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에 관하여
옛어른들 말씀이 열두 재주 가진 놈 조석끼니 없다고 했는데, 어린 시절의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때 나는 장래 희망을 묻는 질문에 과학자랑 외교관이랑 작가요! 라고 대답하는 아이였다. 어른들은 껄껄 웃으며 셋 중 무엇이 되어도 좋겠다고 했는데, 그때는 그게 덕담인줄 모르고 왜 하나만 하라고 하는걸까 이상하게 여겼다. 그때는 내가 벤저민 프랭클린에 맞먹는 인재인줄 알았다. 거창한 미래상은 겨우 대학 입시 한번을 치르며 현실에 맞게 조정되었다. 나는 세가지 꿈 중에 과학자의 미래를 선택하면서 이 정도 아담한 꿈이라면 얼마든지 성취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분자생물학과라는 낯선 학과를 선택했는데 분자 단위에서 생명현상을 연구한다는 그 학과의 취지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생명과학은 미래의 핵심산업이 될 것이 확실했다. 나는 내 선택에 만족했다. 막상 공부를 시작해보니 과학자의 길이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우주와 생명의 기원, 생명작용의 과학적 메커니즘 같은 근사한 어휘에 매혹되어 시작했지만, 연구의 실제는 끝도 없는 실험과 논문연구, 데이터와 그래프와 통계의 연속이었다. 알고보니 나는 문과였구나, 속으로 후회했다. 게다가 찬란해보였던 생명과학의 미래가 실은 그리 밝지 않다는 식의 암울한 전망들이 줄을 이었다. 전세계적으로 생명과학 연구인력은 너무 많은데 좋은 일자리는 적다는 것이었다. 힘들고 어려운데 전망까지 어둡다니, 나는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았다. 이십대의 용기와 낙관을 긁어모아, 나는 문학에 다시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과학자의 재목이 아닌 것을 깨달았으니 내 진짜 적성은 문학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문학계는 나를 받아주었다. 나는 좋은 상을 받으며 근사하게 등단했고 내가 예술로서 인류에 이바지할 미래를 다시 한번 확신하며 집필의욕을 불태웠다. 그리고 10년 뒤, 나는 또다시 번아웃에 나자빠져 있었다. 알고보니 나는 문학적 재능마저도 그리 뛰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과도 아니었는데 문과도 아니면 난 도대체 뭐란 말인가! 게다가 문학계 전망은 더할수없이 암울하다고 했다. 문학 시장은 점점 쪼그라드는데다 인구마저 급감해, 백년 뒤에는 한글 자체가 소멸할 것이라고 했다. 이 시점에서 세 번째 카드, 외교관의 꿈을 들먹일만큼 눈치없는 사람은 없기를 바란다. 나는 이미 사십대였고 지칠대로 지쳤고 꿈은커녕 현재도 지탱하기 힘겨웠다. 더 황당하게도, 전세계적으로 수명이 연장되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예전에 전망이 어둡다고 했던 생명과학은 이제야 빛을 보고 있다고 했다. 꾸준히 연구자의 길을 걸었던 나의 동료 선후배들은 모두 중견 과학자 또는 바이오산업계의 전문가들이 되어 절정의 기량을 발휘하고 있었다. 나름 심사숙고했던 두 번의 선택이 모두 나를 배신했고 남은 것은 남루한 현실과 몰락해가는 미래 뿐이라니, 나의 미래가 과학자도 작가도 아니었다면 도대체 나는 무엇이 되었어야 옳았던 것일까? 의사? 변호사? 교사? 경찰? 무엇을 했어도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 같았고, 또는 무엇을 했어도 아무 것도 안 되었을 것 같기도 했다. 다시 십년이 흘렀고, 나는 이제 그때보다는 좀더 철이 들었다. 이제는 열두 재주 가진 놈이 조석끼니 없다는 옛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그것은 선택이라는 미혹에 대한 깨우침이다. 어떤 최선의 선택이 최상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착각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앙앙불락하며 어리석은 시간을 보냈다.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선택은 좋은 결과와 사실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을 때조차 있다. 어떤 선택이든 그것을 좋은 결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은 긴 시간과 집념, 그리고 끝없이 매만지는 손길이다. 대한민국은 최근 아주 중요한 선택을 했다. 그 선택에 만족하는 사람도, 실망한 사람도 있다. 이전에 해왔던 선택들에 대해서도 모두 다른 의견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한국 사람들이 이 나라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오랜 시간 악착같이 싸워왔다는 점이다. 그 독한 집념에서 우리는 확실히 세계적으로 남다른 사람들이었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 나라를 좀더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사람들이고, 때로는 넌더리나는 이 집념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심윤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