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정숙인 소설가 - 김승옥 소설 ‘무진기행’
「무진기행」은 <무진으로 가는 버스>, <밤에 만난 사람들>, <바다로 뻗은 긴 방죽>,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와 바람은 무수히 작은 입자로 되어 있고 그 입자들은 할 수 있는 한, 욕심껏 수면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되었다. 햇볕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 가지만 합성해서 수면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지 않았던 엉뚱한 생각을, 나는 무진에서는 아무런 부끄럼없이, 거침없이 해내곤 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제 점점 수군거림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으리라.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리면서, 나중에 그 소용돌이 밖으로 내던져졌을 때 자기들이 느낄 공허감도 모른다는 듯이 수군거리고 또 수군거리고 있으리라. 「무진기행」의 나에게 무진은 애써 지우고 싶은 자기이며 잊고 있었던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는 곳이다. 무진은 어둡던 청년시절과 자신을 닮은 이들이 여전히 그들만의 삶을 영위하는 곳이기도 하다. 김승옥의 인물들에게 생활이란 남들이 별 생각 없이 예사로 사는 그런 생활이며, 「무진기행」은 생활과 자기 세계 사이의 갈등이 대립되는 세계를 보여준다. 바다는 상상도 되지 않는 먼지 낀 도시에서, 바쁜 일과 중에, 무표정한 우편배달부가 던져주고 간 나의 편지 속에서 쓸쓸하다라는 말을 보았을 때 그 편지를 받은 사람이 과연 무엇을 느끼거나 상상할 수 있었을까? (중략) 내가 그 바닷가에서 그 단어에 걸어보던 모든 것에 만족할 만큼 도시의 내가 바닷가의 나의 심경에 공명할 수 있었을 것인가? 아니 그것이 필요하기나 했었을까? (중략) 그 대답을 아니다로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무진은 근대적 가치와 전통적인 가치가 혼재된 공간이며, 바빠도 서툴게 바쁜 곳일 뿐 완전한 도시적 성향을 갖추지 못한 곳이다. 윤희중은 무진에서 만난 조, 박, 하인숙에게서 과거와 현실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게 되고, 실패와 환멸의 기억을 되새긴다. 무진을 떠나며 느끼는 부끄러움은 자신이 진정 원하던 세계를 선택하지 못하고 생활로 귀환하는, 환멸의 순환 고리를 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인 것이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 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윤희중이 아내인 영의 전보를 받고 갑자기 무진을 떠나게 되면서 하인숙에게 편지를 쓰지만, 이내 찢어버리는 행위는 독자를 당황스럽게 한다. 독자는 윤희중이 결국 부끄러움을 느끼며 무진을 떠나는 결말에 이르러서야 작가가 텍스트 안에 감춰둔 장치를 재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광주 역구내를 빠져나오며 본 미친 여자의 비명을 들으며, 어머니에 의해 골방에 격리되어 의용군 징발과 국군의 징병 모두를 기피한 후 스스로를 모멸하고 오욕(汚辱)을 견디던, 무진의 골방에서 쓴 일기에 제가 지금 미친다면이라 쓴 문구를 떠올렸던 것과 하인숙이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소리에 시체가 썩어가는 듯한 냄새를 떠올리는 태도는 윤희중이 무진에서 만난 하인숙을 청년시절의 자신과 동일시하는 관계였음을 들추게 한다. 저자가 텍스트 읽기를 유도하고 독자가 몰입하게 되는 지점은 의미생산의 순환이 무한하다. 작가 김승옥은 419, 516 직후의 한국문학에서 반짝이는 별이었다. 감수성의 일대 혁신이었고 문장의 일대 파격이었다. 전후 1960년대 초반, 생존만이 절대가치였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도덕적 가치도 양보해야 하는 사람들로 들끓었던 전후 현실에서는 인간다운 삶의 형식을 위한 문제의식이 필요했다. 그의 소설은 생존을 위한 윤리적 물음에 왜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너무나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말한다. 1964년 발표이후 60여 년이 지나는 지금도 「무진기행」이 현재형으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80년 518 민중항쟁 이후 절필을 하고, 이후 뇌졸중으로 잃은 말 대신 필담을 나누는 소설가 김승옥을 고라니가 뛰어노는 순천만에서 만날 수 있다. 그는 순천문학관의 집필실과 서울 본가를 오가며 무진을 새롭게 만나게 될 우리를 기다린다. 무진에서의 그의 세계는 지금도 여전하지 않을까. 419, 516은 저에게 역사는 집단적 폭력에 의해서 이뤄진다는 실증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저에게서는 절대가치에 대한 믿음을 뒤흔들어 버렸습니다. 모든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상대적인 세계라면 행위의 결정권자는 나의 욕망 또는 나의 이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김승옥, 『싫을 때는 싫다고 하라』 /정숙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