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月이 들어 있다.
콩콩 찧어 물들이면
빨강 8月이 손톱에 옮아온다.
눈동자 푸른 바닷가에서
빨강 모자를 쓰고 웃는 少女-
-손톱이 자라면 차츰
8月이 밀려가겠지만
나직한 歲月을 등에 지고 기대어
생각노라면
해가 갈수록 짙어지는 기억 속으로
손톱을 물들이며 빨강 8月이 온다.
-「8월」, 전문
8월만 되면, 봉선화 꽃잎으로 빨갛게 손톱을 물들이던 지난날의 추억을 애틋하게 떠올리게 한다. '8월'이라고 하는 추상적 관념의 세계가 '빨강 봉선화'라고 하는 화려한 감각적 은유를 통해 우리의 무딘 감성을 시적으로 살아나게 한다. '푸른 바닷가'와 '빨간 모자를 쓴 少女'와의 색감 대비도 선명할 뿐 아니라, '해가 갈수록 짙어지는 기억'이 '손톱을 물들이며 빨강 8월로 온다'고 한 화려하고도 생동한 감각이, 가히 정지용의 산뜻한 감각에 애틋한 그리움까지 가미(加味)되어 생의 깊이와 간절함을 더하게 한다.
호운(壺雲) 박항식 시인(1917-1989)은 남원 수지에서 출생하여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고향인 남원 수지에 수지중학교를 건립, 이후 원광대 국문과 교수가 되었다. 1949년 한성일보 신춘문예에 「눈」이 당선된 이래, 〈경향신문〉과 〈조선일보〉에 시조「노고단」과 「문장대」가 각각 재당선되어 기존의 이미지즘(知)에다 동양적 사유의 정신세계를 투입한 지정합일(知精合一)의 서정미학을 구축한 시인이다.
자신의 시를, 한국모더니스트의 대가라 일컫는 정지용 시와 비교해 가면서, '지용의 것은 내려오다가 반짝하고 떨어져 버리는데, 나의 것은 내려오다가 아리잠직하게 승화' 되어 있다고 자칭(自稱)하면서, 지용의 이미지스트적 '지(知)'에다 자신의 '정(精)', 곧 동양적 정신세계를 가미하여 한국 서정시의 차원을 달리하였다.
靑山을 사랑에 눈뜨게 한
도라지꽃 피었네
靑山을 半만 취하게 한
한들한들 도라지꽃 피었네
淸明한 가을날
풀 푸른 내 고향 뒷산에
이쁜 固執으로 도라지꽃 피었네
-박항식,「도라지꽃」전문,
『방호산 구룸』,1981
꿈이 地表를 뚫고
싹으로 올라오면
山이 재채기를 한다.
-박항식,「淸明」에서
한시(漢詩)처럼 간결하고 정치하게, 때로는 노장풍의 산수도처럼 유장하고 정밀하다. 특히 '靑山'과 '도라지꽃', '地表'와 '싹'과의 대칭적 호응 관계는 주객대립의 분리가 아니라, 둘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연기적 불이(不二)의 세계요, 초월과 통합, 음양의 화해(和諧)에서 오는 신비의 세계가 있다. 이러한 호운의 초월과 통합의 정신세계는 이 외에도 '항상 끄트머리로부터 처음이 온다.', '모든 빛깔들은 한 빛깔의 외연으로 하여 내포된다.' (「아침」), '휘파람 소리 듣고 잠자던 봉우리'(「눈III」) 등 그의 시간은 물리적 자연의 시간을 넘어 주객이 하나가 되는 심미적 직관의 황홀경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동양적 정관(靜觀)과 사유의 세계로서 지정합일(知精合一)의 통합이 이룩해낸 한국이미지즘 시의 또 다른 성과가 아니었던가 한다.
/시인·백제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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