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에 세운 영혼의 집
엉뚱한 상상으로 출발해보자. 여기 시집 한 권과 최고급 호텔 식사권 두 장이 놓여 있다. 당신은 하나를 선택할 자격이 있다. 시집인가 식사권인가? 현실적인 사람이라면 식사권에 눈을 반짝거리기 쉽다. 같은 조건이라면 나도 두말없이 식사권을 집어들 것이다. 사는 일이 지독한 현실인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현실의 첨단에 서 있다. 이것이 내가 식사권을 선택한 소박하지만 바람직한 이유이다.
망설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시집 속에 비밀처럼 숨어 있는 찬란한 세계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오래 잊고 있던 꿈과 기억 그리고 고결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식사권보다는 그것을 쥔 내 손이 초라해 보이는 건 당연하다. 식사권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 나는 오랫동안 목말랐고 허기졌으며 쾌적하고 따뜻한 곳을 간절하게 바랐다. 그럼에도 손에 들지 못한 시집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나는 시인을 식사 자리에 초대하는 것으로 타협할 수밖에 없다.
시집을 읽는 일은 시인과 다정하게 대화하는 일이다. 시인의 삶이 곧 시이기 때문이다. 정동철 시인의 시집 <나타났다> 를 읽으면서 줄곧 시인과 마주 앉아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의 시집은 “가난한 씨앗을 묻고 살아온/지금은 빈 까치집, 아무도 살지 않는 집”(‘집’)이었다. “내려앉는 어깨를 가까스로/옛 기억을 기둥삼아 버텨낸 집”(‘허물어져가며’)에서 그는 “조금씩 키가 컸고 담배를 피웠고/콧수염이 자랐고 군대를 갔다 왔다/불안한 어른이 되었다”(‘허공 위에 뜬 집’). 그가 그 시절을 두고 “참 기가 막히게 팔푼이 같은 현실이었지”(‘하전사 김진철’)라고 하는 것을 두고 나는 “당신도 슬픔을 씹어본 적이 있는가”(‘발가락을 씹어봤는가’)라는 날카로운 힐난으로 들었다. “그대/부끄러운 두 눈/푸른 가시로 찔러라”(‘탱자꽃’)는 시구 때문이었다. 이 얼마나 스스로에게 아픈 삶인가. 나타났다>
그렇기 때문에 정동철 시집 <나타났다> 는 슬픔의 독법으로 읽어야 한다. 슬픔의 독법이란 현실적인 삶에 비추어 시를 지극하게 읽는 일이다. 그가 “사람을 사랑하는 일/쓸쓸한 일이라는 것”(‘재회’)이라고 한 것이나 “쓸쓸함은 늘 쓸쓸함 안에 머물고”(‘원형 탈모증’)라고 진술한 것은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슬프다. 이쯤 되면 그의 시집은 최고급 호텔의 식사권으로는 허기를 달랠 수 없는 영혼의 집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영혼이 “희끄무레한 세상 끝까지/혼자 걸어가 보았습니다”(‘곡우’)라고 고백할 때, 마침내 시집이야말로 시인의 집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정동철 시인은 그렇게 ‘세상 끝’에 영혼의 집 한 채를 묵묵히 세워 올리고 있다. 나타났다>
* 문신 시인은 2004년 전북일보와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시와 문학평론이 각각 당선되어 다방면에서 글쓰기를 해오고 있다. 그동안 시집 <물가죽 북> , <곁을 주는 일> 과 문학연구서 <현대시의 창작 방법과 교육> 을 냈으며, 지금은 <문예연구>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문예연구> 현대시의> 곁을> 물가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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