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이 얼기 시작하든 첫날,
내집에 오는 길 전차에서 나는
매우 침착한 소녀를 만낫서라
초생달 갓흔 그의 두 눈썹은
가장 아름다워 그린듯 하고
포도주 빗갓흔 그의 입술은
달콤하게도 붉었섯다.
그러나 도람직하고 귀여운 그 얼골에는
맛지 않는 근심빗이 떠도라 잇고,
웬 셈인지 힘을 일코 떠보는 두 눈가에는
桃紅色의 어린빗이 떠도라라.
-「少女의 죽음」에서, 『금성』제2호, 1924.1
유엽은 전주 출생(1902-1975)으로 신흥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 문과를 중퇴한 후, 1923년 11월 일본 와세다 대학생이었던 손진태, 양주동, 백기만 등과 함께 한국현대시문학의 초석이 되었던 시전문지『금성』을 주도한 인물이다. 여기에, 당시『학생계』에서 습작활동을 하던 김동환과 김창술을 신인으로 추천하면서 후배 양성과 현대문학 이론에도 밝은 전북의 선구적 시인이었다.
「少女의 죽음」은 우리 근대시에서 최초의 서사시에 해당된 작품이다. 고대 서사시는 민족적 영웅의 행위를 중심으로 역사적 사실을 서술한 장중하고 웅대한 구성의 산문시를 뜻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시민사회가 형성됨에 따라 자아에 눈을 뜨게 되자 서사시에 등장하는 주인공도 영웅에서 소시민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시 또한 전차 안에서 만난 소녀와, 신문에 실린 임신한 여인의 자살 기사를 결부시켜 쓴 3연 142행에 이르는 장시(長詩)로서, 한국현대시사상 서사시의 효시에 해당된 작품으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서사시라고 일컫는 김동환의「국경의 밤」(1925)보다 1년 앞선 셈이다.
당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던 남녀 간의 정사(情死) 문제, 곧 사랑을 이루지 못한 한 소녀가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당시의 사회적 병리 현상을 서사적 형식에 담은 시다. 연약한 소녀와 절대 권력의 가부장적 사회제도와의 대립은 표면적 기호일 뿐, 일제라고 하는 무소불위 폭력과 그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민의 처지와도 무관치 않으리라고 본다.
가을 밤 구르는/ 낙엽 소리는/ 완연한 옛날/ 그 발소리라.//
아, 다시는 못들은 / 익은 발소리/ 물끄러미 나는 / 눈물 삼키다.
-「낙엽 노래」부분 , 『금성』제1호, 1923.11
어떤 흐린 그믐밤 빛 없는 골방에서/.../ 낡은 이불에 눌려 죽은 듯이 누워 있으니....../ 세월은 어둠과 악수하고서/ 코웃음을 히히 웃으며/ 문틈으로 새여 흐른다.
-「겨울 밤의 哄笑」부분 ,『금성』제3호, 1924.5
'떨어져 구르는 낙엽 소리' 에 상심한 시인은 이후 '골방'으로 이동하게 된다. 골방은 거리의 유혹과 빛이 차단된 폐쇄 공간이다. 그만큼 시대와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1920년대 화자의 어두운 모습이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우리고장에 이미지즘 운동의 기본 태도와 예술지상주의론을 도입한 최초의 시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시인이란 '리듬을 중시하고, 정확한 언어 사용과 불필요한 수식어 삭제, 그러면서도 자연의 심오한 묘리(妙理)와 우주의 진리를 천진난만하게 노래하는 철인이요 도인(道人)이어야 함'을 강조하였음이 그것이다.(「유물사관적 문예론의 근본적 모순」(조선일보 ,1927, 6.23)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