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의 실패를 딛고 일어서려면
영화 1987은 성공으로 끝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현실의 1987은 실패였다. 2017년 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이 바로, 30년 전 1987이 성공한 듯 보였던 실패였다는 반증이다.1987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배경과 전개에는 5개의 큰 축이 움직이고 있었다. 검찰, 교도관과 종교계재야세력, 언론, 부검의사, 시위를 주도한 대학생이 그들이다.검찰이 사건의 발단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검찰이 개혁적 원칙을 견지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조직생존 차원의 기동이었다. 당시 검찰은 경찰과 청와대의 밀월, 권인숙 성고문 사건과 잇따르는 의문사 사건 등으로 위상과 입지가 약화된 상태였고, 사실상 경찰의 지휘를 받는 조직이라는 무력감과 오명 속에서 조직 위기감이 고조된 상태였다. 때문에 최환 검사의 소신이 통할 수 있었고, 고문치사 가능성을 제기한 오연상과 국과수 부검의로서 경찰지휘부의 강요에 굴복하지 않았던 황적준의 양심과 원칙이 채택될 수 있었다.결과적으로 각각의 축이 자기가 처한 상황과 자신의 고유한 행위 논리에 따라 움직인 것들이 우연히 유기적으로 연계된 결과, 진실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축인 대학생들이 결합하면서 이루어진 것이 바로 1987 민주항쟁이다.1987년 민주항쟁의 결과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직선제 개헌이라는 제도적 변화는 당시 정치권의 이해관계와 야권의 분열로 군부독재 연장선인 노태우가 당선되면서 그 빛을 잃어버렸다. 1987년 12월 대선 결과 허탈해했던 사회적 분위기를 기억한다. 현실 1987은 그렇게 총체적 실패였다.30년이 지난 지금 과연 1987년의 꿈, 민주주의가 이루어졌는가? 국정원, 검찰, 경찰, 법원, 정당, 언론 그 어느 것도 바뀌지 않았다. 국정원, 검찰, 경찰은 여전히 국민 위에 군림했고, 법원은 3권 분립의 한 축이 아닌 법무부와 다를 바 없는 역할을 한 것이 드러났다. 정당의 민주화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언론은 보도지침을 어기고 사실을 보도했던 당시보다 오히려 후퇴했다.대공수사를 한 예로 보자. 1987년 당시 안기부와 경찰은 모든 국민과 학생을 빨갱이로 보고 고문을 통해 사실을 조작했다. 과연 지금은 변했나? 최근까지도 국정원은 간첩사건을 조작하고 민간인을 사찰하는 등 공권력을 악용해 국민을 기만했다. 경찰은 국민을 폭도로 간주하고 과잉진압작전을 펼쳤다.이는 지난 30년 동안 각 기관들이 국민을 위한 자신의 원칙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적폐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결과이다.촛불을 통해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현재도 1987년보다 좀 더 나아간 것은 맞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토론과 비판적 태도, 합리성에 입각한 반성과 성찰을 한 기초 위에서 국가 전반을 변화시키는 시스템을 확립하고 실행해야 한다. 또다시 타협적 법과 제도를 만들고 북한 리스크에 굴복한다면 1987년의 실패가 되풀이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