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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베로나 축제 '아이다' 주역 소프라노 임세경 "세월 갈수록 더 빛나는 가수로 롱런하는 게 꿈이죠"

伊 여행중 음악 열정 불씨 / 알바 모은 돈으로 유학행 / 심한 인종차별에 좌절도 / 도밍고와의 공연 감동적 / 거장 열정 확인하는계기 / 음색 유지는 연습만이 답

▲ 전북대 개교 70주년 기념 공연에 초대돼 10여년 만에 고향을 찾은 전주 출신 소프라노 임세경씨가 한옥마을 내 위치한 공간 봄에서 앞으로의 포부를 이야기 하고 있다. ·안봉주 기자

2015년 여름,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오페라 축제 ‘아레나 디 베로나’에 한국인 소프라노가 주역으로 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00년이 넘는 베로나 축제 역사상 한국인 소프라노가 주역을 맡는 것은 처음. 당연히 그 주인공에 관심이 쏠렸다. 전주 출신 소프라노 임세경씨(42). 그 이전부터 유럽의 오페라 무대에서 그의 존재는 빛났었지만 베로나 축제 발탁은 놀랍고도 새로웠다. 베로나의 아레나 원형극장은 모든 오페라 가수들에게 언젠가는 꼭 서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그런 영광이 쉽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극장의 특성 상 웬만큼 성량을 갖춘 성악가라도 무대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크지 않은 키에 몸집도 작은 한국인 리릭 소프라노의 등장은 그래서 더 관심을 모았다.

 

그해 리릭 소프라노로는 한국인 최초로 주역을 맡아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비엔나 빈 슈타츠 오퍼 극장의 나비부인 오페라 공연으로 최고의 호평을 받아 다음 시즌 초청까지 받았던 그의 노래는 1만5천석이 넘는 아레나 원형 극장에서 더 빛났다. 거대한 공간에 울려 퍼지는 아름다우면서도 전율을 느끼게 하는 압도적인 성량, 타고난 소리에 배인 서정적 감성과 탁월한 연기의 조화는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관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오페라의 여름밤을 선사했다.

 

유럽과 아시아 오페라 무대를 종횡무진, 타고난 소리와 노력으로 빚어낸 아름다운 노래로 그 자신의 이름 뿐 아니라 한국을 알리고 있는 그를 만났다. 전북대 개교 70주년 기념 공연에 초대된 그는 하루 전날 전주에 왔다.

 

10여년 만에 고향을 찾았다는 그는 밝고 소탈했으며 겸손했다. 2008년부터 꾸준히 국내 무대에도 서왔지만 아쉽게도 고향 무대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었다는 그는 어느 무대보다도 더 설레고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특별한 그의 목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다. 타고난 목소리의 울림은 그만큼 인상적이었다. 울림을 품은 그 소리는 치열한 훈련으로 얻은 공력을 만나 그를 세계적인 성악가로 이끌었을 것이다.

 

‘처절할 정도로 가난한 시절을 딛고 일어섰다는 그의 유학생활’은 그래서 더 궁금했다.

 

-전주는 오랜만에 오신건가요.

 

“10년도 넘은 것 같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동생들도 서울로 오면서 아예 이사를 했거든요. 이모들이 계시는데 아무래도 오고 가는 일이 줄어들더군요. 외국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더 어렵게 되었고요.”

 

-그래도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어서 남다른 그리움이 있지 않나요.

 

“물론이지요. 밀라노에 살고 있는데 늘 어릴 때 먹던 음식이 생각나요. 특히 학교 앞에 있던 베테랑 칼국수가 먹고 싶었어요. 제가 성심여중을 다녀서 학교 앞에 있던 그 분식집 단골이었거든요.(웃음)”

 

-오페라 ‘아이다’ 공연이 10월 말과 12월에 있던데요.

 

“경남오페라단이 한국 출신의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들과 함께 ‘아이다’를 공연하는데 창원과 서울에서 무대를 올립니다. 이정원 이아경 손혜수 씨 등 활발한 활동을 하는 가수들과 한 무대에 서는 것도 즐겁지만 의미가 각별한 것 같아요.”

 

- ‘아이다’는 ‘나비부인’ 못지않게 인연이 깊은 것 같습니다.

 

“나비부인은 작품의 특성 상 동양인 가수를 선호하는 경향 때문에 자주 서게 되는데 아이다는 좀 다른 면이 있죠. 개인적으로는 베로나 아레나 극장에서의 아이다 역을 맡은 이후로 아이다와 더 가깝게 된 것 같아요. 이번 무대는 야외 원형극장인 아레나와는 전혀 다른 조건이어서 성량 보다는 극중 인물에 집중하고 소리도 더 섬세하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놀라운 성량을 갖고 있다는 평을 받는데, 성량은 타고나는 것 아닌가요.

 

“아무래도 바탕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겠지만 훈련으로도 어느 정도는 갖출 수 있지 않을까요. 어쨌든 저는 어릴 때부터 목소리가 크긴 컸어요.(웃음)“

 

-어릴 때 노래 잘한다는 소리도 많이 들으셨겠네요.

 

“그것은 아닌데, 합창단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내가 노래를 좀 하는구나 알게 되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가 전주KBS어린이합창단 모집에 신청했는데 함께 가자는 거예요. 그래서 따라갔는데, 기다리다 잠이 들었나봐요. 선생님이 지나가시다가 너는 뭐 하러 왔냐고 물어보셔서 친구 따라 왔다고 했더니 ‘너도 한번 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별 생각 없이 불렀는데 친구는 떨어지고 저만 된 거예요. 민망한 상황이었어요.”

 

-어린이합창단 활동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군요.

 

“4학년 초부터 시작해 졸업할 때까지 활동했는데, 당시 합창단을 지도했던 강승구 선생님이 성악의 기본을 참 잘 가르쳐주셨던 것 같아요. 그때 공연을 많이 다녔었는데 어린 마음에 참 신나는 일이었어요.”

 

-성악을 전공하게 된 것도 합창단 활동 덕분이겠습니다.

 

“당시는 예술중학교나 고등학교도 없었고, 딱히 주위에 음악을 전공하는 분도 없어 더 이상 공부를 지속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고 3때 옆집에 사는 오빠가 서울대 성악과에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방학 때마다 집에 와서 연습을 했거든요. 하루는 무작정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갔어요. 노래를 어떻게 하느냐고 가르쳐달라고 했죠. 자기도 잘 모르니까 일단 서울로 와보라고 하더라고요. 일주일에 한번 서울대로 지도를 받으러 갔었는데 그때 그 오빠가 동아리 친구들과 상의를 해서 저를 가르쳤어요. 엄마랑 고속버스 타고 올라가 2~3시간 공부하고 되짚어서 오는 생활을 6개월 정도 했죠. “

 

-여러 명이 한사람을 가르치는 특별한 개인지도였군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가르쳐준 분들이 정말 좋은 스승이었던 것 같아요. 발음이 틀리면 사전까지 찾아서 바로 잡아 주었거든요. 다행히 한양대에 합격했지만 기초 없이 대학을 간 셈이 됐죠. 그러니 다른 사람보다 더 노력했어야 했는데 아버지 사업이 잘못되면서 형편이 어려워져 서울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어요. 게다가 아버지가 저를 보러 서울에 오시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는데 2년을 꼬박 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신 것이 대학 4학년 때였어요. 집안 형편이 더 어려워지니 대학원 진학이나 유학은 엄두도 나지 않았죠. 음악에 대한 열정도 없었고, 그저 아르바이트로 대학생활을 지탱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예술가로 성장해온 과정이 더 궁금해집니다.

 

“우연한 기회에 이태리 여행을 갔는데 음악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어요. 여행에서 돌아와 곧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죠. 피아노 학원에서 한 달에 80만원을 받았는데 한 푼도 안 쓰고 천만 원을 모아 유학을 떠났습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환경이었겠습니다.

 

“경제적 부담이 가장 컸는데, 밀라노에 오자마자 어학원부터 등록했어요. 제가 가진 전 재산의 대부분을 수업료로 내야 했으니 두렵기도 했지만 언어가 우선이더라고요. 언어가 해결되지 않으면 일상이 불편해지고 누구에겐가 도움을 청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언어를 먼저 해결해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 때 레슨을 받자고 마음먹었지요. 6개월 동안 전문가 과정 9급까지 마치고 통역사 자격까지 땄습니다. 시에서 운영하는 무료 강습까지 병행해 언어를 해결하고 나니 두려울 것이 없더라고요.”

 

-선택이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어서 가능했던 일 같아요. 유학을 오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언어부터 해결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배우는 일도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어야 제대로 자기 것이 될 수 있으니까요.”

 

-생활은 어땠습니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생활이었어요. 어학원에서 소개한 지하 방에서 지냈는데 난방이 안 되어 외투를 입고 자야했죠. 화장실도 밖에 있는. 노숙자가 따로 없었어요.”

 

-세계적인 소프라노의 화려한 무대 뒤에 그런 시절이 있었군요. 베르디 국립 음악원을 졸업하고 스칼라 아카데미에 들어가셨는데 그때부터는 생활이 조금 나아졌습니까.

 

“그런 셈이죠. 스칼라 아카데미가 원래는 2년 과정인데 저는 3년을 다녔어요. 학비는 무료고 장학금이 매월 한화로 250만원이 나왔는데 레슨을 받으며 충분히 생활할 수 있을 정도였죠. 그러나 정작 공부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웠어요. 지도 교수님이 워낙 인종차별이 심했거든요.”

 

-어려운 과정을 뚫고 합격했으니 실력을 인정받은 셈인데, 인종차별은 뜻밖이군요.

 

“저를 지도하는 선생님이 터키 출신의 소프라노였는데 이 분이 동양 사람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성악을 레슨 받는 2년 동안 내내 ‘너는 왜 들어왔니’ ‘이름은 뭐니’를 듣고 지내야했어요. 이름조차 알고 싶지 않으셨던 거죠. 작은 콘서트 하나도 주어지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마지막 레슨 때 제가 부르는 아리아를 들으시면서 눈물을 글썽이더니 ‘내가 니 진심을 몰랐던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내가 너를 제대로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 1년만 더 다니라’고 하셨어요. 과정을 마치고도 장학금을 그대로 받으면서 스칼라 극장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스칼라 극장의 오페라 단역이 많은 도움이 되었겠습니다.

 

“전화위복 되었죠. 그때 단역만 열편 넘게 했는데 그것이 오늘날 제가 유럽무대에서 활동하게 된 기반이 되었어요. 선생님은 제게 상처도 주었지만 제 인생을 열어준 중요한 분이기도 합니다.”

 

-무대를 넓힌 것은 2007년 이후부터인가요.

 

“극장 도움 없이 나간 것이 그때부터인데 당시에는 용기가 필요했어요. 스칼라 무대의 단역을 거절하기 시작했거든요. 단역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안정된 기반을 가질 수 있는 여건이어서 한번 거절하면 다시는 안 불러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생활이 불안정해지게 되니 결정이 쉽지는 않았어요. 당연히 생황이 힘들어지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혼자 주역을 따내야 하는데 극장 오디션이며 에이전시 오디션을 위해 수도 없이 캐리어를 들고 극장을 돌아다녔습니다.”

 

-그 과정이 오늘을 있게 한 것 아니겠습니까. 유럽에서 임세경이란 이름이 알려진 것은 몇 년 전부터지만, 아무래도 절정은 2015년 베로나 축제의 아이다 역이 아닐까요.

 

“이전에도 좋은 극장에 서긴 했지만 그 해의 비엔나 빈 슈타츠 공연과 베로나 축제가 제 인생의 또 다른 시작이 된 무대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 셈입니다.”

 

-많은 일정이 예정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올해 초 플라시도 도밍고가 이끄는 빈 필과 ‘나비부인’을 공연했던데요.

 

“잊을 수 없는 공연이었어요. 도밍고 선생님은 팔순을 넘겼는데도 자신의 무대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국경을 넘나들면서 공연을 하면서도 리허설을 위해 늦은 밤 다시 연습실에 나오는 열정을 보며 거장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어요.”

 

-워낙 많은 오페라에 출연하셨으니 대부분의 무대가 익숙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하면 할수록 어려운 일이 무대에 서는 일이죠. 악보도 다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보이지 않던 악상기호가 매번 새롭게 보이거든요. 누가 써놓았는지 왜 써놓았는지 보면 볼수록 자꾸 새로운 것이 보이고 소리도 점점 달라지니 제대로 된 소리를 지키려면 연습을 게을리 할 수 없게 됩니다.”

 

-소리는 일정한 시기까지는 원숙하고 깊어지는 것 아닌가요.

 

“나이를 먹으면 나이 먹은 소리가 나기 마련인데, 훈련을 하면 가장 좋은 시절의 소리를 지킬 수 있거든요. 나이가 들면서 내공은 생기겠지만 소리 빛깔 자체가 변하게 되니 맑아지게 하는 것은 노력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죠. 적절하게 컨트롤 하면서 연륜과 내공을 관객들이 느낄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나이를 먹으면서 더 빛나는 가수로 롱런하는 것이 제 꿈이기도 합니다. 그러려면 연습만이 답이겠죠.”

 

그는 노래만 생각하고 노래로 일상을 보낸다. ‘노래를 하지 않았으면 뭘 하며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일상의 반경이 좁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너무 단조롭고 건조한 삶이지만, 그가 집중해 오직 한길만을 걸어온 덕분에 우리는 세계적으로 한국의 이름을 알리는 성악가를 가질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어느 무대에서건 어느 오케스트라건 꽉 찬 소리로 공간을 압도하며 서정적인 빛깔로 관객들을 만나는 그의 소리는 마음을 잡는다. 어려운 여건을 딛고 세계적 성악가로 우뚝 선 그의 삶을 듣고 보니 그의 소리가 더 빛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 전주출신 소프라노 임세경은

 

- 타고난 성량에 연기력 조화로 유럽 각국서 러브콜

소프라노 임세경은 1975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자신이 음악적 재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타고난 그의 소리를 알아본 것은 방송국 어린이합창단 지휘자였다. 전주KBS 어린이합창단에서 노래 부르는 기본을 익혔다. 성악은 초등학교 시절 취미활동으로 끝이 났지만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고3때 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온 옆집 오빠의 노랫소리가 마음을 이끌었다. 서울대 성악과에 다녔던 옆집 오빠는 노래를 배우고 싶다는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본격적인 성악공부를 시작한지 6개월 만에 한양대 음대에 합격했다.

 

대학시절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야 했던 그에게 유학은 언감생심, 안정된 직장을 찾는 것만이 목표가 되었다. 대학 4학년 때 가볍게 떠났던 이태리 여행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이태리의 언어와 도시 풍경, 음악과 극장 등 모든 것이 그의 마음을 끌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피아노 학원 아르바이트로 받는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 이태리 밀라노로 떠났다. 베르디 국립 음악원을 졸업한 직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솔리스트 전문 연주자 과정에 지원했다. 300명을 넘는 경쟁을 뚫고 합격했지만 그의 스승은 2년 과정 내내 인종차별로 그를 냉대했다. 마지막 레슨이 다시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스승은 그가 부르는 나비부인의 아리아를 듣고 ‘너의 진정성을 내가 알지 못했다’며 사과했다. 스승의 권유로 1년 더 스칼라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2년 과정인 스칼라 전문 연주자 과정을 장학금까지 그대로 받으며 1년 더 다닐 수 있게 된 것도 행운이었지만 이미 과정을 마친 그에게 스칼라극장이 오페라 단역으로 그를 불렀다. 그 시절의 경험이 오늘날 유럽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2007년 이태리 도니제티 극장에서 오페라 ‘파리지나’로 데뷔한 이후 아르침볼디, 라 스칼라 극장에서 수십 편의 오페라를 리카르도 무티를 비롯한 세계적인 지휘자들과 공연했다. 타고난 소리와 압도적인 성량, 뛰어난 연기력의 조화로 무대마다 돋보이는 그를 주목한 유럽 각국의 극장들이 그를 불렀다. 세계적인 오페라 잡지들은 ‘전율을 느끼게 하는 성량과 혼연일치된 소리와 연기’를 가진 작은 한국인 리릭 소프라노 등장을 환호하며 반겼다. 2015년엔 한국인 리릭 소프라노로는 최초로 비엔나 빈 슈타츠 오퍼 극장에서 오페라 ‘나비부인’ 주역으로 공연했으며 그해 8월에는 이태리 베로나 오페라 축제의 ‘아이다’ 주역으로 발탁됐다. 아레나 디 베로나 오페라 축제 102년 역사상 한국인으로는 최초였다. 올해 봄과 여름, 빈 슈타츠 오퍼 극장과 베로나 축제에 다시 섰던 그는 독일 헝가리 미국 그리스 공연을 이어왔다.

 

2008년부터 국립오페라단의 대표작을 비롯 국내 오페라 무대도 꾸준히 지켜온 그의 한국 공연은 올해 특히 활발하다. 국립오페라단의 ‘팔리아치’와 ‘외투’에서 열연, 호평을 받은데 이어 10월과 12월, 창원과 서울에서 ‘아이다’를 공연한다. 내년에는 스페인 독일 일본 핀란드 이태리 오페라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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