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4-11-28 22:57 (목)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일반기사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황지호 소설가 ‘백석 문학전집 · 시’(서정시학)

막 걷기 시작했다는, 같이 키우는 늙은 개와 어떤 말들을 주고받는다는, 그 개를 형으로 여기는 것 같다는…… 아직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처남의 둘째 아이를 언젠가는 만나겠지요. 제 손으로 마스크를 벗지 않고 여름을 견뎌냈다는 그 작고 당찬 아이를 팬더믹이 끝나면 만날 수 있겠지요. 처음 만난 고모부가 낯설어 사슴 새끼처럼 제 아빠의 다리 사이로 숨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 안아주는 날이 언젠가 오겠지요. 아이가 저를 노나리꾼*이나 멧돼지, 혹은 늙은 곰으로 생각해도 그냥 꼬옥 안아주렵니다. 수염의 순결을 따라 볼 비비는 법을 체득할 때까지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렵니다.

 

국경 봉쇄가 풀리는 그때라면 우리는 같은 집에 머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요. 그 집이 우리 집이 아니더라도, 어느 깊은 산골 마가리*이거나 가난한 목수에게 잠시 빌린 집이어도 우리는 이를 둥지라 여기고 느긋하게 머무를 겁니다. 끼니때마다 제비꼬리, 마타리, 가지취, 고비, 두릅순과 같은 나물, 햇콩두부 같은 순한 것들로 밥을 먹을 겁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땀에 젖은 축축한 셔츠를 칼칼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먹으며 오후의 출출함을 달래렵니다. 늦은 밤 다시 그런 때가 오면 슴슴하고 고담한 국수나 기장쌀로 쑨 호박죽을 나누어 먹겠지요. 온 식구가 후룩후룩 소리를 내며 먹을 것입니다. 그 소리에 낯선 이가 쭈뼛쭈뼛 사립문을 맴돌면 손을 길게 뻗어 고향 사람을 만난 듯 환하게 맞이 하겠습니다. 아니 그냥 그 마을의 의젓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어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수런거리며 나누어 먹겠습니다. 사내들이 섞박지에 찰진 돼지고기를 얹어 따끈한 35도 소주를 나누어 마시며 빈 잔에 다정한 말을 담아 건넬 때 엄마들은 아랫간에서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의 손을 쓸어주며 갑자기 눈물을 흘릴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울어도 괜찮아요.

아이에게 옛 놀이를 가르치렵니다. 꼬리잡기, 가마타기, 비석치기는 괜찮은데 쥐잡이는 사양하겠습니다. 제비손이구손이*를 가르치다가 사타구니에 간지럼을 태우고 밀치고 웃고 뒹굴고 안아주며 체온을 나누겠습니다. 늦은 오후 땅강아지가 울기 시작하거나 시간의 냄새가 바뀔 무렵 쓰렁쓰렁 마실을 다녀오겠습니다. 늙은 갈댓잎이나 여린 버드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지 몰라요. 아이는 볼이 아릴 때까지 피리를 불다가 노을을 본다며 목마를 태워달라고 조르겠지요. 저는 기린처럼 목을 길게 빼주겠지만 혹시 수염을 움켜잡으면 엉덩이를 찰싹 때리렵니다. 엥~ 하고 울면 벌이 깨물었냐고 햇강아지 같은 엉덩이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렵니다. 아이의 발가락이 문득 제 코를 간지럽히면 거리낌 없이 크게 재채기를 하렵니다. 그 재채기 소리가 산 너머 마을에 여우가 태어나는 소리로 들려도, 그래서 저를 교양 없는 사람이나 강낭콩 순을 다 뜯어먹은 노루 새끼쯤으로 여겨도 그냥 내지르겠습니다.

긴 여행의 끝에 식구들이 지치면 잘게 쪼갠 자작나무로 탕약을 끓이겠습니다. 작은 곱돌탕관에 약재를 넣고 토방에 앉아 자작자작 탕약을 끓이겠습니다. 탕약관에서 나는 달큼하고 구수하고 향기로운 내음새와 약이 끓는 삐삐 즐거운 소리가 약보다 더 약이 되겠지요. 아이와 이별하기 전날 밤 돌 속에서 부처를 건져냈다는 아이의 할아버지 이야기와 처남을 큰 바위에 수양아들로 입양시켰다는 할머니 이야기, 그 할머니 할아버지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태몽으로 꾸었다는 크나큰 범, 잉어, 복숭아 이야기, 그 할아버지 할머니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봤다는 벼락을 맞아 바윗돌이 되었다는 큰 살쾡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네들의 힘세고 꿋꿋하고 어질고 정 많은 소 같았던 삶을 아이가 잠들 때까지 해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이 참 묘연합니다. 답답해요. 델타에 이어 엡실론, 세타 같은 낯선 이름의 바이러스가 출몰할까 걱정입니다. 그래서 이제라도 아이에게, 아이의 아버지에게 백석 시집을 보내줘야 할까 봅니다. 낡고 닳고 상처 입은 감각과 감정을 되살리기 위해서, 가슴속 바위틈에서 초생달, 바구지꽃, 짝새, 당나귀 같은 것, 슬픔, 사랑, 희망 같은 것, 그런 것, 그런 이야기들이 다시 샘솟게 하기 위해서 백석 시집을 꺼내야 할까 봅니다. 시집을 읽으며 쌀랑쌀랑 눈을 맞을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다시 생각해야 할까 봅니다.

 

노나리꾼* 소를 밀도살했던 사람.

마가리* ‘오막살이’의 방언

제비손이구손이* 서로 마주 앉아 다리를 엇갈리게 끼우고 손으로 다리를 차례대로 세며 노래를 부르는 놀이

 

-대부분의 단어와 문장을 백석 시인의 시에서 인용했습니다.-

 

황지호 작가는...

전북 장수 출생으로 202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되었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