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정전 70년] 마산방어전투
1950년 8월 1일 하동과 함양, 진주를 점령한 북한군 6사단은 마산 접경에 이르렀다. 방호산 6사단장은 “마산을 점령하면 적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다. 우리의 최종 목표인 부산 점령은 시간문제이다”라고 말하며 승리를 장담했다. 그러나 경북 상주에 주둔 중인 미 25보병사단이 8월 3일 마산으로 급파하면서 전투 양상이 달라졌고, 마산을 지키고 뺏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국군과 미군 1000여명, 북한군 4000여명 등 무려 5000여명이 전사한 참혹한 ‘마산방어전투’. 북한군에 대부분 국토를 빼앗기고 마산이 무너지면 부산마저 위태로운 상황에서 방어전투는 전쟁의 승패를 가를 수 있는 ‘막느냐 무너지느냐’의 중요한 전투였다. 만약 패배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중요했지만, 미군 주도 전투란 이유로 기념관 하나 없이 잊어 가고 있다. ◇죽음으로 지켜라= 1950년 8월 1일 북한군 6사단은 남침 36일 만에 진주를 점령한 데 이어 마산 현동 검문소에 집결했다. 6사단장 방호산은 중국에서 항일 활동을 하고 소련 유학까지 다녀온 북한군 내 뛰어난 전술가였다. 또 중국 국공내전에 참전해 전쟁 경험이 풍부한 조선족들로 구성된 북한군 6사단 7000여명은 함안·진동 고산지대를 먼저 확보한 후 마산 점령을 노리고 있었다. 당시 이 일대를 주둔하고 있던 국군은 1000여명에 불과했다. 미 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은 급히 경북 상주에 주둔 중인 미 25보병사단을 250㎞ 넘는 마산으로 단 2일 만에 이동시켰다. 이에 맞춰 진주에서 후퇴한 미 24사단도 창녕에 낙동강 방어선 진지를 구축했다. 워커 중장은 “240km의 낙동강 방어선의 더 이상 철수나 후퇴는 없다. 죽음으로 지켜라”고 말하며 결의를 다졌다. 이로써 마산을 점령하려는 북한과 사수하려는 국군과 미군은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특히 요충지였던 해발 739m 높이 서북산은 고지의 주인이 19번이나 바뀌었다. 서북산은 함안군 여항면과 창원시 마산 합포구 진북면·진전면 경계에 있어 산 정상에 오르면 인근 함안과 마산 일대, 진주가 보여 전쟁의 승패를 가를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다. 서북산을 지키는 과정에서 1000여명의 아군이 전사했을 정도로 참혹했다. 산 정상은 수없는 미군 함포 사격과 공군기의 네이팜탄으로 인해 나무가 사라지고 정상 높이가 낮아져 미군은 이 산을 ‘늙은 중머리 산’, ‘네이팜’이라고 불렀다. 만일 방어전투에서 패배했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바뀌기 전까지 대한민국은 절박한 위기였다. 마산과 당시 임시수도인 부산까지는 직선거리로 40~50㎞에 불과했다. 방어전투에서 패배했다면 부산이 위험했고,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도 힘들어졌을 수 있었다. 결국 마산방어전투에서 한미동맹군 승리로 북한군의 부산 점령을 막을 수 있었고, 국군과 UN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방어전투 승리로 9월 16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반전의 기회를 가져왔다. ◇한미동맹의 상징= 지난 1월 29일 방문한 격전지 중 하나인 마산합포구 진북면 옥녀봉 정상. 옥녀봉에는 전투가 벌어진 지 70년이 넘었지만, 당시 참혹한 흔적들을 느낄 수 있었다. 옥녀봉은 물자 수송이 용이한 도로가 인접한 요충지로 미군과 북한군의 탈환전이 이뤄졌던 곳이다. 정상에는 미군의 함포 사격으로 인해 생긴 구덩이와 참호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현장을 동행한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회장이 금속탐지기로 발굴 작업을 하자 탄피, 벨트 버클 등이 발견됐다. 배 회장은 “이 일대에 수십차례 발굴 작업을 했는데 아직도 전투에 쓰인 총알 탄피, 파편, 버클 등이 나온다. 이만큼 방어전투가 치열했다는 것을 뜻한다”며 “남의 나라에 와서 목숨을 바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군인들이 잊히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한미동맹의 상징이기도 한 이 전투가 정전 70주년에 맞춰 적극 재조명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가장 치열했던 서북산 전투 당시 로버트 리 티몬스 대위는 중대장으로 중대원 100여명과 함께 고지를 지키던 중 북한군 습격으로 부상을 입고, 후송 중 북한군 기관총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전사 당시 티몬스 대위에게는 7살 아들이 있었다. 아들인 리처드 티몬스는 아버지를 이어 군인이 됐고 이후 주한 미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했다. 또 티몬스 대위 손자도 미 육군 대위로 한국 근무를 자원해 1996년부터 1997년까지 판문점 인근 미 2사단 최전방 초소에서 근무했다. 3대에 걸쳐 대한민국 자유와 평화를 지킨 것이다. ◇인터뷰 “마산 뚫렸으면 지금의 대한민국 없었을 것”-마산방어전투 유일 생존자 류승석 노병(93, 1950년 당시 학도병) “마산이 무너졌으면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은 없었을 겁니다.” 마산방어전투 참전자 중 현재 유일한 생존자인 류승석(93)씨는 방어전투 중요성을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류씨는 본인이 고령이라 이제 기억이 흐릿해지고 몸도 예전과 같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가 전하는 전쟁의 참상은 생생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고 얼마 뒤 류씨는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다. 마산 월영동에서 단 일주일간 훈련을 받은 뒤 진주, 남원, 순천, 하동의 전투를 거쳐 8월 다시 마산으로 돌아온다. 그가 방어전투 투입되기로 결정된 뒤 받은 주된 임무는 북한군 정보수집이었다. 전투 당시 미군과 국군 정보가 일치하지 않아 혼선을 겪었기에 군은 학도병들을 북한군 진지에 투입해 적의 전력, 위치 등을 파악하기로 했다. “특무대 간부가 북한군 진지에 투입되기 전 학도병들에게 ‘너희들은 산 생명이 아니다’고 말하며 목숨을 걸고 적 정보를 파악하라고 하더군요. 너무 어린 나이라 죽음이 무섭지도 않고 단지 전쟁이 났으니 적과 싸워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투입된 부대원 30명 중 류씨를 포함한 15명은 진동, 나머지 15명은 함안으로 향했다. 그들은 인민군처럼 보이기 위해 인민군복을 입고 공산당 문양이 박힌 모자를 쓴 채 적진으로 들어갔다. 임무 기간은 일주일이었지만, 아군이 없는 적진에서 임무 수행은 어렵다고 판단해 5일 만에 복귀를 결정했다. 진동에 투입된 15명의 학도병 중 살아 돌아온 이는 5명뿐이었다. “저희는 북한군으로 위장했기에 복귀하기로 한 날에 맞춰 아군 진지로 와야 미군 공격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틀 일찍 복귀했기에 하마터면 미군이 학도병들을 북한군으로 착각하고 총을 쐈을 수도 있죠.” 류씨는 목숨을 걸고 전투에 참여했지만, 대한민국에서 그의 학도병 활동에 대한 공식 기록은 없다. 참전유공자로 인정받은 것도 그가 학도병을 나온 후 곧장 공군으로 입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학도병들이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국군 해병대와 미 25사단이 공격에 들어갔습니다. 승전으로 해병대는 특진하는 등 공을 인정받았지만, 저희는 학도병이었기에 아무것도 없고 제대로 된 기록조차 없습니다.” 노병의 마지막 소원은 마산방어전투를 기억하고 미래 세대들이 안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전쟁기념관이 건립되는 것이다. 류씨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학생과 시민들을 찾아다니며 안보 교육에 나서고 있다. “한국전쟁 중 타 전투들은 전쟁기념관이 있어 매년 그곳에서 관련 행사들이 열리고 지역 학생들이 안보 교육을 받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구한 마산방어전투는 기념관도 없이 잊히고 있죠. 죽기 전 기념관이 건립돼 방어전투가 계속 국민들에게 기억됐으면 합니다.” 경남신문=박준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