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달랐다.”
처음 영화제 프로그램 어드바이저로 제안받았을 때는 대강의 상영작이 이미 확정된 상태고 상영작 일부를 선정하는 과정만이 맡겨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인수인계를 거쳐 나온 상영작 목록은 ‘절대 부족’. 영화제조직위측 역시 상황이 이 정도로 심각한지 몰랐다고 전했다. 전적으로 프로그래머에게 일임했던 만큼 프로그램 진행상태 역시 단순 보고를 받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불과 한달보름 남짓한 시간동안 상영작 1백80여편을 확정한 것 자체가 ‘기적’이다.
사임한 프로그래머를 대신해 전주국제영화제의 프로그램 어드바어저로 참여한 안해룡, 앙트완 코폴라, 서동진씨. 안해룡씨와 앙트완 코폴라씨가 다큐멘터리 비엔날레와 특별프로그램 ‘포스트 68’등 세부 섹션을 맡았던 것에 비해 서동진씨(35·사진)가 짊어져야할 부담은 예상을 뛰어 넘었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와 상황이 전혀 달라 고민끝에 몇차례 사의를 표하기도 했다는 서동진씨. 그는 매서운 폭풍의 한 가운데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방향타를 잡은 조타수가 됐고, 잠잠해진 폭풍 뒤로 그는 어느새 전주영화제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지난달 27일 상영작발표회를 마치고 전주를 찾은 그를 만났다. 고비를 넘겼지만 여전히 진행해야 할 일이 산적해있는 상황. 그는 그동안의 과정을 소개하면서 ‘지속가능한 영화제의 발판을 만드는 일’, 그리고 ‘변하지 않은 프로그램의 성격’등에 대한 나름의 확신을 드러내 보였다.
그리고 이번 영화제를 두고 영화팬들이 궁금해야 할 일들을 잘 알고 있었다. ‘지난해와 영화제의 성격이 달라지나?’, 또는 ‘급진영화라는 테마가 제한된 시간속에서 탈색되진 않았는지?’등의 질문은 그의 설명속에서 자연스레 우문(愚問)으로 변해갔다.
“지극히 제한적인 시간과 자원속에서 영화를 선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큰틀의 변화는 당초부터 시도조차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변화는 없다. 대안영화, 디지털영화, 아시아 독립영화를 내세웠던 작년의 성격이나 메인프로그램, 섹션 2001, 특별기획 등 역시 큰 축을 이어가는 형식이 될 것이다.”
발표된 2백여편의 상영작 소개를 통해 전주영화제의 변함없는 성격을 대신 답했다. 오락적이고 다분히 관습적인 영화보다는 생소하고 낯선 영화들에 여전히 비중을 두었다고 말했다. 상업영화판에서는 좀체 만나기 어려운 영화들이라고 했다.
“모든 영화제들은 교육적 성격이 강하다. 쉽게 말하자면 ‘영화의 편식을 막고 색다른 성격의 영화 창구를 열자’는 것이다. 영화팬 역시 ‘낯섬’과 ‘생소함’을 받아 들임으로써 그동안 생각해온 영화밖 세상을 만나고 조금씩 그 폭과 깊이를 넓혀가는 시간이 될 것이다. 전주영화제가 오스카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전주영화제의 존재이유나 지속가능한 영화제로서의 길을 터주는 역할에 중심을 두고 영화제 프로그램 작업을 벌였다고 말했다.
‘radical cinema’로 대표되는 이번 영화제 테마에 대해 그는 조심스러웠다. 사임한 두 프로그래머에 대한 인식의 공유가 어려웠던 형편 때문이다.
“영화제는 영화에 던지는 물음이어야 한다. 정치적 의미에서의 접근이라기보다는 영화의 현재, 곧 ‘영화가 무엇인가’라는 정체성에 던지는 물음, 어떤 목표나 특성, 상태가 아닌 영화역사 속에서 여전히 유효하면서 절박한 물음을 내놓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 프랑스의 68혁명과 한국의 6월 항쟁이 영화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를 볼 수 있는 ‘포스트 68’프로그램이 마련된다.
영화팬들과의 거리감에 대한 우려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매니아 뿐아니라 일반 영화팬들을 위한 흥미로운 영화들 역시 적지않다”고 소개했다. 아무런 부담과 저항 없이 만날 수 있는 영화들. 그는 익숙한(?) 영화들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한사코 관객들이 찾아볼 수 있는 시간의 필요성이나 자칫 “김새는 일이 될 수 있다”(웃음)며 뒤로 미뤘다.
아직까지 채워지지 않은 한국영화섹션 때문에 여전히 고민중에 있다는 그는 “전주영화제가 매년 겪어야할 걱정 중에 하나다. 상반기에 개봉예정인 한국영화들이 전주영화제를 전후로 열리는 깐느를 비롯한 세계 유수의 영화제를 겨냥하고 있는 만큼 한국영화 상영작을 결정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털어 놓았다. 4월초에 시사회가 열릴 영화들을 대상으로 한국영화 섹션을 채워갈 계획이다.
“영화제를 앞두고 많은 후반부 작업들이 남아 있다. 프로그램 관계자 등 많은 스탭들이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성공을 기대해 본다”고 말했다.
서동진씨는 서울퀴어영화제 집행위원 겸 프로그래머로 활동중이며 도발적인 글쓰기로 문화평론가로서 역동적인 활동을 해왔다. 그는 현재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에 출강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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