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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⑮우금치전투를 상세히 기록한 '공산초비기(公山剿匪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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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초비기> 표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공

△공주 우금치전투의 관군 기록

전봉준 장군은 우금치에서 4차례 접전했다고 말했다. 1895년 2월 9일 첫 번째 문초를 받을 때 “두 차례 접전 뒤 1만여 명의 군병을 점고한 즉 남은 자가 불과 3,000여 명이요, 그 뒤 또 두 차례 접전한 뒤 점고한 즉 불과 500여 명”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우금치전투는 4차례의 전투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공산초비기>는 40차에서 50차에 걸쳐 벌어진 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 군관이 군사를 나누어 우금치와 견준봉 사이에이 산허리에 나열하여 일시에 총을 발사하고 다시 산속으로 은신하였다. 적병이 고개를 넘으려고 하자 또 산허리에 올라 일제히 발사했는데 40∼50차례를 이와 같이 하였다(又登脊齊發 如是者 爲四五十次). 시체가 쌓여 산에 가득하였다.” 

한 차례의 접전에서 10여 차의 공격이 이루어졌다. 우금치를 넘으려고 하면 일본군과 관군이 일제 사격을 가해서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고, 다시 넘으려고 시도하면 사격을 가해왔다. 동학농민군은 죽고 또 죽어도 고지에 숨어있는 적을 공격하고 또 공격했다. 그리고 쓰러졌다. 

얼마나 많이 희생했으면 “시체가 쌓여 산에 가득하였다.”고 했을까? 이러한 전투 상황은 실제 경험이 아니라면 쓸 수 없는 표현이었다. 그렇지만 <공산초비기>의 필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쓴 사람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전투를 요약 정리한 내용으로 보아 상황 파악이 가능한 인물이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금치전투를 기록한 주요 사료인 <공산초비기>

공주성 공방전은 여러 자료가 기록하고 있다. 민간 자료는 간략한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관군 문서가 비교적 자세하다. 관군 자료가 <선봉진일기>, <순무선봉진등록>, <순무사정보첩>, <갑오군정실기> 등이다. <선봉진일기>와 <순무선봉진등록>은 출정군을 지휘한 선봉장 이규태가 주고받은 공문서를 모은 것인데 여기에 우금치전투의 1차 자료가 들어있다. 

양호도순무영은 병인양요 당시의 기보연해순무영(畿輔沿海巡撫營) 전례에 따라 편제했는데 출정군 지휘관은 달랐다. 기보연해순무영은 중군 이용희가 출정군을 지휘했지만 양호도순무영의 중군 허진은 출정하지 않았다. 대원군파라고 일본 공사관에서 꺼렸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출정군을 지휘한 이규태의 선봉진 기록과 순무사 보고 내용이 1차 자료가 되고 있다. 

일본군의 전투보고서는 후비보병 제19대대의 보고 계통인 남부병참감을 거쳐 히로시마대본영 병참총감에게 직보되었다. 대본영 기록에는 동학농민군 관련 보고가 생략되고 있으나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많은 내용을 전재하고 있다. 

일본 정권의 실력자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공사로 온 9월 이후 일본군의 진압을 관장한 현지 실권자였다. 이노우에는 고종을 압박해서 갑오개혁을 강요하는 한편 청국과 전쟁에 긴요한 군용전신을 단절시킨 동학농민군을 제거하려고 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각종 보고문서가 들어갔는데 우금치전투 전후의 보고서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우금치전투의 핵심은 모두 빠져있다. 우금치전투뿐 아니라 일본군이 책임이 있는 학살 상황을 기록하지 않거나 희생자 수를 줄이는 사례가 적지 않다. 따라서 우금치전투의 실상을 파악하는 자료로서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은 결함이 있다. 

동학농민군의 자료는 <균암장 임동호 씨 약력>이 자세하다. 동학농민군은 훗날 동학사 관련 책을 펴낼 때 기록한 우금치전투는 구체적인 내용 없이 줄거리만 대충 설명하고 있지만 경기도 여주 출신인 임동호가 술회하는 기록은 도움이 된다. 다만 젊은 동학농민군의 제한된 정보와 시각으로 인해 우금치전투 전반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공산초비기>가 갖는 사료로서의 중요성이 두드러진다. 물론 관군의 시각에서 기록한 자료이기 때문에 다른 자료와의 교차 검증과 지형 등을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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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초비기 이인지역(利仁之役).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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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초비기 효포지전 (孝浦之戰).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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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초비기 우금지사(牛金之師).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공

 

△공주공방전은 이인전투 · 효포전투 · 우금치전투

<공산초비기>는 동학농민군의 3차에 걸친 전투를 지도와 함께 기록했다. 이인전투와 효포전투, 그리고 우금치전투이다. 이인전투는 손병희 통령의 북접농민군이 싸운 전투이고, 효포전투는 남접농민군이 벌인 전투이다. 우금치전투는 남북접농민군이 일제히 우금치와 견준봉, 그리고 봉황산 일대에서 전개한 전투이다. 

이인전투는 공주성 서남쪽 이인역에 있던 북접농민군을 스즈키 아키라(鈴木彰) 소위가 거느린 1개 소대(<공산초비기>엔 100명으로 표기)와 구완회의 충청 감영병, 서산군수 성하영의 경리청 병대가 공격해서 벌어진 전투이다. 관군을 정면에 세운 일본군이 엄폐물 뒤에 숨어서 공격한 상황이 잘 드러난다. 

효포전투는 동쪽 효포로 진격해서 공산성 방향으로 돌아 감영을 공격하려는 북접농민군을 이인에서 돌아온 서산군수 성하영과 백낙완의 경리청 병대가 공격한 전투이다. 고지에 올라가서 사격을 가하자 남접농민군이 후퇴해서 상황이 종료되었다. 

두 전투는 순무영 선봉장 이규태가 공주로 들어오기 이전에 충청감사 박제순이 통제한 전투였다. 한창 전투 중에 군호를 내려 이인에서 관군을 불러들인 충청감사에게 불만을 표하는 기록도 있다. 

한 달여 뒤에 벌어진 우금치전투는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의 서로분진대가 공주에 들어와 남북접농민군에게 매우 불리했다. 일본군 대위 모리오 마사이치가 이끈 일본군은 3개 소대였다. 당진 승전곡 전투에서 밀린 1개소대가 홍주성 방어에 가세해 있었다. 이어 순무영 선봉장 이규태도 통위영 병력을 지휘해서 감영에 들어왔다. 

우금치 일대를 방어한 경군과 감영병은 모리오 대위가 장악했다. 선봉장의 위상을 가진 이규태는 모리오 대위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려고 했다가 뒤에 후비보병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 소좌에게 호된 질책을 받는다. 

 

△우금치전투의 분투와 감투 의지는 민족의 이정표

제국주의 열강이 세계 각지를 침략한 시기에 강력한 현지민의 항쟁이 여러 지역에서 벌어졌다. 그중에서 아프리카 남부의 줄루전쟁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1879년에 3만 5000 명의 줄루전사가 이산들와나에서 1만 4000여 명의 영국군과 이에 협력한 원주민 병사를 제압했다. 그렇지만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일방적으로 패배하고 식민지가 되었다. 용감한 병사가 많아도 무기가 열세하면 어쩔 수 없었다. 

동학농민군은 죽음을 무릅쓰고 우금치를 오르고 또 오르다가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후퇴해야 했다. 다시는 그처럼 싸울 수 없었다. 그러나 우금치의 분투와 감투 의지는 시대의 이정표가 되었다. 외적의 침략에 맞서려면 우리도 우수한 무기를 가져야 한다는 교훈도 얻었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침략과 반침략 투쟁에서 우금치전투는 뚜렷한 위치를 차지한다. 또한 우금치전투의 처절한 희생은 한국인이 현재를 살아가는 당당한 동력이 되고 있다. 귀중한 기록유산인 <공산초비기>는 규장각에서 그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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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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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기록물 #공산초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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