솟을대문·고래등 같은 고택 눈길 사로잡아…널따란 마당 고풍스럽고 웅장한 자태 일품
끝없이 펼쳐진 푸르름의 녹원. 파란 하늘과 녹음이 한데 어우러진 고풍스러움. 검게 얼룩진 발자취가 일순 부끄럽다.
무너지고 해어진 곳을 군데군데 메워 옛 정취를 되살린 돌담길. 옛 명성을 들춰내듯 곳곳에서 묻어나는 고풍스러움과 웅장함은 풍요로움 그자체다.
지난 10일 오후 기자가 찾은 익산시 함라면 삼부자집. 평소 지나쳤던 삼부자집은 이날따라 소중한 유산임을 알게해준다.
익산 시내에서 황등면을 지나 함라에 다다르자 함라산 중턱에 자리한 삼부자집이 한눈에 들어온다.
유례를 알기 이전에는 간곳없이 사라진 삼부자집의 사라진 영화를 알리 만무하다.
이곳은 와우산이 마을 전체를 감싸고 있어 예로부터 부자가 많이 배출된 마을로 통한다.
조선시대 삼부자집 땅을 밟지 않고서는 한양에 다다를 수 없었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들이 지녔던 재력을 가히 짐작케한다.
고래등같은 웅장함에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조해영 가옥, 그리고 김안균·이배원 가옥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근대 최고의 명창으로 불리는 임방울의 호남가중 '풍속은 화순이요 인심은 함열이라'라는 한 구절을 실감케한다.
솟을대문을 지나치다 동편 별체의 허물어진 울타리 사이로 발길을 옮기니 고래등 같은 고택이 나타난다.
한때 부를 누리며 후한 인심을 베풀었던 조해영 가옥이다.
지난 세월이 야속하듯 군데군데 무너진 담장과 케케묵은 건물만이 자리하고 있지만 아직도 널따란 마당과 건물의 웅장함에 부를 만끽하기에 충분하다.
지난 1986년 9월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됐지만 가옥 안체는 초췌하기 그지없다.
안체 상량문에 새겨진 '대정(大正)7년'이란 글자로 미루어 보아 1918년에 건축된 가옥임을 짐작케한다.
별체는 이보다 다소 늦은 시기인 1922년이나 조금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안체는 남쪽을 별채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안채의 난간은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듯 해어지고 무너져 부의 무상함을 느끼게한다.
별채 또한 지난 세월이 야속한듯 곳곳이 무너져 보수가 시급한 상황이다. 대문은 어디론가 사라진지 이미 오래인데다 보존상태 또한 보기조차 흉한 모습들이다.
안채와 별채로 둘러싸인 마당 한켠에는 허물어진 뒷담과 함께 텃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별채 동편 울타리 밖에 위치한 김육 선정비가 숱한 세월을 버텨온듯 힘든 모습이다.
촘촘한 문살로 엮어진 벽면과 정교하게 짜여진 난간이 그야말로 일품이다.
벽돌과 자연석으로 한껏 치장한 멋스러운 담장 그자체만으로도 한때 부와 영화가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조해영가옥을 돌아 시선을 사로잡는 김안균 가옥.
만발한 접시꽃과 봉숭아가 지친 피로를 풀어준다. 번지르한 돌담으로 둘러싸인 김안균 가옥에는 인기척이 그리운듯 제멋대로 자란 나무들이 질퍽이는 풀 가지들과 엉켜있다.
끝없이 펼쳐진 가옥 전경이 한참을 지켜본 뒤에야 시선이 들어온다. 넓다라기보다 웅장함에 그자체다.
대지 6000여㎡에 건평만도 400여㎡에 달하니 규모의 웅장함은 둘말할 나위가 없다. 지난 1986년 9월8일 전북도가 민속자료 제23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조선 말기 양반 가옥 구조에다 일본식 건축양식이 가미되어있다.
안채와 사랑, 행랑채로 이뤄진 김안균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의 경우 1922년에, 동서 행랑채는 1930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가옥 행랑채의 입면은 자취를 감춘지 오래지만 23칸으로 건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거실과 침실이 나뉘어 있는데 사랑채 깊숙한 곳에 침실을 별도로 두고 있다.
사랑채 지붕은 팔각지붕이며 6칸 대청 누마루 형식으로 꾸며졌다.
안채를 벽돌담으로 차단하였으나 내부는 복도와 통하도록 문을 달아두었다.
사랑채와 안채는 전후에 복도를 둘렀으나 유리 분합문을 달았음은 일본 건축양식이 가미되었음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사랑채 측면에는 화장실을 별도로 세워뒀으며 행랑채끝의 목욕탕은 당대의 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느끼게 한다.
김안균 가옥 건너편의 이배원 가옥도 지나칠 수 없는 가옥중 하나다. 이들 삼부자집중 가장 먼저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 원불교 교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배원의 장남 이집천씨가 함라산 숭림사 현판을 쓴 장본인이다.
인적이 드문듯 사라진 생동감과 활기잃은 생명력에 아쉬움이 앞선다. 내부 구석구석을 찾아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려본다. 다채롭고도 볼거리로 즐비한 가옥으로 꾸며졌으면 하는 생각도 앞선다.
익산시는 지난 2008년부터 오는 2012년까지 '농촌 관광을 위한 함라한옥단지' 조성 사업을 추진, 옛명성을 되찾는데 주력할 방침이다.
접안시절 설계용역 등이 마무리되는 대로 본격적인 사업 착공에 돌입하게 된다.
가옥들을 전면 재보수하고 주차장, 공연광장 등을 조성하는 한편 옛날의 거리와 맛집 등이 복원된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담장길도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문화재청으로부터 해마다 1억여원씩 지원돼 보수가 한창이다.
함라면은 조선 태종9년 용안현과 합하여 안열현으로 불리다 7년뒤 다시 함열현으로, 이후 조선 500백년동안 현청 소재지로서 관아가 자리했다.
1985년(고종 32년) 함열군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따라 익산군 함라면으로, 1995년 도농통합으로 익산시 함라면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곳이다.
평소 평범한 가옥으로 지나쳤던 함라 삼부집을 둘러보면서 재삼 보전의 가치를 느끼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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