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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독립현장] 한강 이남 최초 만세운동 군산 3.5운동

3.20 김제 원평 장터 횟불 만세운동도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의 독립이오’하고 답했을 것이다. (백범 김구)

1919년 1월21일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만주 지린의 2.1 무오독립선언·재일 조선유학생을 중심으로 2.8독립선언이 있었다. 이런 움직임은 국민을 하나로 단합시켰고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종교인과 학생중심의 군산 3.5만세운동, 10여명이 3만명 되다.

 

1919년 당시 군산영명학교 모습. 사진제공=군산시 3·1운동 기념관
1919년 당시 군산영명학교 모습. 사진제공=군산시 3·1운동 기념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니 서울·평양·의주·선천·원산·진남포 등 7개 도시에서 만세운동이 동시에 일어났다. 3월 2일 함흥·수안·황주·중화·강서·대동·해주·개성 등으로 확대됐으며 3월 3일 서울에서 치러진 고종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많은 국민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학생중심의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그 날 군산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군산 만세운동은 한강 이남 최초의 만세운동이다.

군산 3.5만세운동은 당시 구암동산에 위치한 군산영명학교(현 제일중·고)를 졸업하고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재학중이었던 김병수 학생에 의해 시작됐다.

그가 민족 33인 중 이갑성 애국지사로부터 독립선언문 200여매를 전달받아 2월 26일 군산에 내려와 영명학교 은사인 박연세(구암교회 장로) 교사집에서 이두열·김수영·고석주·김윤관·김연묵·이동욱·문용기 등을 만나 서울의 독립운동을 은밀히 알리고 군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는 것에 협의했다.

이후 박연세 교사는 같은 학교 교사들과 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문 3500매와 태극기를 만들었고, 3월 6일 서래장날을 기점으로 거사를 준비했으나 5일 새벽 군산경찰서 일본인 경찰 10명이 무장하고 나타나 주모자인 박연세·이두열·김수영 등을 연행해 거사는 좌절될 위기에 놓였다.

이 같은 사태가 벌어지자 당시 표면에 드러나지 않게 활동하던 김윤실 교사는 학생간부들과 긴급회의를 열고 곧바로 시위를 열자고 결의했다.

당시 학생이던 양기철·전세종·김영후·송기옥·이도준·홍천교·고준명·유복섭·오한길·간규언·강인성 등이 앞장서 시위에 들어가니 같은 기독교 계통의 학교인 멜본딘(현 군산 영광중·여고) 여학교의 학생도 합세했다.

또 시민 정문선·김영상·전종식·문재봉·홍종억·전봉신·박동근·임종우·이병관이 합세하며 그 수가 500여명으로 늘었다.

경찰서 앞에 이를 때는 1000여명으로 늘어나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하늘에 사무쳤다.

군산의 기미 3.5독립만세운동은 1903년 2월 미국 예수교 남장로회선교회에서 기독교선교를 목적으로 설립한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교사·학생·궁멀 예수병원 사무원과 구암교회 성도 등 기독교인이 주축이 되어 시작됐다. 이어 천주교·불교·범종교와 시민도 합세했다.

민족의 자주독립을 외쳤던 3.1만세운동은 군산 구암동산에서 3월 5일 발원해 총 28회에 걸쳐 연인원 3만700여명이 참여했으며 사망자 53명·실종 72명·피해인원 195명이 발생했다.

군산의 3.5만세운동은 호남 최초·한강 이남 최초의 거사이며 전북지역 최다수의 순국자가 발생한 만세운동으로 군산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구암교회 건물을 3.1운동 역사공원으로 조성했다. 공원 안에는 100주년 기념관과 추모공원 등이 조성돼 있다.

 

△일경의 제지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 김제 원평장터 독립만세운동

 

김제 원평장터 기념비. 사진제공=군산시 3·1운동 기념관
김제 원평장터 만세운동 기념비. 사진제공=군산시 3·1운동 기념관

당시 김제군에서도 3월 2일 이미 김제읍 천도교구실에 독립선언서가 도달됐다. 교구장 공문학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교인 김봉빈·안백균 등을 통해 죽산·부량 등 각 면에 배포하고 인근 고을에 전포했다.

3월 5일 군산·옥구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크게 전개돼 김제군에서도 지사·청년이 앞장서 연락망을 구축해 연락을 취했다.

3월 4일에는 김제역 대합실에서 독립선언서 20장 등이 발견되고, 6일에는 읍내에서 선언서가 산포되고 운동이 진행되는 듯 했으나 일본 경찰 등에 의해 무산됐고 경계는 더욱 삼엄해졌다.

그러나 도내에서 만세 함성이 매일같이 울려퍼지는 분위기 속 김제군도 잠잠하게 있을 수만은 없다고 판단해 3월 20일 오후 김제 동남단인 수류면 원평리 원평장터를 시작으로 만세운동을 벌였다.

수류면 구월리 청년 배세동은 13일 전주읍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참가하고 돌아와 수류리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일찍이 결심하고 3월 16일 같은 마을 전도명·전도근·전부명·이병섭·김성수 등과 함께 모여 3월 20일 원평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결정했다.

배세동 등의 주요 인물들은 선언서·태극기 제작 등을 준비했고, 이병섭 등은 각지의 동지를 규합하는 연락망을 가동하는 등 업무를 맡았다.

20일 오후 원평장터에서 전도근·전부명 등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줬고 배세동은 9척(약 2m 70cm)이 넘는 긴대에 큰 태극기를 게양해 들고 나서 만국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고 손병희선생 등 33인이 나라의 독립을 선포하였으니 우리도 당당한 독립국민이 될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나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자고 외쳤다.

독립만세가 울려퍼지자 김대희 등 수백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따라 나섰다.

시장 곳곳에서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감시하고 있던 일본 경찰의 무력에 군중은 해산되고 배세동 등 10여명이 잡혀가 6개월에서 1년의 강제형을 당했다.

4월 4일 만경장날에는 만경공립보통학교 훈도·생도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임창무·오연길·장태석·이석재 등은 일찍부터 독립정신을 동기생에게 전했고 익산군 오산면 애국지사 문용기 등과 비밀 연락을 취했다.

4일 정오께 임창무가 3·4학년 생도 모두를 교정에 불러 모아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니 우리도 동참해야 한다”며 태극기를 들고 앞장서 독립만세를 부르니 100여명이 모두 대열에 합류해 독립만세를 부르며 뒤따랐다.

임창무의 만세대열이 시장에 나가자 수백명이 합세해 만세를 불렀다.

순찰 중이던 순사와 승강이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만세대열은 한참동안 시장을 돌며 진행됐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김제경찰서 무장대가 출동해 폭력을 행사하며 제지했고, 결국 대열은 해산되고 주동인물인 임창무 등이 붙잡혔다.

계속되는 독립만세운동은 더욱 강화되는 일본 경찰의 탄압에 의해 좌절됐다. 그러나 애국지사와 애국동포들의 독립염원·구국의 활동은 계속됐다.

그 중 김제면의 조기렵·김환·김성택과 금구면의 송산선·쌍감면의 조용철 등은 정읍의 이헌·부안의 신헌·황해도 활주의 김선복·경남 거창의 임양재 등 독립투사들과 김제·무주·정읍·목포 등 각지에서 동지를 모으고 애국 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는 등 활동을 하다 1920년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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