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부는 정부군과 지방 행정조직을 동원하여 동학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기록물을 생산하였다. 이들 기록물에는 조선 정부의 논의과정을 기록한 문서, 진압군이 작성한 공문서와 보고서, 진압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동학농민군의 판결문 등이 포함되어 있다. 동학농민군 자신은 많은 유물을 생산하지 못했지만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였던 조선 정부 및 조선 정부가 편성한 진압군이 동학농민군에 대한 많은 기록을 남겨 주목된다. 형사재판원본(刑事裁判原本)은 조선 정부에 체포되어 처벌받은 동학농민군 다수에 대한 재판기록이다. 특히 동학농민군 최고지도자인 전봉준의 판결선고서는 동학농민군의 지향과 인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기록에는 평안도 강계부 관찰사 조승현 등 6명의 을미의병 관련 고등재판소 판결문도 수록하고 있지만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관계가 없으므로 표 설명문에서는 제외하였다.
형사재판원본은 갑오개혁 시기 설치된 법무아문 권설재판소, 법무아문 임시재판소, 법무아문 고등재판소, 특별법원, 고등재판소, 대한제국 시기의 고등재판소, 평리원의 판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판결문에서는 동학농민군의 활동을 ‘동요(東擾)’로, 참여자들을 ‘비도(匪徒)’ 동도(東徒)‘ ’비류(匪類)‘ ’동비(東匪)‘ ’동학배(東學輩)‘로 그 지도자를 ’비괴(匪魁)‘ ’동학거괴(東學巨魁), 농민군 토벌을 ’토비(討匪)‘ 등으로 비하하고 있다. 그들의 활동내용도 매우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전봉준, 손화중, 서장옥,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 최시형 등 총 211명의 최종 판결 선고서가 포함된 판결기록으로 동학농민군 및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자료이다. 농민군 진압에 소홀하였거나 결탁한 일부 지방관도 처벌을 받았다. 2024년 8월 5일 현재 공식 등재된 동학농민군 참여자는 3,817명으로 이 판결선고서에 기재된 관련자는 전체의 18.09%에 불과하다.
이 기록에서 1895년의 초기 선고에는 경성주재 일본영사 우치다 사다츠지(內田定槌)가 입회 서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학농민군은 정부와 민병대와의 전투 과정에서 전사하거나 체포되어도 심리와 판결 없이 현장에서 총살ㆍ참수 및 효수ㆍ타살, 원한에 의한 사살(私殺) 등으로 즉결 처형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고 관련 기록도 매우 소략하게 남아있다. 따라서 형사재판원본은 1894~1895년 동학농민군 진압과 그 이후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기까지도 이어진 농민군 개별 인물들의 활동과 정부의 체포와 심리와 재판 선고 처벌 등을 이해하는 데도 역사자료로서의 의미는 매우 크다. 이 자료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홈페이지에서 이미지를 포함한 원문 텍스트와 번역문을 확인할 수 있는데 ‘동학관련판결선고서’로 되어있다. 문서 원본은 국가기록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아래의 표는 전북일보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동학농민군 관련 판결선고서의 핵심내용을 추려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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