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순 감옥 박물관에 휘호 등 전시·한국인 발길 늘어 항일운동 성지로 / 둥산포, 유해 매장 추정지로 유력·보훈처, 잃어버린 시신 찾기 지속
중국 다롄시(大連市) 뤼순감옥은 안중근 의사를 비롯해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선의 항일 운동가들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김월배(49) 다롄외국어대 교수의 도움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매장 추정지를 둘러보고 뤼순일본관동법원 유적지와 중국 관계자 인터뷰 등의 추가 취재를 진행했다.
△뤼순감옥 박물관
뤼순감옥에 입장하면 우측에 동관 입구가 보인다. 바로 옆은 안중근 의사 취의지(就義地:순국장소)이다. 이곳은 안의사가 1910년 순국할 당시 사용되던 뤼순감옥의 초기 형장이다. 나중에 형장이 다른 곳으로 이전되면서 세탁소로 쓰이다가 현재의 안중근 의사 취의지로 복원됐다.
동관은 주로 정치범을 대상으로 하며, 방 한칸당 보통 10명 이상이 수용됐다고 한다. 죄수의 국적도 다양해서 모든 감방 벽에는 한중일 3개 국어로 쓰인 감방규칙이 걸려 있었다.
안 의사는 수감 당시 일본 간수나 관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들의 요청으로 종종 휘호를 써주기도 했다.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기념해 2009년에 건립한 감옥내 추모관과 국제 전시관에서 그 당시 흔적들을 볼 수 있다. 뤼순 감옥에는 안 의사의 감방 외에도 단재 신채호 선생과 우당 이회영 선생이 수감당한 감방들이 특정돼 있다.
뤼순감옥은 일본 운영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감옥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감옥내 면적 2만6000㎡였지만, 외부시설을 전부 합하면 총면적은 22만6000㎡에 달했다. 동시 수감가능 인원은 2000명이었다고 한다.
한국인들의 뤼순감옥 방문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39년간 뤼순감옥 박물관에서 근무하며 안중근 의사에 관한 저술을 남기기도 했던 판마오중(藩茂忠·62) 전 뤼순감옥 박물관 진열주임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의 뤼순감옥 방문이 해마다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며 “정치인들과 학자들뿐 아니라 어린 학생들까지 이곳을 찾는 등 그들의 열정이 인상 깊다”고 전했다. 또 “뤼순은 어느새 항일운동을 기리는 한국인들의 성지가 되었다”고 평했다.
△안중근 의사 매장 추정지
일본 당국은 안 의사 사형 집행후 시신 인도를 거부했다. 당시 하얼빈 영사는 관동도독부에 안 의사 시신을 가족들에게 인도하지 말라는 전문을 보낸다. 유언에 따라 하얼빈에 조성될 안 의사 묘소가 조선 독립운동의 메카로 승화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안중근 뼈대찾기 운동본부 중국지회장이기도 한 김월배 교수의 도움으로 박물관에서 1.2km 남짓 떨어진 둥산포라고 불리우는 안 의사 유해 매장 추정지에 들렀다. 현재 보훈처가 발굴을 추진하고 있다.
김 교수는 “안 의사의 경우 좁은 나무통에 매장한 일반 사형수와는 달리, 넉넉한 침관(寢棺:반듯이 누운관)을 사용하는 등 몇가지 특징이 있다”고 했다. 또 “본격적인 발굴 작업에 앞서 지표투과 레이더 같은 기초조사작업이 선행돼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또한 김 교수는 “광복후 70년이 넘도록 아직도 안 의사님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시지 못하고 있다“며 "일반 국민들께서도 단서가 될만한 관련 사료를 발견하신다면 서울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으로 꼭 보내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뤼순관동법원 유적지
뤼순감옥 박물관에서 남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뤼순관동법원 유적지가 있다.
이곳의 정춘매(44·여) 관리 주임은 “뤼순관동법원도 항일 운동의 역사적 의의가 큰 곳”이라며 “관광객들이 뤼순감옥뿐 아니라 이 곳에도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했다.
안 의사는 이곳에서 2월 7일부터 2월 14일까지 총 8일동안 모두 6번의 공판에 출석했고 2월 14일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이후 안 의사가 항소를 하지않아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그대로 형이 집행된다. 안 의사는 원래 1층 지방법원에서 공판을 받아야 했지만 방청객이 너무 몰려 공판은 300명을 수용할수 있는 2층 고등법원실에서 진행됐다. 안 의사는 여섯 차례의 공판 과정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당위성과 동양 평화론을 역설했다. 2층 고등법원실에는 당시 재판정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동양 평화 염원 이뤄지길
1909~1910년의 동아시아는 격동의 시대였다. 거대한 시대사적 변혁 앞에 적체된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속절없이 몰락해가고 있었다. 특히 조선은 위정자들의 무능과 체제 개혁의 실패로 국운이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동아시아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서구 열강의 틈에서 절치부심하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한반도 제국주의 패권의 기초를 착실히 닦고 있었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이런 서사적 흐름속에 등장했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한 국가와 민족의 존엄을 짓밟는 제국주의 침탈 행위에 대한 그 나름의 단죄였으나, 정작 그가 순국직전 뤼순 감옥에서 제창한 것은 한중일 삼국의 평화로운 공존을 염원하는 동양 평화였다.
약육강식의 격동기에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염원하며, 인접 국가간의 분쟁에 대한 공통의 해법을 성실하게 모색하자는 그의 기본 사상은 지금도 강한 울림이 있다. 그의 생전 소망대로 언젠가 한중일 3국이 평화롭게 협력해 공존공영하는 그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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