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기른 머리카락을 자르기 위해 이발소에 갔습니다. 한때는 지상의 목 좋은 곳에 있었지만 흐름 따라 지하 구석으로 밀려난 ‘고도 이용원’.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 적막해 ‘고도’가 ‘고독’으로 읽힙니다. 여러 미용실을 전전하며 전기바리캉에 적응된 몸과 마음이 늙은 이발사의 느릿한 가위질에 안절부절못합니다. 느린 것이 들뜬 것을 잘라내는구나. 주름진 손으로 솎아내는 것이 머리카락만은 아니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한 노인이 들어오십니다. 이발사가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를 합니다.
노인께서 옆자리에 앉아 거울 속의 저를 가만 바라보시더니 “처음 보는 손님이시네.” 인사를 건네십니다. 고개를 끄덕일 수 없어 대답에 웃음을 더해 거울 너머로 보냅니다. 웃음이 표지가 되었던지 노인께서 말씀을 편하게 이어가십니다. 담배를 끊은 이후 밤마다 다리가 저리고 쥐가 나서 고생을 했는데 알고 보니 속옷 때문이었답니다. 담배를 끊어 살이 쪘음에도 예전 속옷을 그대로 입어 골반이 꽉 조여 그리되었던 것이랍니다. 가위로 속옷의 고무줄을 ‘탁’ 자르니 피가 살수대첩의 강물처럼 하류로 흘러가더랍니다. ‘와~ 이분 썰 장난 아니다’ 생각하고 있을 때 이발사께서 노인의 말을 받습니다.
예전에 한 사내가 ‘눈에 핏발이 서고 얼굴이 붉어지는 병’에 걸려 오랫동안 고생을 했답니다. 병원이란 병원은 다 찾아다니고 약이란 약은 다 먹어봤으나 낫지가 않았답니다. 이 병은 더 이상 고칠 수가 없겠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어느 산중에 영험한 명의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답니다. 초옥의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명의가 다가와 사내의 목에 가위를 들이밀더랍니다. 이내 사내 목을 옥죄고 있던 넥타이를 싹둑 자르고 단추 하나를 풀어주더랍니다. 순간, 사내의 고질병이 서리처럼 사라졌답니다. 명의가 자른 것이 비단, 넥타이만은 아니라는 것이 노인의 추정이었습니다.
허리에 파고든 철삿줄을 니퍼로 잘라주자 몸태질 뒤의 울음 같은 애절한 한숨을, 길게 내뱉었던, 뒤뜰의 참죽나무를 생각하고 있을 때 노인께서 또 한마디를 하십니다. 102세 노모께 팬티기저귀를 채워드리는데 틈만 나면 면 속옷으로 갈아입으신다는 것입니다. 면 속옷을 편하게 여기시는 것을 알지만 위생도 그렇고 손빨래가 불편하기도 하여 기저귀를 채워드렸던 것인데……. 그런데 오늘 아침, 노모께서, 인제부터 그만 곡기를 끊겠다고, 나직이 고하시더랍니다. 순간, 노 이발사의 가위질이 멈추었습니다. 제 미간에 뜨거운 것이 울컥 고이고 말았습니다. 노모께서 끊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비단, 곡기만은 아니라는 것이 멈춘 가위질과 미간에 고인 것들의 추정이었습니다.
다시 고도 이용원에 고독(苦毒)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 고독 속에서 문인수 시인의 시 ‘쉬’를 생각했습니다. 전문을 보겠습니다.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하실까 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었다고 합니다. /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 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이발사가 노구의 몸으로 지하에서 지켜내고 있는 그것. 명의가 넥타이를 자르고 단추를 풀어 사내에게 되찾아준 그것. 노인이 담배를 끊고 건강을 되찾아 ‘따’에 단단히 붙들어 매려 했던 그것. 노모가 곡기를 끊어 마저 풀거나, 혹은 이어가고 싶었던 그것.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을 닮은 그것들.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자르며, 노인들께서 부려놓는 인생의 문장들을 추스르며, 고인이 된 문인수 시인의 복간 시집을 읽으며.
황지호 소설가는 202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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