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마시는 존재에 따라 독이 되고 젖이 되고 약이 되듯. 머문 장소와 형상에 따라 구름이 되고 안개가 되고 바다가 되듯. 한 시인의 붓끝도 닿는 자리에 따라 시가 되고 소설이 되고 역사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물이 외양은 변해도 그 본성은 언제나 물이듯 붓끝이 어디에 닿건 시인의 뜻은 한결같아서 변방의 언어로 이름 없는 풀과 잊힌 민중들을 소환했다.
시인의 삶 또한 그의 해타(咳唾)와 다르지 않아 뜻 맞는 시인들과 함께 시를 쓰고 그 시로 전쟁으로 고통받는 미얀마 문인들을 도왔고. 막 등단해 쭈뼛쭈뼛 말석에 앉아있는 새내기 작가들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술을 따라주었다. 이미 이름이 높고 묵향이 진한 작가들이 문단을 오래 이끌었으니 막 등단해 자리를 잡지 못하고 겉도는 신입 작가들에게 문단 일을 맡겨 생기라면 생기, 변화라면 변화를 이끈 사람도 그였다. 전 전북작가회의 회장 이병초였다. 그리하여 그의 붓은 심술궂어 보이지만 뿌리를 다독이는 바람이었고, 약자를 품는 느티나무의 넉넉한 그늘이자 위로였으며, 죽은 역사를 깨워 산 사람을 위로하는 박수무당의 넋두리였다.
시인의 ‘무릎걸음’ 술잔을 받은 다음날 송구하여 그의 시집 『까치독사』를 ‘내돈내산’하여 읽었고 그 시집을 책갈피 삼아 그의 넋두리이자 역사소설 『노량의 바다』를 읽었다. 시인이 쓴 소설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조사를 아껴 문장을 벼렸고, 적확한 단어를 찾아와 제자리에 앉혔으며, 행간의 여백으로 아련함을 만들어 가끔, 무연히 멈추게 했다. 화려하고 지나친 비유가 없으므로 문장이 여는 길이 분명했고, 플롯으로 서사에 힘을 더해 긴장을 놓지 않게 했으며, 말하고자 하는 바가 칼끝처럼 분명해 에둘러 돌아가지 않게 했다. 책을 덮은 이후의 여운도 길어 쓸쓸함이 버들잎처럼 흘러 노량의 바다까지 닿을 수 있게 했다.
이제 시인이자 소설가인 작가는 시집 『까치독사』 등장했던 ‘들몰댁’과 ‘즈아부지’와 ‘군산댁’과 ‘그 가시내’와 같은 이름 없는 것들을 역사소설 『노량의 바다』에서 노꾼으로, 감시병으로, 피 냄새 나는 군복을 “생선의 포를 뜨듯이 실을 박아 깁고 훌치고 호며감치고 후미벼 공그렸던” 순옥으로 다시 불러냈다. 그들에게 “밥과 나물과 푸성귀가 어우러진 비빔밥의 평등과 상하 구별 없이 너나들이로 퍼먹는 밥의 평등을 수저처럼 쥐어” 주고 싶어 했다. 그것을 작가는 “아버지가 된 자가 해야 할 일” 이라고 믿었다. “김을 매고 베를 짜고 염천을 견디고 난 뒤에 곡식을 거두는 일- 거기에 목숨을 바치다시피 했던 만백성의 역사, 양반층에게 함부로 무시당하고 멸시당했지만, 헐벗고 굶주린 조선 백성이 어째서 조선 역사 발전의 주체가 되었는가를 분명하게 짚어줄 글줄은 어디에 있는가” 분노하며 스스로 먹을 갈아 이 소설을 썼다.
백성의 코와 귀가 소금에 저려질 때 나만 살겠다고 몽진을 떠난 왕. 세한의 소나무 같은 선비들을 죽이고 옥에 가둬 가문과 권력, 부귀와 명예를 지키려 했던 칼 든 신하. 부하들을 승산 없는 전투에 내몰아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능력 없는 장군을 소환했다. 그 소환한 자들을 이 시대 위정자들에게 들이밀며 ‘이것들이 너희 아니냐고 이들처럼 목민해서는 안 된다’ 고 일갈하며 죽비 대신 내리치려고 이 소설을 쓴 것이다. 그것도 시인이 소설을 쓴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황지호 소설가는
202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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