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따라 '竹竹' 걷다보니…'무릉도원'이 따로없네…대나무 숲 사이로 시원한 바람 스치니 '황홀경'
17세였다. 양산보(1503년~1557년)는 약관을 맞기도 전에 스승인 조광조의 죽음을 경험하고 낙향했다. 그는 기묘사화에 연루된 스승이 귀양간 지 한 달만에 사약을 받은 일을 지켜보며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기로 결심한다.
당숙과 조광조가 동문수학한 인연으로 15세 때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으로 유학, 조광조의 문하생으로 들어간 지 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제주 양씨였던 그는 전남 담양군 남면에 아버지가 개척한 마을인 창암촌에 20년 동안 '무릉도원'을 만든다. 어릴 적 거닐던 계곡을 중심으로 소쇄원(瀟灑園)을 짓는다.
자신은 가산이 많지 않았지만 이종형인 면양 송순과 당시 광주지역의 재력가였던 사촌 매부 김윤제 등의 도움으로 소쇄원을 건립했다.
소쇄공 양산보는 평생 소쇄원에서 학문을 연구하며 명망있는 학자와 교류, 처사(處士)라는 호칭을 얻는다.
지난달 28일 약간 흐린 날씨에 찾은 전남 담양군 남면 소쇄원. 현재 조선 중기 최고의 원림(정원은 일본식 표현으로 원림을 사용)으로 평가받는 곳이다. 4600㎡가 조금 넘는 면적으로 넉넉하게 한 시간이면 소쇄원과 일대를 둘러볼 수 있다.
소쇄원에 들어서자 대나무의 고장답게 입구부터 대나무 숲이 눈길을 끌었다. 양쪽 대나무 숲 사이로 걸으니 시원한 바람이 절로 얼굴을 스친다. 오른편에 난 작은 개천에는 오리 5마리가 여유롭게 실개천을 거닐고 있었다. 왼편의 대나무 숲에는 오골계가 방목되었다.
'어른 1000원(단체 800원), 청소년·군경 700원(단체 500원), 어린이 500원(단체 300원)'의 관람료 안내판을 지나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50m 가량 올라가니 오른편에 소쇄원을 조성한 양산보의 후손이 살고 있는 관리사가 보였다.
이내 마음을 사로 잡는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내원과 외원을 가르는 담장 왼편으로 소쇄원을 가로지르는 계곡이 펼쳐졌다. 계곡 양 편으로 소나무·단풍나무·매화 등이 곳곳에 어우러지고 그 사이를 다람쥐가 분주하게 다녔다.
자연 계곡을 집 안에 끌어들인 정경은 그야말로 신선이 사는 곳이었다. 절로 시가 나올 듯했다.
붕당의 피바람을 피하기 위해 출사하지 않고 자신만의 무릉도원에서 이상향을 꿈꿨던 양산보의 삶이 읽혀지기도 했다.
좀더 오르니 오곡문(五曲門)이 보였다. 북쪽의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오곡문 담장을 지나 소쇄원 안 계곡으로 흘러들었다. 오곡문은 500년 동안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는 2채의 기와 정자가 남아있지만 조성 당시에는 12채 정도였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오곡문 담장을 빼고는 모두 불 타 손자인 양천운이 다시 중건하기도 했다. 이후 양산보의 5대손인 양경지가 흩어진 소쇄원 관련 문헌을 정리하고 원래대로 복구했다. 우암 송시열의 글씨를 받아 현재 남아있는 제월당(霽月堂)·광풍각(光風閣) 등의 현판을 제작해 더욱 이름을 높였다.
제월당은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으로 주인이 기거하던 곳이며, 광풍각은 비온 뒤 해가 뜨면 부는 시원한 바람'이라는 의미의 사랑방이었다. 제월당과 광풍각 사이의 협문은 어른이 고개를 숙여야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높이로 겸손하라는 뜻이 담겨있었다. 계곡 한 켠 경사진 면에 자리 잡은 광풍각에서 불을 때면 연기가 계곡 물 위로 피어올라 장관을 연출, 운치를 더했다고 한다.
이날은 평일인데도 가족·연인 단위 방문객과 단체 관람객 등이 눈에 띄었다. 이연희씨(47·진주시 평거동)는 소쇄원 방문이 세 번째라고 했다. 그는 "올 때마다 다른 느낌이다. 최근 문화재를 재현한 곳은 인공적이지만 여기는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된 곳이어서 마음이 참 편안해진다"면서 "자연을 그대로 유지, 느림과 풍경의 미학을 느끼고 간다"는 감상평을 전했다.
문화관광해설사인 박수령씨는 "소쇄원은 지난 1925년 일본에서 열린 정원 박람회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면서 "소쇄원은 가을 단풍이 들었을 때와 눈이 온 겨울날의 절경이 가장 빼어나다"고 소개했다.
한편 소쇄원은 지난 4월19일부터 관리 주체가 담양군으로 바뀌었다. 문화재청이 사적 304호인 소쇄원의 관리 주체로 담양군을 지정하면서 양산보의 후손과 담양군의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소쇄원을 나서는 길, 장을 보고 소쇄원으로 들어오는 14대 종부 심효경씨(74)를 만났다. 그는 50년을 꼬박 야트막한 길을 오르내렸지만 "나는 별거 아니다. 십대에 시집와서 약 100년 동안 오르락 내리락 한 사람도 있다"며 "이제껏 우리 조상이 했듯이 우리가 소쇄원을 지키고 가꾸는 것은 당연한 후손의 의무다"고 밝혔다.
양산보는 후손에게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며, 후손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조상의 유훈을 지키는 후손의 노력이 소쇄원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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