 공문을 전재하였다. 11일에는 전라 감영의 토벌군이 비류를 잡아들이면 도망 무리가 경상도에 올 거라는 말이 있었다. 27일자에는 전라도 여러 지역 봉기 상황과 황토현전투의 결과를 실은 경상 병영의 정보를 기록했다. 삼도 수군을 지휘하는 통영에서도 연이어 고부 염탐기와 홍계훈의 경군 패배 소식, 전라 감영의 상황을 알리는 정보를 보내왔다. 그 내용을 그대로 전재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영남 출몰을 우려하는 경상감영이 여러 조처가 시급해 보인다. 그 핵심 내용은 오가작통의 강화책이었다. 총쇄록의 갑오년 사료 가치는 여러 전문을 실은 기록성에 있다. 서울 정부 소식, 경상감영 및 병영과 통영의 조치, 그리고 전라감영에서 보내온 공문이 상세하다. 청일 군대의 도성 안과 밖 대치, 일본군의 궁궐 침입와 청일전쟁의 개전도 순서대로 나오고, 교정청의 개혁방안이나 갑오개혁의 내용도 그대로 기록하였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의 가치 전라도의 폐정개혁 주장은 경상도 남부에 영향을 미쳐왔다. “동학 소동이 한번 나오자 민란이 이어서 일어나니” “온 도내를 둘러봐도 한 구석도 평안하고 깨끗한 지역이 없었다.”고 하였다. 고성도 다름없었다. 농민들이 “폐단을 개혁해서 백성을 편케 한다는 명분으로 깃발을 세우고” 북삼면 배둔리에 집결하였다. 부사 오횡묵은 이들을 피하지 않고 만나서 설득하며 28개조 개선책을 마련하였다. 누적된 폐단이 집단행동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이 사건 직후 동학도가 찾아왔다. 하동 사는 최학봉인데 6월 그믐부터 남원 전봉준 접소의 통문을 가지고 각 군현을 살피고 있다고 하였다. 남원 접소가 믿기지 않지만 전라도 상황을 이용해서 경상도 군현에서 활동하는 동학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신임 고성부사가 임명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와중인 9월에 임지를 떠나 서울로 올라가며 기록한 내용은 생생하다. 일본군의 병참부 전신소 설치와 대규모 군대가 북상하는 실상이 나온다. 그와 함께 경상도 남단에서 충청도를 지나 경기도에 이르기까지 동학도들이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는 실상을 전하고 있다. 갑오년 9월은 전국이 동학농민군 세상이었다는 증언이었다. /신영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연구소장 이헌영(李永)의 <금번집략(錦藩集略)> <금번집략(錦藩集略)>은 1894년 동학농민군 봉기 당시 충청도 관찰사 이헌영이 작성한 것으로 '일록(日錄)'∙'별계(別啓)'∙'별보(別報)'∙'별감(別甘)'∙'시구(詩句)'의 5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헌영(李永 : 1837~1907)은 1870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홍문관수찬이 되면서부터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개항 이후 그는 1881년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의 일원으로 일본으로 가서 세관 관계 기관들을 시찰하였고 이후 통리기무아문의 통상사당상이 되었다. 1883년에는 부산항감리를, 1886년에는 참의내무부사이자 일본주차대신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1890년 이후에는 이조참판∙협판교섭통상사무∙성균관대사성∙공조참판∙병조참판∙경상도관찰사∙한성부좌윤∙형조참판∙한성부판윤∙공조판서∙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94년 4월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치열하게 전개될 무렵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되었고 이후 1895년부터 1904년 사이 궁내부특진관∙내부대신∙평안남도 관찰사∙중추원1등의관∙의정부참정∙장례원경∙시종원경∙경상북도 관찰사∙경효전제조 등을 고위관료를 하였다. <금번집략> 중 '일록(日錄)'∙'별계(別啓)'∙'별감(別甘)'은 청일전쟁 초기 충청도 지역의 전투상황과 동학농민군의 제1차 봉기에 대한 정부와 지방관의 대응에 관한 것이다. 이중 '일록(日錄)'은 1894년 4월 25일 이헌영이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날부터 신임 감사 박제순(朴齊純)으로 교체되는 8월 29일까지 쓴 일기 기록이다.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출동한 아산 주둔 청국군의 동향과 인접한 여러 읍에서 허다한 접대비용 지출 등을 수록하였다. 6월의 기록은 청국 병사의 접대와 청국군 동향, 직산과 성환 전투에서 패한 청국군이 연기 지역으로 떠나는 상황을 적고 있다. 7월과 8월은 이인역을 시작으로 서천∙청양∙한산∙연기∙공주 지역 동학농민군의 제1차 봉기 동향과 이에 대한 지역의 대응책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이 지역 농민군의 제2차 봉기와 관군∙유회군∙일본군의 진압에 대해서는 홍주 영장 홍건(洪健)의 <홍양기사(洪陽紀事)>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별계(別啓)'는 같은 해 6월 25일부터 8월 5일까지의 기록으로 청국군∙일본군∙동학농민군의 상황이 섞여 있다. 풍도 해전과 성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여 내포 일대로 흩어진 청국 병사들이 들어와 마을을 약탈하고 놀란 주민들이 흩어지는 등 막심한 피해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이 중 특히 서산∙해미∙홍주∙덕산∙예산 등지의 약탈이 가장 심하였다고 한다. 본진이 있던 아산에서 청국군이 물러나고 일본군이 백석포를 거쳐 들어오게 되는데, 이곳에서 일본군은 객사와 산비탈 등에 주둔하는 한편 민가와 관청 건물에 들어가 남아있는 전곡과 집기 등을 빼앗고 사직단과 관청의 장부를 불태워지는 현감의 상황 보고를 수록하고 있다. 이후 매일 1,000~1,200명의 일본 병사들이 충주를 지나갔고 그들의 요구대로 수천 명의 인부를 마련해주었다 한다. 또한 임천과 공주∙청양∙보은∙서천∙한산∙연산 등지의 동학농민군 활동과 관련한 보고서를 수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총칼을 들고 말을 탄 ‘동학배’가 작청에 난입하여 협박하고 수백의 무리를 이루어 금전과 재물을 약탈하거나 수성군의 무기를 빼앗는다는 것이다. 특히 한산에 도착한 무리 57명은 전라도 부안의 동학인으로 재물과 무기∙마필 등을 빼앗는 등 폐단이 컸다고 한다. '별감(別甘)'은 이헌영이 충청도 각 지역 지방관리와 유회소(儒會所), 민보군 개인 등에 보낸 전령과 효유문을 모은 것이다. 이인민회소(利仁民會所)에 보낸 전령에서는 경솔하게 무리를 모으면 나라는 더욱 위험하게 되므로 본업에 물러가 종사하고 조정과 방백의 명령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공주∙홍산∙은진의 유회소 및 진천 민회소, 부여 유생 천기일(千基一), 영동 집강 손인택(孫仁澤) 등에게도 유사한 전령을 내렸다. 반면 관내에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의 시행을 지시하였다. 내용은 각각 해당 동내에서 위력이 있고 근실한 사람을 골라 동수(洞首)로 정하고, 사람마다 이름을 적어서 오가작통하여 1통마다 통수(統首)를 두고, 주민을 조사하고 타일러서 밤낮으로 살피고 경계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상한 자는 적발하고 단속을 배가하여 방법을 마련하고 따로 법률을 만들어 실효를 거둘 것을 주문하였다. 이헌영은 평양으로 퇴각 시 천안에 맡겨둔 직예제독 예지차오(葉志超)의 군자금도 보관 후 돌려주게 했는데, 원래의 수량과 일일이 대조하여 살피고 착실하게 맡아두었다가 나중에 찾아갈 때를 기다리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공주∙전의∙목천∙온양의 지방관에게는 청국군 군수물자 운반을 위한 우마를 각각 나누어 정하도록 지시하면서 명령을 어길 시에는 군율로 처리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연기∙청주∙청안∙음성∙충주 등 각 지역에는 읍의 경계에서 기다리고 각별히 호행토록 하였다. 직산현감에게는 성환 전투에서 전사한 청국군과 일본군 모두를 예장(禮葬)하라고 당부하면서 각기 무덤 옆에 단을 설치하고 표를 세워 살필 수 있는 근거로 삼고 그 전말을 자세히 보고토록 지시했다. <금번집략>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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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13 15:11

[세계 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④ 이용규 <약사> +<김약제일기>

어느 공주 유생이 남긴 동학농민군 기록과 한 해의 세평 – 이용규의 <약사>를 읽는다 어느 공주 유생은 갑오년 3월 15일“이날 대교(大橋)에서 향약(鄕約)을 행하였다”고 하였다. 모임은 3월 10일부터 준비되었는데, 아마 공주지역 유생들이 동학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다. 14일 동학당 수백 명이 대교에서 취회를 했지만, 바로 충돌이 일어나지 않고, 15일 비가 오는 가운데 유회를 치뤘다. 다음날 동도 700여 명은 이를 파괴하고 스스로 해산하였다. 이렇게 기록한 이는 충청도 공주 장전리에 살고 있던 이용규(李容珪)였다. 그는 지방에만 은거한 유생은 아니다. 그가 39살 때인 1888년 6월 광무국 주사로 활동하였고, 한때 서울 안동(安洞)에서도 살았다. 그는 1892년까지 광무국 주사, 기기국 위원을 지냈으므로 서울과 지방의 소식을 함께 접할 수 있었다. 갑오 2월 15일 일기에서 의정부 초기를 인용하여 고부봉기의 사실을 전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이전부터 동학당의 취회에 주목하고 있었다. 계사년 말미 세평(歲評)에서는“이 해에는 나라가 평안하였더니 계춘(季春)에 동학도 취당이 보은 땅에서 있었다. 7만여 인이 소요를 일으켰다. (……) 동학당은 본래 여항의 훈련되지 않는 병사였으므로 이내 해산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민요(民擾)가 지방관의 가혹한 수탈에서 일어났다고 보았지만, 민중들의 봉기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학농민군을 시종일관 ‘동비(東匪)’라고 지칭했다. 다만 그는 농민봉기에 대처하는 정부 대응을 중시하고 있었다. 4월 28일 신임 전라감사 김학진의 부임을 기록한 데 이어, 5월 8일 “전주감영을 점거한 비적들이 귀화를 칭하고 나가서 태인 땅으로 향해 갔다고”하여 동도가 쉽사리 해산했다는 점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가 동도와 마주하기 시작한 것은 7월 6일 이후였다. 그는 8일 엽전 400냥을 강제로 빼앗겼으며, 24일 동비의 대교 주둔한 것, 25일 쌀 5섬을 요구해서 1섬을 줄 수밖에 없었던 일, 8월 6일·7일에는 김영국(金榮國) 포의 돈 강탈 등 피해를 빠짐없이 기록해 두었다. 7월 29일 공주 정안면 궁원(弓院)에 대규모 농민군이 모인 기록에서는 임기준(任基準) 휘하의 동학농민군과 공주 감영과의 대치 상황을 알 수 있다. 9월 중순 이후에는 가족들을 금산 땅으로 피신시켰다. 대전 등지에서 동비가 소·짐·돈·양식을 빼앗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10월 23일 경리청 부대와 동학군의 대치국면에 대해,“오공동 서쪽봉우리에 올라 효포 등지를 멀리서 보니 관군과 전주의 동비들이 진을 치고 대치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하였듯이 당시 상황을 실감있게 전하였다. 저자는 동학농민군 활동에 동조하던 감사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전라도의 경우, “전봉준이 홍계훈에게 귀화한다고 속이고 있었고, 홍계훈 역시 동학도의 수가 많음을 보고 감히 손을 쓰지 못했다. 당시 순변사 이원회가 내려오자 홍계훈도 자신이 공로를 차지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갑자기 전봉준이 귀화하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하였다. 또“전라감영의 관문(關文)과 감결(甘結)에 반드시 전봉준의 도장을 찍은 연후에야 여러 읍으로하여금 거행하게 하였다”고 전라감사 김학진의 행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호서 동학군이 감사 조병호와 은밀히 부합하여 ‘감사는 우리 편의 사람이니, 누가 감히 우리를 엿보겠는가’라고 행동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역으로 전라 충청 일대에서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들이 주도하는 집강소 개혁정치의 실상을 전해주고 있다. 그는 갑오년 세평에서 농사가 흉년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가을 추수 때 동학당 봉기를 마련하는 비용으로 민생의 곤궁함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고 하였다. 이러한 언급에서 조선국가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동학농민군의 노력에는 동조하지 않으면서 민생 곤궁만 걱정하는 유교지식인의 엇갈린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 자료는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왕현종 연세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김약제일기> <김약제일기(金若濟日記)>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으로 재직하였던 청우(淸愚) 김약제(金若濟, 1856~1910)가 기록한 일기체의 글이다. 1885년 진사시에 입격하고, 이듬해인 1886년 문과에 합격하여 관계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1892년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김약제일기>는 바로 이때부터 시작한다. <김약제 일기>는 모두 4권이다. 1권에서는 고금도에서의 유배생활을 기록하였다. 2권에서는 관직 복귀 이후의 일들을 기록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는 1894년 2월까지 수록되어 있다. 3권은 1894년 2월부터 1895년 10월까지의 일기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견문 등이 담겨 있다. 4권은 대한제국 초기까지의 인식을 알 수 있는 자료다. 동학농민군에 대한 기록은 1894년 4월 6일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이를 자세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동학이류(東學異類)가 3월 봄부터 다시 일어나서 지난번보다 심해졌다. 봄에 금산읍(錦山邑)에서 접전을 하여 서로 간에 죽은 자가 제법 많았다. 전라도 고부(古阜)에서는 민란이 크게 일어나서 그 읍 수령인 조병갑(趙秉甲)이 한 없는 곤경을 겪고 달아나 살았다. 여기서 동학이류(東學異類)란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북접 동학교단과 다른 가르침을 추종하는 변혁지향적인 남접 세력을 일컫는다. 일본 지바대학의 조경달 교수는 이에 착안하여 '이단의 민중반란'이라는 연구서를 낸 바 있다. 다들 알다시피 고부민란이 일어나 군수 조병갑이 쫓겨난 사실을 수록하였다. 더욱 특기할 것은 1894년 1월의 고부민란 이후에 일어났지만 3월 20일 무장기포에 앞선 3월 8일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금산기포를 수록한 것이다. 금산은 남접 세력의 중심인물인 전봉준 등을 지도한 서장옥의 근거지였다. 이 정도 기술만으로도 동학농민혁명 초기 국면 서술에서 많은 논쟁점을 던져주고 있다. 김약제는 성균관 사성을 지내고 있던 관인(官人)이었던 만큼 동학농민군에 대해서는 지극히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1차 봉기 이후인 7월 25일의 일기를 보자. 동학의 소요가 극심해져 내포(內浦) 전체에서 동학에 들어가지 않는 자가 거의 드물었다. 인심이 흉흉해져 가장 먼저 봉변과 봉욕을 당한 자는 양반의 명색을 지닌 사람이었다. …… 동학교도는 떼를 짓고 무리를 이루어서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남의 무덤을 파고 남의 집을 허물었으며 결박하여 구타하였는데, 입도하지 않은 양반으로 당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이런 때에 조정의 명령이 갑자기 내려와서 피색장(皮色匠)이 갓을 쓰고 칠반천인(七般賤人)이 모두 면천(免賤)을 하여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없게 되었다. 양반 관인이었던 김약제의 입장에서 동학농민군의 위와 같은 활동은 흉악하게 보였겠지만 실제로는 양반을 정점으로 한 신분제 철폐 운동이 일어나는 과정의 일환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침 갑오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던 개화파 정부도 이에 호응하여 칠반천인을 면천하여 신분제 철폐를 법제적으로 마련하고 있었다. 근대 초기에 일어나는 신분제 붕괴 및 국민의 창출 과정이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을 통하여 동시에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바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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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06 15:33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 ③<취어> <석남역사>

<취어(聚語)> △보은 장내리 동학집회 1893년 봄에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큰일이 벌어졌다. 동학도 수만 명이 충청도 보은의 장내리에 모여 시위를 벌인다는 소식이 전국에 전해졌다. 인근뿐 아니라 각지의 양반들이 놀라면서 사태 진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고종과 대신들이 모여서 숙의한 끝에 보은에 보낸 도어사 어윤중을 다시 선무사로 임명하여 해산시키는 임무를 맡겼다. 이때 고종은 청나라 군사를 빌려서 진압하자는 말까지 꺼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처럼 청나라 군사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보은군수와 충청감사가 올려보낸 보고문은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동학도들은 낮에 동네 뒤의 냇가에서 진을 치고 있었고 밤에는 본동 민가와 부근 동네에서 유숙하였는데 날마다 오는 사람들이 연속해서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삼가천의 냇돌을 가져와서 돌성을 쌓았고, 주변 야산 봉우리에 깃발을 꽂고 수십 명씩 올라가 있었다. △ <취어>의 사료 가치 보은 관아에서는 이를 제어할 수 없었다. 다만 정탐하는 관리를 보내서 시시각각 동학도들의 동정을 탐지하여 보고할 뿐이었다. 그 내용이 <취어>에 수록되어 있다. 동학도들이 장내리에 집결하기 시작한 날에서 해산한 날까지, 즉 1893년 3월 11일의 탐지 기록부터 3월 29일의 탐지 기록까지 정탐한 보고문을 모은 <취어>는 유일한 관련 기록으로 가치가 있다. <취어(聚語)>라는 이름은 자료를 모아놓았다는 의미이다. 처음부터 계획하여 모아서 편집한 것이 아니라 손에 들어온 자료를 누군가 정서한 것이다. 상소문과 보고문 그리고 전보문으로 구성된 것을 보면 선무사 어윤중이 묶은 것이 아닌가 한다. 주로 시국에 관한 우려가 담긴 내용을 모은 것으로 1893년과 1894년 그리고 1896년에 작성된 자료들이다. 그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893년의 권봉희상소와 보은 장내리집회, 보은옥사와 청풍민요 조사 보고, 그리고 1894년의 동학농민군의 1차봉기, 1896년의 상소문이다. 1894년 기록은 모두 8편으로 동학농민군의 1차봉기 때 기록이다. 여기서 흥미 있는 자료가 <무장동학배포고문(茂長東學輩布告文)>이다. 다음에 있는 자료가 4월 11일자 전라감영 전보인 것을 보면 당시 이 <무장포고문>이 나온 즉시 수록한 것을 알게 된다. <취어>의 중심이 되는 것은 1893년 자료로 보은 장내리집회와 관련한 일련의 보고서이다. 분량도 가장 많아서 전체의 30%가 된다. 이 기록은 다른 자료에서 볼 수 없는 유일본으로 높은 사료가치는 여기서 나온다. △보은집회를 경계한 왕조정부와 청국 · 일본 당시 동학도들은 기치는 ‘보국안민’과 ‘척왜양창의’였다. 부패하고 무능한 관리들에게 경고하는 한편 일본과 서양 열강의 침범을 우려하였다. 서양 공사관은 반외세 움직임에 놀라서 보은집회의 동정을 주시하였다. 서울에서 무도한 일을 멈추지 않던 청국의 위안스카이는 청국군을 보내면 일거에 제압할 거라고 큰소리를 쳤다. 일본공사관은 갑신정변 때 물러선 후 조선을 도모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동학도들은 척왜양을 주장했지만 정부에 요구한 핵심 사항이 민씨정권 축출이었다. 척족 민씨들이 온갖 부정한 짓을 하면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잘못을 지적하며 정권에서 물러날 것을 주장한 것이었다. <취어>는 전국에서 집결한 동학도들의 기상과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려는 시대정신을 전하고 있다. /신영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연구소장 <석남역사(石南歷事)> <석남역사(石南歷事)>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전후하여 정읍(당시 고부) 이평면 장내리 석지마을에 거주했던 박문규(朴文圭, 1879~1954, 號 石南)가 자신의 개인사를 73세(1951년)에 회고록 형식으로 정리하여 자손에게 남긴 문집이다. 손자인 박남순(朴南淳, 1938생)이 보관해 오다가 2016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기탁하였고,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포함되었다. <석남역사>는 다섯 단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셋째 단원인 '박씨정기역사'에 자신의 생애 및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 이전에 이 지역에서 서당훈장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 또 정확히 어디서 서당을 열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석남역사>의 다음 기록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해 두해 지나가서 8살이 되어 3월 3일 좋은날에 '천자문'을 등고 고개(잔등) 넘어 조솔리로 입학하러 갔다. 선생님 앞에서 인사했는데, 선생님은 고모댁의 웃집으로 동학대장 전녹두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천자문의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을 가르쳐주셨다. 서당 아이들 서너 동무끼리 재미를 붙이며 배워갔다. 선생님의 늙은 아버님이 대신 서서 감독하셨으며 ……“ 이 기록에 의하면 갑오년에 박문규가 16세였다고 하였으므로 동학농민혁명 발발 8년 전인 1886년 이전부터 전봉준은 이평면 조소리에서 서당을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당의 규모는 서당 아이들 서너명이 배웠다는 것으로 보아 크지 않았을 것이며, 전봉준의 부친인 전창혁이 서당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1886년 이전부터 운영되어 오던 서당이 1889년 기축년에 없어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무자(1888)년 대흉년을 만나……40여 호 마을의 대부분 떠나가고 2~3가구만 붙어 있는데……”라는 내용으로 보아 1888년~1889년 있었던 대흉년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석남역사<는 특히 고부농민봉기 발발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1월 8일 말목장날 봉기를 준비한 ‘통문(通文)’이 말목장터 주변에서 돌았다는 기록이 특별히 주목되며, 봉기의 사전준비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동네별로 징과 나팔 등 농악이 집결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이 확인된다. <석남역사>에는 황토현 전투와 전투 직후 고부지역의 상황도 알 수 있다. “초엿새날 새벽이 되자 총소리가 콩 볶듯이 요란하여 나는 아버님과 마을 앞 벌판으로 피난하였다.”의 내용에서 황토현 전투가 4월 6일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농민군에 가담하지 않은 일반 고부민들은 전투상황에 대하여 두려워하며 동네 앞 갈대밭으로 피난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초 6일 새벽부터 날이 새면서 소식을 들으니 전주 병정들이 패했다고 하였다. 만약 병정들이 이겼다면 고부는 도륙되었을 것이다. 천운이 망극하여 병정들은 검사봉에 진을 쳤다가 패진했다 한다.”라고 하여 농민군에 참가하지 않은 채 숨어있던 일반 고부민들도 이 황토현 전투의 승패가 고부군민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염려하면서 농민군의 승리를 고대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황토현 전투가 끝난 후 상황을 살펴보면 “그 후로 동도가 크게 일어나서 면면촌촌에서 전도가 바쁘고 입도인이 발광하였다. 그들은 술과 안주를 먹고 장을 보았다. 거옥한 치성으로 마을 안에 모여앉아 13자 주문을 외기에 정신 없었다.”의 기록에서 보듯이 농민군의 승리 이후 각 동네에서 동학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석남역사>는 당시 농민군에 적대적이었던 관군이나 유림측의 기록이 아닌, 그러면서도 동학농민혁명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겪은 민간인이 남긴 기록이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은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더구나 <석남역사>의 저자인 박문규가 전봉준의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운 전봉준에게 직접 배운 제자였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석남역사>가 비록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과 장소 및 일자의 정확성이 약할 수밖에 없는 후대의 회고기이지만 다른 자료에서 보기 어려운 생생한 표현들을 볼 수가 있다. 이는 아마도 저자인 박문규 스스로 고부농민봉기를 직접 눈으로 보고 겪었을 뿐 아니라 전봉준에게 교육을 받은 바 있는 자신의 특별한 경험에 기반한 글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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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30 16:38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념물'] ②동학농민군 유광화 편지

번거로운 인사말은 접어두고 동생 광팔 보시게 (際煩舍弟光八卽見) 나라가 환난에 처하면 백성도 근심해야 한다네 (國之患難民之所患) 내가 집을 나와 수년을 떠돌아다니며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으니 (余出家逗遛於數年不顧家事)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네 (固然不似子道也) 광팔이 자네가 형 대신 집안을 돌보고 있으니 다행이라 하겠네 (汝光八兄代任齊家爲之幸矣) 우리가 왜군과 함께 오랫동안 싸우는 것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함이라네 (與之倭軍屢日戰之所以報恩之冡也) 그러나 형편이 극히 어려워 (然而事勢極難故)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 삼는 고초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네 (天衾地席之苦楚則不可狀也) 전에 보내 준 얼마간의 재물은 유용하게 썼다네 (囊者遣財多少要需之) 사정이 어려워져 또 한 번 돈과 비단을 청하니 살펴 주길 바라네 (近況極甚於前故更請錢帛此便通察付送之) 또한 매우 급한 일이라네 (燋眉之急也) 죽고 사는 것은 나라의 운명과 함께하는 것일세 (死生縣命國運) 뒷일은 자네에게 부탁하겠네 (後事所託於昆弟) 예를 갖추지도 못했네 (摠摠不備禮) 갑오년 늦가을 형 광화 (甲午 晩秋 兄 光華) 이 편지는 1894년 전라도 나주에서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한 접주 급의 지식인 유광화(劉光華)가 고향 집에 있는 동생 광팔(光八)에게 보낸 한문 편지이다. 유광화는 1858년 4월 15일 나주 다도에서 출생한 인물로, 유몽렬과 김해김씨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해 부모를 봉양하는데 온힘을 다했으며, 학문에도 정진해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고 알려졌으며 성격도 올곧아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광화는 1894년 37세의 나이에 다섯 살 배기 아들과 갓 태어난 아들을 둔 아버지였음에도 동학농민혁명에 직접 참여하였다. 그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과정에서 동학농민군 주력이 공주를 거쳐 서울로 북상할 때 여기에 참여하지 않고, 손화중․최경선의 동학농민군에 합류하였다. 유광화는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의 군수물자를 마련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1894년 여름부터 동학농민군과 나주 수성군 사이에 벌어진 나주 공방전이 광주에 근거지를 둔 농민군 지도자 손화중, 최경선의 지휘를 받아 진행되었다. 당시 유광화는 최경선 휘하의 광주 포에 소속되어 있었다. 최경선 부대에서 활약하였던 유광화는 9월 2차 봉기 때 전봉준과 함께 공주로 북상하지 않고 손화중․최경선 등과 협력하여 일본군의 해상상륙에 대비하였다. 공주로 북상하였던 전봉준의 주력이 패전하여 장성 갈재에서 해산하고 은신하게 되자, 광주의 손화중․최경선 부대도 1894년 12월 1일에 군을 해산하고 철수하였다. 이때 유광화도 최경선과 함께 남평을 점령하고 화순으로 이동하였으나, 12월 10일 화순 도곡에서 관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유광화가 동생 광팔에게 보낸 이 편지는 전투가 진행되던 1894년 10∼11월경(늦가을)에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급한 전쟁의 상황에서 동생에게 보낸 유광화 편지는 비록 짧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으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앞장서서 일어났던 농민군의 군자금 모금 상황 등이 잘 반영되어 있다. 또한 편지에서 ‘나라를 위해 자신이 가사를 돌보지 않고 몸을 바친다.’는 뜻을 거듭 드러내고 있어, 당시 농민군 지도자들이 어떠한 의식을 갖고 혁명에 참여하였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유광화 편지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동학농민군의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로, 한문으로 작성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광화는 유교적 또는 성리학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이었다. 유광화와 같이 농민들이 주를 이루었던 동학농민군에도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참여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통에서 쓰인 짧은 편지이지만, 자료에 드러난 내용을 통해 당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농민군들의 실제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편지에서 유광화가 혁명에 직접 참여하며 집에 있는 동생에게 활동 자금을 보내달라고 하여 당시 농민군들은 모자라는 활동 자금을 개인적으로 조달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전쟁 중에라도 부호를 약탈하거나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농민군의 합리적인 방편이었을 것이다. 전에 보내 준 얼마간의 재물은 유용하게 썼다네.’의 표현을 통해 유광화는 이전에도 동생에게 재물을 조달받은 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학농민군은 최대한 자신들이 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자발적으로 제공하도록 하는 등 매우 합리적인 방법을 강구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편지 내용 중 ‘왜군과 오랫동안 싸우는 것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함’ 이라는 표현은 당시 동학농민군의 항일의지가 얼마나 강했던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와 함께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 삼는 고초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네.’라는 표현에서는 당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농민군들의 상황을 단적으로 느끼게 한다. 동시에 유광화라는 사람이 얼마나 문학적인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었는지도 짐작케 한다. 일본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을 수밖에 없었던 당시 동학농민군의 절박하고 애통한 마음이 고스란히 잘 표현되어 있다. 짧은 편지이지만 동학농민혁명의 현장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동학농민군 유광화 편지>는 동학농민군이 동학농민혁명 전투과정에서 직접 작성한 편지 원본이라는 점에서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물 중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 이 편지는 1995년 전남대 이상식 교수의 소개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유광화의 후손이 2021년 기증하여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소장되어 있다. 이 편지는 2022년 문화재청의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23년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때 대표적인 기록물로 목록에 포함되었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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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23 14:59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①연재를 시작하며

“동학농민혁명은 부패한 지도층과 외세의 조선 침략에 대항하여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민중이 봉기한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은 집강소라는 민-관 협력 거버넌스 체제를 설립하는데 성공했고, 이를 통해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부당한 관행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이러한 형태의 거버넌스는 당시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이었다. -중략-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보편적 가치를 달성하고자 전진시켜나가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주는 기억의 저장소이다.”(세계기록유산 등재신청서 내용 중) 2023년 5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제216차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을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조선 백성들이 주체가 되어 자유, 평등,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했던 세계사적 중요성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등재된 기록물은 총 185건이다. 동학농민군이 생산한 일기와 회고록, 유생들이 생산한 각종 문집, 그리고 조선 관리와 진압군이 생산한 각종 보고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동학농민군이 직접 생산한 기록물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농민군이 직접 작성한 편지를 비롯하여 그 최고지도자 전봉준이 작성한 글, 동학 교단의 최고지도자 최시형에 의한 각종 임명장, 그리고 이 사건이 끝난 뒤 동학농민군 자신이 직접 보거나 경험한 내용을 정리한 회고록 등이 있다.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민간기록물은 기록물 생산 주체에 따라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사람들의 기록물’, ‘동학농민혁명 견문 기록물’로 구분된다. 1894년 당시 일부에서는 민보군(민병대)을 조직하여 직접 동학농민군 진압에 참여하였는데 그 과정을 일기로 작성한 것도 있고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뒤 직·간접적인 경험을 정리하여 발간한 문집 등이 포함되어 있다. 진압에 참여한 이유와 진압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동학농민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경험하거나 보고 들은 내용 등을 정리해 놓은 기록물도 있다. 대부분 일기체 형식으로 작성되었으며 후일 개인 문집으로 발간되었다. 조선 정부는 정부군과 지방 행정조직을 동원하여 동학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생산된 기록물에는 정부의 논의과정, 진압군이 직접 작성한 공문서와 보고서, 진압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동학농민군의 판결문 등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동학농민군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의 재판기록은 동학농민군의 지향과 인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물이다. 이들 기록물들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을 비롯하여 고려대 도서관, 국가기록원, 국립중앙도서관, 국사편찬위원회,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연세대 학술문화처, 천도교 중앙총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독립기념관, 고궁박물관, 천도교 중앙총부 등 여러 기관에서 소장 관리하고 있다. 전북일보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맞아 2023년 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의 가치와 의미를 들여다본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사장 신순철)과 공동으로 기획한 이 연재물은 등재된 185건 기록물 중 50건을 선정하여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소개할 예정이다. 대상 기록물은 동학농민군 기록물 10건, 민간진압 기록물 9건, 민간견문 기록물 6건, 조선정부 기록물 25건이다. 현재 국가 지정 문화재로 등록된 관련 기록물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장 <유광화 편지>와 <한달문 편지>, 고궁박물관 소장 <갑오군정실기> 등 3건이 있다. 동학농민군 자신이 작성한 <한달문 편지>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체포된 한달문이 나주 감옥에서 고향 집의 어머니에게 구명을 요청하면서 보낸 편지다. <유광화 편지>는 동학농민군 유광화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로, 그는 “나라가 환란에 처하면 백성도 근심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갑오군정실기>는 동학농민군 핵심 진압부대인 양호도순무영의 설치부터 폐지까지 각급 기관과 주고받은 공문과 보고서를 모아 놓은 기록이다. 최근에도 가치가 충분한 여타 기관이 소장한 새로운 자료들도 적지 않게 발굴되었다. 이 기획에는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를 비롯해 배항섭(성균관대) 김양식(청주대) 조재곤(서강대) 왕현종(연세대 교수) 유바다(고려대) 교수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병규 연구조사부장과 전동근 선임 연구원이 필진으로 참여한다. 이 연재를 기회로 개인 소장 자료를 비롯, 앞으로 전면적인 자료의 심층 조사와 발굴정리 작업이 보다 활발히 추진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조재곤 서강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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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16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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