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3월 20일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무장에서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을 시작하면서 내놓은 포고문이다. 대략 400여자의 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본은 확인되지 않으며, 모두 원본 혹은 누군가 필사한 것을 다시 베껴 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각 자료에 소개된 <포고문>의 내용은 거의 동일하지만 자료에 따라 일부 글자에 차이가 있다.
<포고문>에는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게 된 배경과 목표 등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동학농민군의 생각이나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만큼 먼저 전문을 번역하여 소개한다.
<무장포고문>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사람에게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과 부자의 관계는 가장 큰 인륜이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충직하며, 아버지가 자애롭고 자식이 효성스러운 뒤에야 나라와 집안이 이루어지고 끝없는 복이 미칠 수 있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자애롭고 총명하며 슬기롭다. 현명하고 어질며 정직한 신하가 밝은 임금을 보좌한다면 요순(堯舜)의 덕화(德化)와 한(漢)나라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치세도 날짜를 손꼽으며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하된 자들은 나라에 은혜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한갓 벼슬자리만 탐내며 (국왕의) 총명을 가린 채 아첨을 일삼아 충성스러운 선비의 간언을 요사스런 말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도적의 무리라 일컫는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들을 수탈하는 관리들만 득실대니 인민들의 마음은 날로 변하여 들어와서는 즐겁게 살아갈 생업이 없고 나가서는 제 한 몸 간수할 방책이 없다. 학정은 날로 더해지고 원성이 이어지며,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분별이 드디어 무너져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관자(管子)가 말하기를 “사유(四維)[예의염치(禮義廉恥)]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나라가 곧 망한다.”고 하였다. 바야흐로 지금의 형세는 옛날보다 더욱 심하다. 공경(公卿)으로부터 방백수령(方伯守令)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단지 남몰래 자신을 살찌우고 제 집을 윤택하게 하는 계책만 생각하고, 벼슬아치를 뽑는 일을 재물이 생기는 길로 여기며, 과거 보는 장소를 온통 사고파는 장터로 만들어 허다한 재화와 뇌물이 국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의 창고를 채우고 있다. 국가에는 쌓인 부채가 있는데도 갚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교만하고 사치하며 음탕하게 노는 데 거리낌이 없어서 온 나라가 어육이 되고 만백성이 도탄에 빠지니 참으로 지방관들의 탐학 때문이다. 어찌 백성들이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약해지면 나라가 멸망한다. 그런데도 보국안민의 방책을 생각지 않고 시골에 저택이나 짓고 오직 저 혼자서 살 길만 도모하면서 벼슬자리만 도적질하니 어찌 올바른 도리이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시골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백성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농사지어 먹고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살아가고 있으니 국가의 위기를 좌시(坐視)할 수 없어서, 온 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합치고 많은 백성들이 상의하여 지금 의(義)의 깃발을 치켜들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생사의 맹세로 삼았다. 금일 이러한 광경은 비록 놀랄만한 것이지만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각자 자신의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여 모두 태평성대를 축원하고 다 함께 성군(聖君)의 교화를 누릴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다.
1892년 10월부터 1893년 4월에 걸쳐 교조신원운동과 척왜양운동을 전개하였던 전봉준과 호남지역의 동학지도자들은 1893년 말부터 정부를 개혁하기 위해 새로운 계획을 구상하고 추진했다. 그것은 바로 군현 단위의 봉기를 확산하고 규합하여 전라도 전 지역의 봉기, 나아가 전국적인 농민봉기를 추진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을 잘 보여 주는 것이 1893년 11월에 만들어진 사발통문 거사계획(“⑥세기를 넘어선 미스터리, 사라진 사발통문의 기록을 찾아서” 참조)과 1894년 1월 10일 일어난 고부농민봉기이다.
동학농민혁명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첫 단계가 바로 고부농민항쟁이었지만, 전봉준의 뜻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인근 읍의 호응이 충분히 일어나지 않았다. 2월 20일경에는 봉기를 전라도 전역으로 확산하기 위해 “각 읍의 군자(君子)들은 한 목소리로 의기를 내어 나라를 해치는 적을 제거하여 위로는 나라를 돕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자”는 격문을 전라도 각 군현으로 띄우기도 했지만, 인근 읍의 호응은 거의 없었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부하 50여 명만 거느리고 고부를 빠져나가 무장의 손화중에게 갔다. 이 때 전봉준과 손화중은 전국 규모의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기로 합의한 것으로 보인다. 3월 10일경부터는 전라도 각지, 그리고 일부 다른 도에서도 동학농민군들이 합세해 오기 시작하였다. 모여든 농민군이 4,000여 명에 이르게 되자 전봉준 등 지도부는 드디어 3월 20일에 무장에서 <포고문>을 발포하고 동학농민혁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포고문>은 동학농민군의 생각과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까지 이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도 거의 없었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도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이는 그 동안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가 ‘반봉건’ 근대화나 ‘반외세’ 민족주의적 성격을 강조하는 시각에서 이루어져 왔다는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언뜻 보더라도 <포고문>에는 근대지향성과 거리가 먼, 유교적 이념과 언어가 매우 많을 뿐만 아니라 ‘반외세’와 관련된 내용도 전무하다.
그러나 <포고문>에는 동학농민군의 생생한 현실진단과 지배층에 대한 비판이 매우 선명히 제시되어 있다. 국왕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공경대부 이하 방백 수령들이 가장 중요한 책무인 인정을 방기고 가혹한 정사를 펴기 때문에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국가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현실진단을 바탕으로 농민군들은 비록 자신들이 시골에 사는 평범한 백성[草野遺民]에 불과하지만, 국가의 위급함을 구하기 위해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자”는 의기(義旗)를 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농민군이 스스로를 “보국안민”의 주체로 자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자각이 있었기에 일본군의 침략행위가 가시화하자 나라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근대지향적인 성격만 부각시키는 동학농민혁명 이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기후위기와 환경파괴라는 냉엄한 현실이 잘 보여주듯이 근대는 더 이상 추구의 대상만이 아니다. 지금은 오히려 근대를 넘어서는 방안을 고민해야 될 시점이다. 동학농민군들의 생각 가운데는 ‘근대’와 거리가 먼 것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근대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