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저자가 17년 동안 예일대학교에서 강의한 교양 철학 강좌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영혼 탐구와 인간 정체성, 죽음과 삶에 관한 탐구, 죽음 직면하기와 자살을 다룬 14개의 장을 비롯해 에필로그까지. 제목에 이끌려 책을 샀다가 눈싸움을 하며 책 읽기를 미루는 동안 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책을 펼치면 영혼에 관한 이야기가 먼저 나오는데 저자는 철학자답게 죽음의 실체를 들여다보기 전,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졌다고 믿는 이원론자들의 견해를 해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질주의자를 자처한 그는 죽음에 관한 사유를 일방적으로 전개하는 대신, 가설과 예시, 반론과 사고 실험 등으로 자신의 논리를 쌓았다. 자아나 영혼을 실체 없는 것으로 보는 저자의 시각이 일부 현대 과학자들의 입장과 닮았다는 것은 인상적이었다. 철학과 과학이 하나의 궤로 달린다는 생각에 평소, 철학과 과학을 바라보던 내 시각이 한참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어쨌든, 나는 아리송하여 멍한 상태로 책을 읽다가 그의 논리를 지지하거나 반박했다. 지지하거나 반박하는 것은 책의 장르에 상관없이 책을 읽은 모든 독자의 유일한 권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지지하고 반박하는 과정을 반복하여 책읽기를 마친 지금 나는 이원론자들의 견해를 빌려 내 손을 떠난 책의 죽음을 알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래서 쓴다. 손에서 떠난 책(육체)은 죽었으며 책 내용(영혼)은 죽어가는 상태로 기억 속에서 밭은 숨을 쉬는 중이라고. 이런 문장을 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면의 한계를 감안하며, 책이 죽었다는 것은 사실일지 모르나 죽음의 당사자인 책이 아니라 나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니 틀린 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냐며 빨리 요점을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그저 이 책을 (전북일보 독자 여러분께) 추천하고 싶은 것이다.
어떤 사람들처럼 나도 선택하기 어려운 일 앞에서 가끔 죽음을 생각한다. 당장이라도 죽는다면 어떤 선택은 조금 쉬워진다. 예를 들어보자. 소설가의 서평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부족함을 자각하며 서평 연재에 동참하고 있던 나는 서평 끝에 덧붙이는 이력으로 공저한 책을 쓰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지면을 내어준 분들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서평을 이어가는 동안 자랑처럼 공저를 이력으로 언급하겠노라 생각한 것이 초심이었다. 그러니까 언젠가부터 공저들을 이력에서 빼고 싶다는 마음과 초심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충돌하는 것이었다. 밝히지 않아도 되는 이력을 밝혀놓고 마음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기질인지 모른다. 그러던 차에 죽음을 본질적으로 다룬 철학서를 읽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죽음을 생각하니, 자신의 부족한 서평과 함께 부끄러운 이력도 그저 과정일 뿐이다. 다만, 진심이 왜곡되지 않으면 족한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전북일보 독자 여러분 중에 셸리 케이건의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읽는 분이 계시다면 필기구 챙기는 것을 잊지 말자. 아주 느린 속도로 책장을 넘기고 중언부언하여 지루한 문장은 건너뛰기도 하면서 밑줄을 긋고 여백에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글을 적는 동안 문득 떠오르는 상념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과 별개로 죽음과 생의 욕망 사이에 숨어 있는 지적 허영이라는 것이 민무늬 백자처럼 소박하게 일상으로 끼어들지 모른다.
오은숙 작가는
202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공저로는 <1집 스마트소설>, <지금 가장 소중한 것은>, <2021 신예작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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