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조선사회를 생생히 기록한 오횡묵의 <고성부총쇄록>
△1900년대 말 사회상의 기록자 오횡묵
일기 때문에 최근 학계의 조명을 크게 받는 인물이 오횡묵(吳宖默 : 1834~1906)이다. 강원 경상 전라 충청 여러 도의 지방관으로 갖가지 일들을 꼼꼼히 기록한 일기가 주목된 것이다. 고성부사로 재임할 때 쓴 <고성부총쇄록(固城府叢瑣錄)>은 갑오년 기록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들어갔다.
총쇄록은 “소소하고 자잘한 사실들의 기록”이란 뜻이지만 그것이 지금에는 이만저만한 보물이 아니다. 해당 시∙군에선 번역본을 내고, 그 기록을 활용해 문화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전문 연구도 갈수록 성과가 대단하다. 강원도 <정선총쇄록>은 한 세기 전의 행로를 따라 아리랑길의 복원 사업을 하고 있다. 경상도 <함안총쇄록>은 향내 세력 연구는 물론 지방관 업무와 작성 문서를 검토한 연구가 나왔다.
초대 여수군수로서 기록한 <여수총쇄록>은 오늘날 지역문화의 설계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지도총쇄록>은 호적이나 전답 등 섬 생활뿐 아니라 배를 타고 한강과 강화를 거쳐 서해로 내려오는 노정이 관심사가 되었다. 최근 번역본이 나온 <익산총쇄록>은 1900년대 초의 모습을 전해주는 1차 사료가 된다. 지금은 경기도로 편입된 <평택총쇄록>은 행정의 근대 전환을 보여주는 사료가 된다.
△지방관으로 성실했던 오횡묵
오횡묵이 지방관으로서 성실했던 모습은 총쇄록에서 거듭 나온다. 강원감사는 포상을 요청하는 장계를 올렸고, 경상감사는 향내 안정의 공을 들어 함안군수 연임을 요청하기도 했다. 여수와 지도군 등 신설한 군의 첫 군수 선정은 신뢰에서 비롯되었다. 정선 자인 함안의 백성들은 스스로 만인산(萬人傘)을 만들어 바치기도 했다.
총쇄록에는 수많은 시가 수록되었다. 오횡묵은 시 짓기를 즐겼다. 그는 중인들의 한시 모임인 칠송정시사(七松亭詩社)에 출입했다. 인왕산 아래 정자에 위항시인들이 모였고, 백운동에 집이 있는 그는 시사의 중심이었다. 친구 시인들은 임지로 찾아와 서울 소식을 전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총쇄록 기록에 그는 언제든 당당했다. 오횡묵의 배경은 국왕 고종과 민비였다. 무과 급제 후 궁궐 수문장을 지낸 그는 1884년 7월에 왕명을 직접 받고 공상소(工桑所)를 설치해서 감동(監董)이 되었다. 공상소는 궁궐에 필요한 각종 과일과 야채를 재배하던 기관으로 경무대 즉 현 청와대에서 창의문 일대까지 넓은 면적을 보유했다. 고종과 민비가 휴식을 위해 왕림할 때마다 감동 오횡묵이 직접 모셨다. 그러니 지존과 이런 인연으로 인해 여느 관리와는 격이 달랐다.
더구나 지방관 재임 중에도 공상소 임무를 계속 관계하였다. 재임 중 상경할 때도 공상소를 찾아온 민비를 만나고 있었다. 그런 위상을 가진 그는 임지의 향리나 백성에게 당당했고, 감사나 전운사에게도 과하게 저자세일 필요가 없었다.
△사천 민란의 조사관 임무
오횡묵은 1893년 2월부터 1894년 9월까지 고성부사로 재임했다. 당시 향촌 실정에 정통했던 그는 면리 행정의 단속과 조세 수취상 폐단의 금지, 정부 시책의 전달 등 지방관 업무에 충실했다. 하지만 1894년 초 경상도 남부도 사정은 전라도와 다름없이 심각하였다.
정월에는 사천 난민이 읍내 민가 10여 채를 불사르고 향리를 징치하는 등 소란이 일어났다. 오횡묵은 조사관으로 파견되어 이를 수습하였다. 4월에는 김해 백성 수천 명이 봉기하여 부사를 쫓아내고 향리에게 분풀이를 해서 창원부사가 조사관으로 파견되었다.
△총쇄록의 갑오년 기록
갑오년 동학 관련 기사는 4월 7일자부터 나온다. 감영이 경계하는 공문을 전재하였다. 11일에는 전라 감영의 토벌군이 비류를 잡아들이면 도망 무리가 경상도에 올 거라는 말이 있었다. 27일자에는 전라도 여러 지역 봉기 상황과 황토현전투의 결과를 실은 경상 병영의 정보를 기록했다.
삼도 수군을 지휘하는 통영에서도 연이어 고부 염탐기와 홍계훈의 경군 패배 소식, 전라 감영의 상황을 알리는 정보를 보내왔다. 그 내용을 그대로 전재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영남 출몰을 우려하는 경상감영이 여러 조처가 시급해 보인다. 그 핵심 내용은 오가작통의 강화책이었다.
총쇄록의 갑오년 사료 가치는 여러 전문을 실은 기록성에 있다. 서울 정부 소식, 경상감영 및 병영과 통영의 조치, 그리고 전라감영에서 보내온 공문이 상세하다. 청일 군대의 도성 안과 밖 대치, 일본군의 궁궐 침입와 청일전쟁의 개전도 순서대로 나오고, 교정청의 개혁방안이나 갑오개혁의 내용도 그대로 기록하였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의 가치
전라도의 폐정개혁 주장은 경상도 남부에 영향을 미쳐왔다. “동학 소동이 한번 나오자 민란이 이어서 일어나니” “온 도내를 둘러봐도 한 구석도 평안하고 깨끗한 지역이 없었다.”고 하였다. 고성도 다름없었다. 농민들이 “폐단을 개혁해서 백성을 편케 한다는 명분으로 깃발을 세우고” 북삼면 배둔리에 집결하였다. 부사 오횡묵은 이들을 피하지 않고 만나서 설득하며 28개조 개선책을 마련하였다. 누적된 폐단이 집단행동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이 사건 직후 동학도가 찾아왔다. 하동 사는 최학봉인데 6월 그믐부터 남원 전봉준 접소의 통문을 가지고 각 군현을 살피고 있다고 하였다. 남원 접소가 믿기지 않지만 전라도 상황을 이용해서 경상도 군현에서 활동하는 동학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신임 고성부사가 임명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와중인 9월에 임지를 떠나 서울로 올라가며 기록한 내용은 생생하다. 일본군의 병참부 전신소 설치와 대규모 군대가 북상하는 실상이 나온다. 그와 함께 경상도 남단에서 충청도를 지나 경기도에 이르기까지 동학도들이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는 실상을 전하고 있다. 갑오년 9월은 전국이 동학농민군 세상이었다는 증언이었다.
/신영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연구소장
이헌영(李𨯶永)의 <금번집략(錦藩集略)>
<금번집략(錦藩集略)>은 1894년 동학농민군 봉기 당시 충청도 관찰사 이헌영이 작성한 것으로 '일록(日錄)'∙'별계(別啓)'∙'별보(別報)'∙'별감(別甘)'∙'시구(詩句)'의 5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헌영(李𨯶永 : 1837~1907)은 1870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홍문관수찬이 되면서부터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개항 이후 그는 1881년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의 일원으로 일본으로 가서 세관 관계 기관들을 시찰하였고 이후 통리기무아문의 통상사당상이 되었다. 1883년에는 부산항감리를, 1886년에는 참의내무부사이자 일본주차대신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1890년 이후에는 이조참판∙협판교섭통상사무∙성균관대사성∙공조참판∙병조참판∙경상도관찰사∙한성부좌윤∙형조참판∙한성부판윤∙공조판서∙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94년 4월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치열하게 전개될 무렵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되었고 이후 1895년부터 1904년 사이 궁내부특진관∙내부대신∙평안남도 관찰사∙중추원1등의관∙의정부참정∙장례원경∙시종원경∙경상북도 관찰사∙경효전제조 등을 고위관료를 하였다.
<금번집략> 중 '일록(日錄)'∙'별계(別啓)'∙'별감(別甘)'은 청일전쟁 초기 충청도 지역의 전투상황과 동학농민군의 제1차 봉기에 대한 정부와 지방관의 대응에 관한 것이다. 이중 '일록(日錄)'은 1894년 4월 25일 이헌영이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날부터 신임 감사 박제순(朴齊純)으로 교체되는 8월 29일까지 쓴 일기 기록이다.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출동한 아산 주둔 청국군의 동향과 인접한 여러 읍에서 허다한 접대비용 지출 등을 수록하였다. 6월의 기록은 청국 병사의 접대와 청국군 동향, 직산과 성환 전투에서 패한 청국군이 연기 지역으로 떠나는 상황을 적고 있다. 7월과 8월은 이인역을 시작으로 서천∙청양∙한산∙연기∙공주 지역 동학농민군의 제1차 봉기 동향과 이에 대한 지역의 대응책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이 지역 농민군의 제2차 봉기와 관군∙유회군∙일본군의 진압에 대해서는 홍주 영장 홍건(洪健)의 <홍양기사(洪陽紀事)>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별계(別啓)'는 같은 해 6월 25일부터 8월 5일까지의 기록으로 청국군∙일본군∙동학농민군의 상황이 섞여 있다. 풍도 해전과 성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여 내포 일대로 흩어진 청국 병사들이 들어와 마을을 약탈하고 놀란 주민들이 흩어지는 등 막심한 피해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이 중 특히 서산∙해미∙홍주∙덕산∙예산 등지의 약탈이 가장 심하였다고 한다. 본진이 있던 아산에서 청국군이 물러나고 일본군이 백석포를 거쳐 들어오게 되는데, 이곳에서 일본군은 객사와 산비탈 등에 주둔하는 한편 민가와 관청 건물에 들어가 남아있는 전곡과 집기 등을 빼앗고 사직단과 관청의 장부를 불태워지는 현감의 상황 보고를 수록하고 있다. 이후 매일 1,000~1,200명의 일본 병사들이 충주를 지나갔고 그들의 요구대로 수천 명의 인부를 마련해주었다 한다. 또한 임천과 공주∙청양∙보은∙서천∙한산∙연산 등지의 동학농민군 활동과 관련한 보고서를 수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총칼을 들고 말을 탄 ‘동학배’가 작청에 난입하여 협박하고 수백의 무리를 이루어 금전과 재물을 약탈하거나 수성군의 무기를 빼앗는다는 것이다. 특히 한산에 도착한 무리 57명은 전라도 부안의 동학인으로 재물과 무기∙마필 등을 빼앗는 등 폐단이 컸다고 한다.
'별감(別甘)'은 이헌영이 충청도 각 지역 지방관리와 유회소(儒會所), 민보군 개인 등에 보낸 전령과 효유문을 모은 것이다. 이인민회소(利仁民會所)에 보낸 전령에서는 경솔하게 무리를 모으면 나라는 더욱 위험하게 되므로 본업에 물러가 종사하고 조정과 방백의 명령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공주∙홍산∙은진의 유회소 및 진천 민회소, 부여 유생 천기일(千基一), 영동 집강 손인택(孫仁澤) 등에게도 유사한 전령을 내렸다. 반면 관내에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의 시행을 지시하였다. 내용은 각각 해당 동내에서 위력이 있고 근실한 사람을 골라 동수(洞首)로 정하고, 사람마다 이름을 적어서 오가작통하여 1통마다 통수(統首)를 두고, 주민을 조사하고 타일러서 밤낮으로 살피고 경계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상한 자는 적발하고 단속을 배가하여 방법을 마련하고 따로 법률을 만들어 실효를 거둘 것을 주문하였다.
이헌영은 평양으로 퇴각 시 천안에 맡겨둔 직예제독 예지차오(葉志超)의 군자금도 보관 후 돌려주게 했는데, 원래의 수량과 일일이 대조하여 살피고 착실하게 맡아두었다가 나중에 찾아갈 때를 기다리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공주∙전의∙목천∙온양의 지방관에게는 청국군 군수물자 운반을 위한 우마를 각각 나누어 정하도록 지시하면서 명령을 어길 시에는 군율로 처리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연기∙청주∙청안∙음성∙충주 등 각 지역에는 읍의 경계에서 기다리고 각별히 호행토록 하였다. 직산현감에게는 성환 전투에서 전사한 청국군과 일본군 모두를 예장(禮葬)하라고 당부하면서 각기 무덤 옆에 단을 설치하고 표를 세워 살필 수 있는 근거로 삼고 그 전말을 자세히 보고토록 지시했다. <금번집략>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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