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시’의 작가 게오르규의 내한 강의 중 “예술가는 잠수함 속의 토끼와 같다”는 말을 하였다. 무슨 말이느냐 하면 처음에 제작된 잠수함들은 바다 밑에서 잉여 산소의 계측기가 없는 까닭에 언제 산소가 없어질지를 몰라 그 대책으로 토끼를 같이 태우고 다녔다. 토끼는 산소가 희박해지면 일차적으로 먼저 증상을 보이기 때문에 산소를 채우러 수면으로 부상한다. 여기서 말하는 토끼는 곧 세상을 먼저 예측하는 예술가의 남다른 감각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김성곤 한국일보 논설위원은 ‘예술가들에게’라는 칼럼에서 “이제는 예술가 여러분에게 호소할 차례”라고 했다. 예술가밖에 기대할 데가 없다. 혈액 속에 세균이 득실거리는 패혈증의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악취에 둔감해진 코 썩은 후각을 가지고 아무도 번견(番犬)하지 못하는 세상이 우리의 것이다. 순수는 증류수처럼 실험실에서나 구할 수 있는 불순의 시대, 소독제로서의 알콜이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배신의 시대가 우리의 당대(當代)다. 비리가 윤리가 되었다. 믿을 것이 없다. 이 오염과 불신의 세태 속에서 지금 우리는 예술가 여러분을 믿어 보고 싶다. 지금까지는 모두가 정치 탓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정치만 믿고 있을 것인가. 정치는 점점 무능력자가 되어간다. 정치의 약력(略歷)만으로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현대 문명사회의 다양한 분류(奔流)를 막을 수 없다. 정치가가 다 다스릴 수 있는 나라는 소국민(小國民)이요, 후진국이다. 진화된 나라는 이제 정치가로만 통치하지 못한다. 통치력의 분화시대이다. 예술가가 지배해야 할 영토가 있는 것이다. 에술은 이미 정치의 종속물이 아니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사람을 다스리는 일이다. 정치권력이 인성을 함양하는 것은 교육을 통해서지만 종교에 의탁하는 바가 컸다. 이제 정치가 관할하는 교육도 정교(正敎)가 분리된 종교도 우리 사회에 있어서 인간 형성의 영약(靈藥)이지 못하다. 오늘의 사회 현실이 증명한다. 예술이 나서야 할 때다. (중략) 예술가가 미(美)와 함께 인간의 혼을 존경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이유로든 미의 권위를 실추시켜서는 안되듯이 인간의 정신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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