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4-12-01 15:37 (일)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일반기사

[전북의 독립현장] 임실, 학생 주도 촉발…장수, 장터 중심으로 만세운동 펼쳐

임실 오수지역 3·1 만세운동은 1919년 당시 전국 10대 의거지 중 하나로, 3월 10일 오수보통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촉발됐다.

오수보통학교의 만세운동은 임실 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3·1운동이었다.

장수지역에도 자유와 독립을 선포하는 독립선언문이 전달돼 장터 등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독립을 열망하는 지역민들의 항거는 들불처럼 지역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임실지역

 

임실 3.1운동 기념비.
임실 3.1운동 기념비.

서울에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에서 보통학교 학생들의 의해 3월 10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어린 학생들의 의거에 일본인 교장과 주재소 순사들은 크게 당황해 험한 말로 학생들을 억압했다.

이후 이달 12일에는 임실읍내에서 2000여 명의 군중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임실 장날이었던 이날 오전 10시쯤 시장 한복판에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퍼지자, 모여든 장꾼이 합세해 만세를 불렀다. 태극기가 나부끼고 독립선언서가 배포됐다. 당시 임실읍 뒷산에는 봉화가 높이 올려지며 만세운동이 격화됐다.

오수면과 임실읍에서 촉발된 만세운동은 청웅면, 지사면, 강진면 등 인근 면을 거쳐 남원, 순창, 장수 등 인접지역으로 전파됐다.

3월 23일 오수지역에서 다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기송, 이만의, 오병용 등은 천도교인 및 개신교인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시위 군중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 최대 2000여 명을 헤아렸다.

이들은 시장 내의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과 면서기들에게 같은 민족으로서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이날 저녁 남원헌병분견대와 임실경찰서에서 파견한 무장 병력이 출동해 발포하자 만세 시위대는 일단 해산하였다가, 300~400명씩 무리를 지어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 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한 삼혁당 김영원은 일본경찰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1919년 8월 26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김영원을 비롯해 만세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들은 출옥한 뒤 영춘계(迎春契)를 조직했다.

당시 영춘계에 참여한 오병용, 이기송, 이윤의 등 35명은 ‘밭을 갈면서도 봄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영춘계원 35명 중 21명이 국가유공자로 추서될 정도로 임실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영춘계는 일본경찰의 탄압으로 4~5년 만에 해산됐다.

임실군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념도록 영춘을 간행했다.

이 기념도록에는 임실지역 만세운동 기념비 소개와 함께 국가유공자 목록, 각 지역별 3·1 만세운동 개요, 국가유공자들의 판결문, 국가유공자의 소장 자료, 임실지역 천도교 활동을 알 수 있는 개인소장자료, 기획원고 등이 수록됐다.

 

△오수 만세운동 지도자 이기송

이기송(1888~1939)은 1919년 3월 23일 임실 둔남면 오수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오수리에서는 이미 3월 10일에 보통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돼 임실군 내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그러나 일본인 교장의 압력으로 더 이상 학생들의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이기송은 오병용·이만의 등과 연락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이날 장터에 모인 군중 앞에서 독립운동의 당위성에 대해 호소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기송은 일본경찰에 붙잡혀 7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오수면 둔덕리에 뿌리내린 전주이씨 문중은 이기송을 비롯해 총 16명의 애국지사를 배출했다.

 

△장수지역

 

장수군 3.1절 기념 행사.
장수군 3.1절 기념 행사.

장수 산서면 동화리는 1919년 정봉수 열사를 중심으로 15명의 애국지사들이 지역주민들을 모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쳤던 곳이다.

1919년 3월 19일 인근지역인 임실 지사면의 박정주, 안성섭 등은 동화 장날을 맞아 장꾼들을 격려하며 만세를 부르고 시위행진을 벌였다. 일제는 시위가 격렬해지자, 발포하는 등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어 22일 장수 번암면 노단리 장터에서도 독립만세가 울려퍼졌다. 다음날인 23일에는 산서면 사계리에서 주민 30여명이 만세운동을 벌였다.

장수군은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나라사랑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동화리 괴정마을 입구에 기념비를 건립하고 매년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이와 관련, 장수군은 지난달 1일 산서면사무소와 3·1운동 기념비에서 10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이날 참석자들은 면사무소에서 3·1운동 기념비 구간을 가두행진하며 만세 삼창을 외쳤다.

또 유족 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과 산서중·고등학교 학생들의 3·1절 합창과 만세 삼창도 진행됐다.

 

△민족대표로 한국 불교 수호에 앞장선 장수 출신 ‘백용성’

장수에서 태어난 백용성(1864~1940)은 3·1독립만세운동의 민족 대표이자 어려운 불교 경전의 한글화를 처음으로 시도한 경전 번역인이었다.

3·1운동 당시 백용성은 한용운의 추천으로 민족 대표 33인에 포함됐다. 1919년 3월 1일에 백용성을 포함한 민족 대표들은 서울 종로의 태화관에서 민족 독립을 절규하는 만세삼창을 했다.

이 일로 구금돼 고초를 겪고 1921년 3월에 석방된 백용성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금강경> 을 순 한글로 번역·간행하는 일이었다. 이후 삼장역회를 설립해 수많은 경전을 한글로 번역·간행했다. 1928년에 한글로 된 <화엄경> 을 간행하는 기념비적인 일을 해냈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기획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