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⑬후백제 초기 유적지 순천·여수·광양 일대
동아시아의 해상왕 장보고가 암살 당한 후 서남해안은 해적들로 들끓었다. 하지만 이미 국운이 기울어진 신라 조정은 이를 통제할만한 힘이 없었다. 이때 신라군에 입대한 견훤왕은 서남해를 방수(防守)할 임무를 띠고 이곳에 파견되었다. “장성하면서 체격과 용모가 뛰어나게 기이했고, 뜻과 기상이 빼어나서 평범하지 않았다. 군대를 따라 왕경(王京)에 들어갔다. 서남해로 부임하여 수자리를 지켰는데 창을 베고 적을 기다렸다. 그 용기가 항상 사졸의 으뜸이 되도록 일하였기에 비장(裨將)이 되었다.”<삼국사기> 권 50. 견훤전 견훤왕은 수도인 경주에서 강주(康州 진주)를 거쳐 순천지역에 부임했다. 경상남도 서부지역인 강주를 거쳐오는 동안 따르는 무리가 대규모로 불어나면서 처음으로 신라에 반심(叛心)을 품고 신국가 건설의 꿈을 키웠다. 이때가 889년으로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이곳에서 3년 동안 세력을 키운 후 892년 무진주(武珍州 광주)로 옮겨 나라를 세우게 된다. 서남해안지역, 즉 순천과 여수 광양 등 전남 동부는 견훤왕이 후백제 건설의 초기 토대를 쌓은 곳이다. 이곳 일대를 취재하기 위해 일행은 전주를 출발해 순천으로 향했다. 새벽까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듯 쏟아붓던 장대비도 차츰 약해지더니 순천에 도착하니 딱 그쳐주었다. 일행으로 갔던 송화섭 교수(전 중앙대)가 “그것 봐라. 내말이 맞지 않느냐”고 어깨를 으쓱한다. 출발 전, 비를 걱정하자 “내가 가면 비가 그친다”고 장담했던 터여서 한바탕 웃었다. 일행은 순천대박물관에서 최인선 교수를 만나 동행키로 했다. 최 교수는 대학박물관을 만들고 관장으로 7년간 재직한 바 있다. 이때부터 전남 동부 일대의 유적 발굴은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먼저 일행은 박물관에 들러 설명을 들었다. 고고역사실에는 전남 동부지역의 구석기 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유물과 유적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게 전시해 놓았다. 물론 이 중에 눈길이 간 것은 백제와 후백제 관련 유물이었다. 최 교수는 고흥반도와 여수반도 사이의 득량만과 순천만, 광양만 등을 가리키며 이 일대의 중심은 순천이었다고 강조했다. 최근 ‘여수 밤바다’ 등 관광지로 뜨고 있는 여수는 조선 500년 동안 잠깐을 제외하고 폐현(廢縣)이 돼 순천 관할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순천의 별호는 승평(昇平) 사평(沙平) 평양(平陽) 강남(江南) 승주(昇州) 등 11개에 이른다고 귀뜸했다. 이어 검단산성, 해룡산성, 마로산성, 봉화산성, 옥룡사지, 금둔사지 등과 이와 관련된 고분, 부도, 기와 출토 유물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전시물 중 보물로 지정된 금둔사지 석불비상과 석탑은 후백제 시기인 907년에 조성됐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불탑형 부도라고 해서 기억에 남았다. 일행은 박물관을 나와 해룡산성- 마로산성- 봉화산성 순으로 답사코스를 잡았다. 이들 산성은 견훤왕이 서남해안 방수군으로 왔을 때 주둔했을 가능성이 높아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시간이 나면 여수 진례산까지 가기로 했으나 불발로 그쳐 아쉬웠다. 우선 찾은 곳은 해룡산성(海龍山城). 해룡산성은 명칭에서부터 바다냄새가 묻어났다. 순천시 홍내동, 홍두·내동·통천마을 일대에 위치한 이 산성은 국가정원 1호로 지정된 순천만의 초입에 자리잡고 있다. 반달(半月) 모양의 토성으로 해발 76m의 높지 않은 지형이다. 후백제 당시 승평항으로 비정되는 내동마을 등을 보호하기 위해 축조되었는데 일제때 간척 이전까지 주변이 모두 바다였다고 한다. 둘레가 2085m에 이르는 꽤 큰 규모의 성으로, 백제 후기에 초축되었으며 후백제때 리모델링 되었다. 고려시대까지 방어 시설 기능과 읍치(邑治)의 행정적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해룡산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 이 지역 대호족 박영규(朴英規)다. “박영규는 강남군(江南君)의 후손이다. 견훤의 사위였고 이 땅의 군장(軍長)이었다. 죽어서 해룡산신이 되었고(옛날에는 사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순천박씨의 중시조가 되었다.”<강남악부> 박영규 가문은 일찍부터 순천만 일대에서 해상활동을 하는 유력한 호족세력이었다. 견훤왕이 이 일대에서 세력이 커지자 혼인관계 등을 통해 최측근이 되었다. 나중에 장인인 견훤왕이 고려에 귀부(歸附)하자 그를 따라 귀부해 출세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그가 이룩한 중앙에서의 성공은 당대에 그친 것으로 보인다. 고려 광종(947-975)이 왕권강화 정책으로 그의 외손 두명을 죽인 것으로 보아 그렇다. 그럼에도 순천에 남아있던 순천박씨 일족은 조선시대까지 지역 유력자로서 번성을 구가했다. 해룡산성은 2002년 순천대박물관이 지표 및 시굴조사를 한 게 전부라고 한다. 대부분 경작지와 민묘로 뒤덮여 있고 여름철이라 그런지 수풀이 무성해 성벽조차 보이지 않았다. 위상이나 중요성에 비해 대접이 소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발굴 등을 통해 국가사적으로 지정하고 순천만 국가정원과 연계해 역사공원화하는 게 시급해 보였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마로산성. 이 성은 광양시 광양읍 해발 208m의 마로산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 산성이다. 섬진강 하구와 광양만 등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탁월한 입지다. 둘레는 550m에 불과하지만 순천대박물관이 2001∼2006년 5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해 기와와 토기 등 많은 유물을 수습했다. 성곽 일부를 복원해 놓았는데 치(稚)가 눈길을 끈다. 치는 성곽에 바짝 붙어 접근하는 적을 정면 뿐 아니라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보다 바깥쪽으로 돌출하여 쌓은 시설로, 후백제 때 처음 도입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수준이 높아진 것이다. 또한 산성은 무엇보다 물 확보가 중요하다. 그래서 집수정을 설치하는데 규모가 꽤 큰 방형(方形)과 원형(圓形) 6개를 볼 수 있었다. 비가 많이 와 물이 차 있었지만 보존 상태가 양호했다. 또 특이한 것은 흙으로 만든 말 인형인 토제마 300여 점이 출토된 점이다. 바다로 나가기 전 제사의례를 행하는데 사용한 것으로 머리나 꼬리를 잘라 주변에 뿌린 것이라고 한다. 마로산성을 뒤로 하고 일행은 다시 순천 봉화산성으로 향했다. 이곳은 순천시민들이 산책코스로 애용하는 곳 중 하나다. 정상까지 올라가는데 상당히 멀어 땀을 흠뻑 쏟았다. 봉화산성은 후백제 시대 성황당이 있어 성황당산으로 불렸다. 경호실장 격인 인가별감(引駕別監)으로 견훤왕을 섬겼던 김총(金摠)의 사당이 있었으나 조선시대 들어 봉화대를 조성하면서 이름이 봉화산으로 바뀌었다. 봉화산성에 대해서는 문헌상 기록이 없으나 2018년 순천대박물관에서 시굴조사를 실시해 명문기와 등을 수습했다. 그러면 견훤왕은 무진주에 입성하기 전 889∼892 3년 동안 어디에 주둔해 있었을까? 이와 관련해 이도학 교수는 “순천만을 끼고 있는 해룡산성은 광양만 등지의 마로산성이나 검단산성을 관하 진성(鎭城)으로 예하에 두었던 것”이라며 “견훤왕이 무진주에 도읍하면서 자신의 근거지였던 해룡산성 일대를 박영규 가문에게 맡긴 것”으로 추정한다. 강봉룡 교수는 김총을 광양만을 배경으로 한 해양세력으로 본다. 이에 비해 최인선 교수는 해룡산성, 마로산성, 봉화산성을 모두 견훤왕의 근무 후보지로 꼽는다. 좀더 연구해야 할 대목이 아닐까 싶다. 순천의 3성황신 성황(城隍)신앙은 고려 초기 중국에서 도입되었다. 이전부터 내려오던 산천(山川)신앙과 함께 성황신앙은 국가적인 위기나 재난을 극복하는데 음조(陰助)한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국가에서 오악(五嶽)에 대한 제사를 계속하고 산천신과 성황신에게 봉작을 내릴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고려 중기부터는 지방세력에 의한 신사(神祠) 건립이 이루어졌다(목포대 도서문화연구소 이경엽 교수). 곳곳에서 이들을 모신 신사가 건립되는데 순천의 경우 3개가 집중돼 관심을 끈다. 모두 역사적 인물을 신격화해 모셨다는 점도 특징이다. 순천 해룡산사 박영규, 여수 진례산 성황사 김총, 순천 인제산사 박난봉이 그들이다. 박영규는 견훤왕의 사위로 순천박씨의 중시조가 되었고 김총은 견훤왕의 인가별감으로 순천김씨의 시조다. 또 박난봉은 고려 중기 인물로 박영규의 후손이다. 이중 김총의 성황사는 당초 순천 봉화산에 있다 조선시대 여수 상암동 진례산으로 옮겼다. 해룡산사는 18세기 중엽, 성황사는 19세기 중엽까지 유지되었다. 성황신 김총의 영정은 지금도 전해진다. 인제산사는 조선 초기에 없어졌다 17세기 말 재건되었으나 곧바로 폐쇄되었다. 이들 성황신은 지역에 세거해온 후손들에 의해 고을 수호신으로 모셔졌다. 지역민을 결집하고 지방사회를 통치하는 수단으로 제의가 수행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