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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수만리(水滿里) 통신

국명자

 

난리가 났습니다.

 

폭풍경보와 한파경보에 폭설경보까지 겹친 험한 날씨가 동상면 수만리 오지 골짜기 학동마을로 들이닥쳤기 때문입니다.

 

"동상면 날씨 조짐이 엄청 수상스러우니 미리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큰 탈나겄소"

 

수화기를 들 때마다 마을 기상예보관은 이런 투로 은근히 겁을 주고 있었는데 드디어 그 조짐이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하늘이 뚫렸는지 밤낮 없이 눈이 내렸습니다. 마당이 묻히고 길이 묻히고 골짜기도 묻히고 마을이 온통 하얀 냉동고가 되어버렸습니다.

 

"…자빠져서 다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요. 절대 절대 나올 생각들 마시오. 이런 날씨는 내 생전 처음인디…."

 

마을 어른의 금족령이 아니래도 꼼짝없이 갇힌 몸이 되었습니다. 남녘으로 낸 통유리창으로 밖에서 뭔가 끝장을 내고야 말 것 같은 다급한 전황을 살피고 있는데, 굵은 눈발 사이로 뜬금없이 내 먼 유년시절의 겨울이 보이고 있었습니다. 창밖보다 더 추웠었던 그리고 지독히도 가난했었던 그 겨울이 보이고 있었습니다.

 

방 방 아궁이마다 보듬어온 땔감으로 군불 지펴주셨던 어머니가 보였습니다. 연탄 반개라도 아끼려고 한밤중에 일어나 벌겋게 들어붙은 연탄을 식칼로 쪼개시던 야윈 어머니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하나같이 입성은 허술했었고 아이들은 빨갛게 튼 손등을 내놓고 다녔으며 시린 발 때문에 늘상 동동거렸었습니다. 방안에선 화로 옆을 떠날 수가 없었고 윗목의 걸레와 자리끼의 물은 늘 꽁꽁 얼어 있었습니다.

 

두레박질로 우물물을 길어오려면 미끄러운 우물가가 두려웠고 높은 토방과 더 높은 부엌 문턱 넘기가 힘들었었습니다. 뒤란에 가마니로 엉성하게 둘러놓은 화장실 생각만 하면 아프던 배도 조용해지곤 해서 눈쌓인 겨울철엔 며칠씩은 참고 참으면서 넘기곤 했었습니다.

 

심야전기로 자동 난방된 훈훈한 집 안이 갑자기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습니다. 거실을 빙 둘러가며 안방 화장실 욕실 세탁실 부엌이 문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도 떠나신 어머니에겐 너무 죄송해서 가슴이 저렸습니다.

 

천 리 만 리의 그리운 사람들과 얼굴 보면서 통화하고, 누워서 영화보고 스위치만 누르면 실내에서도 온수 냉수 나오고 밥 되고 국 끓는 기적 속에 살고 있음이 새삼 놀라우면서 새삼 신기한 일로 보여오고 있었습니다.

 

허기진 산새들과 들고양이들이 먹이를 찾아 마당으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일 년도 더 넘게 먹을 수 있는 맛깔스런 김장김치와 온갖 먹거리들이 집안 곳곳에 풍성하게 저장되어 있는 것에 왜 그동안 감격하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늘 주린 듯 허기졌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새큼한 괭이풀을 뜯어먹고 감꽃을 주워먹고 목이 막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떫은 풋감을 주워 먹었었습니다.

 

어머니 몰래 입에 생쌀을 넣고 오도독거리는 소릴 들키지 않으려고 매번 이불 속에 머릴 묻었던 생각도 납니다.

 

김치 건더기는 어른들이 잡숫고 그 멀국으로만 밥을 비벼 먹었던 생각도 납니다.

 

한끼니씩은 으레 굶거나 멀건 죽으로 때웠던 참으로 곤곤했던 그시절을 왜그리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감사하고 감격할 것이 없다면서 강퍅하게만 살아왔던 마음이 오랜만에 녹고 있었습니다. 경보까지 달고 온 험악한 날씨가 창밖에서 강력하게 보여주는 그것 때문에 모처럼 가슴이 따뜻해지고 있었습니다.

 

*한국수필 천료(1983)

 

*저서 '따갑게 미소롭게' '내모습 이대로' '다시 만나기 위하여'

 

'내가 너희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랴'

 

/ 국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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