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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⑥세기를 넘어선 미스터리, 사라진 사발통문(沙鉢通文)의 기록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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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통문거사도.  /판화작가 박홍규 제공

세상에 난리가 났네 난리가 났다고 하면서 참 잘되었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까. 조선말기 조선의 상황이 바로 그러하였다. 민초들의 삶을 억누르는 지배자들의 수탈, 양반과 상놈을 갈랐던 신분차별, 하루하루 겨우 영위하는 삶의 끝자락, 사발통문이 희망의 불씨를 타오르게 했다. 2019년 봄 수개월에 걸쳐 방영된 모 방송국의 주말드라마 ‘녹두꽃’은 방영 초기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거의 모든 TV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런데 어느 한 장면을 보다가 필자는 숨을 멈춰버렸다. 전봉준이 붓을 들고 4대 결의와 20명의 서명자를 쓴 이후, 자신의 이름 한자와 한글로 마감한 통문 작성 장면이다.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그동안 역사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나? 

원래 ‘사발통문(沙鉢通文)’은 조선후기 농민들이 봉기할 때, 주모자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가담자들이 원둘레에 각자 이름을 적어 돌린 것이다. 통문 발견으로 1894년 고부농민군이 처음부터 계획적이고 주도적으로 농민혁명을 일으킨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그런데 실제 사실을 기록한 것인가 하는 원본의 진실성을 놓고 논란을 빚었다. 발견과정부터 미스터리하다. 

이 자료는 1968년 12월 전라북도 정읍군 고부면 신중리에 거주하는 송준섭(宋俊燮) 집 마루 밑에 묻혀있던 족보 속에서 나왔다고 한다. 1972년 외솔회에서 본격 검증에 나서, 김의환 교수가 그동안 보관해 오던 송후섭(宋後燮) 씨를 만났다. 그는 “아버지(송대화: 서명자의 한사람, 1919년 사망)이 세상을 떠났을 때 물려받은 서류궤짝에 있었다”고 했다. 그가 26살이던 1936년에야 도장이 찍혀 있는 봉투안에 문서를 확인하고 '여산송씨가보' 뒷표지에 간직해 오다가 송기태가 발표한 것이라고 했다. 1970년 동아일보 보도에 의하면, 신태인읍에 사는 송기태(당시 63세) 자택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송기태는 송두호의 증손으로 물려받아 가보로 간직해 왔던 것이라 전했다. 이렇게 전래 경위에 대해서는 다소 엇갈리는 부분이 있지만, 처음에는 통문이 1894년 당시 작성된 원본이라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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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통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1974년 6월에야 학술적 검토가 이루어졌다(<나라사랑> 15집, '녹두장군 전봉준 특집호'). 김용덕은 이 문서가 진본이라고 단정하지 못하고 판정을 보류했다. 결의사항 중 ‘경사로 직향할 사’를 용인할 수 없어서였다. 1980년대 중반 정창렬은 사발통문을 4부분으로 나누어, ‘계사 11월 일’에서 ‘각리리집강 좌하’까지(㉮부분, 서명자 20명), 이후 민심의 동향(㉯), 도인들의 선후책 토의(㉰), 결의이후 영도자를 뽑는다는 것(㉱)으로 구분하였다. ㉰의 경우 서명자 집단 내부만의 기밀사항으로 ㉮의 통문이 고부지역 전역에 유포되지 않았던 점을 의문시했다. 다만 ㉰의 결의를 수행한 세력을 금구취당과 연결시켜 거사계획이 전부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고부민란의 연구(하)' <한국사연구> 49, 1985). 한편 신용하는 1차 동학농민전쟁의 단계로서 3월 무장기포를 중시하면서 통문 내용을 재검토하였다. 그는 통문 본 내용이 잘려 나갔다는 전제하에 계사년의 등장(等狀), 이듬해 갑오년 1·2월의 고부민란, 3월의 제1차 농민전쟁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통문 ㉰와 ㉱부분을 하나로 통합하여 한 장의 종이위에 기록한 것이라 하였다. 그는 당시 통문의 원본(原本)이 아니라 어떤 분이 작성한 회고록(回顧錄)의 일부라고 추정하였다(<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1993). 두 연구자는 통문 내용 중 ㉮의 앞부분과 ㉰의 결의사항이 처음부터 동일한 차원에서 결의되었다고 가정하였다.   

앞으로 사발통문이 진본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 더불어 통문 내용과 4가지 결의가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밝혀야 한다. 그런데 1900년과 1904년 2차례 일어났던 경기도 시흥 농민항쟁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이때에도 사발통문이 유포되었다. 당시 정부는 관련자들을 조사하면서 누가 수모자이고 추종자인지를 구별하고자 했다. 1904년 음력 8월 5일 시흥 한천교에서 민회를 소집하자는 통문을 작성한 혐의로 기소된 민용훈은 통문으로 민란을 촉발하지 않았고 단지 군중을 모으는 것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법부의 최종 판결은 통문으로 시흥군 42개 동의 집강과 동임들이 모였고, 이를 계기로 민란이 일어났으므로 관련 인사들 모두에게 중형이 내렸다.  

이 사례는 통문의 잘려진 앞부분 내용이 4대 결의와 상관 없을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원래 고부군 각리 집강에게 모임을 갖자는 통지이며, 다만 서명자들의 사인이 둥그렇게 된 것은 민회 소집 주모자를 알 수 없도록 한 조치였을 뿐이었다. 실제 전봉준은 자신이 처음에는 주모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중민 수천명으로 추대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전봉준공초> 초초문록). 1893년 12월 전봉준은 60여명의 고부 농민과 함께 전주 감사 김문현에게 폐정을 시정해 달라고 등소(等訴)운동을 벌였다. 고부 농민들은 감사에게서 거절당해 쫓겨난 상황에서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결의를 다졌을 것이다. 따라서 1893년 11월 말 민회 개최를 위한 통문을 낸 이후 등소운동이 실패하자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가에 모여 4가지 방침을 새로 결의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렇게 보아야 고부 봉기 과정을 순차적이고 단계적인 변화상을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사발통문의 일부 내용이 조작됐다는 설도 있다. 주산마을 임두영 씨는 사발통문 내용이 같지만, 크기가 지금(42×30센티미터)보다 훨씬 컸으며(70×50센티미터), 서명자의 필체가 모두 달랐고, 재질도 기름에 젖은 창호지였다고 증언했다. 그는 1947년 초 동아일보 기자에게 넘겨진 뒤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고 덧붙였다(이이화, <발굴 동학농민전쟁-인물열전> 1994). 

또 2001년에는 기존 통문이 아닌 새로운 이본(異本)이 발견되었다(김용섭, <한국근대농업사연구(Ⅲ)>). 사라진 통문의 앞 부분 내용이 첨부되어 있고, 서명자가 15명이며, 뒷부분 봉기 조직으로 전봉준 등을 선출한다는 것도 추가되어 있다(<동학농민혁명난과 전봉준장군실기> 1954). 새 자료의 저자는 송재섭(宋在燮, 1889~1955)으로 송두호(宋斗浩)의 손자이자 송주성(宋柱晟) 씨의 아들이었다. 그렇지만 이본에서는 당시 쓰지 않던 ‘만천하동포’, ‘동포형제’를 사용했고, 기존 통문 내용을 그대로 적으면서도 아래아(ᄋᆞ)를 생략하고 있다. 이로써 기존 사발통문을 일부 베끼고 앞뒤를 추가하여 새로 작성한 후대의 기록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발통문에 서명한 20명은 어떠한 삶을 지냈을까. 대부분 1894년 말부터 수개월 동안 전장에서 그리고 재판에서 희생되었고, 나머지는 일제하에서 숨어 지내며 불행한 삶을 살았다(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1994, 3판, 37~38쪽). 

  전주에서 사형(1894.12.~95.1.) – 황찬오, 황채오, 김응칠, 황홍모, 김도삼 

  나주에서 사형(1894.12~95.1.) – 손여옥, 송두호, 송주옥, 

  재판 후 서울서 사형(1895.3.) – 전봉준, 최경선(20명의 서명자 중 당시 사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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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통문 작성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사발통문은 오늘날 한국의 거의 모든 역사교과서에 수록된 한 장 사진으로 수록되어 동학농민혁명 초기 민중 의식과 봉기의 계획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앞으로 통문에 사용된 종이 지질이나 먹의 형태에 대한 자연과학의 재질 분석도 필요하고, 국한문 혼용체로 쓰인 한글의 어미와 접속사 사용(예컨대 ‘ᄯᆞᄅᆞ서’)에 관한 근대국어학의 분석도 필요하다. 이제 지난 세기를 넘어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맞이했지만, 사발통문 문서는 아직도 여러 학문간 과학적 검증을 거치지 못한 채 ‘날 것’의 사료로 머물러 있다. 사발통문은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소장되어 있으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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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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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기념물 #사발통문 #왕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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