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4-12-04 19:27 (Wed)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내 삶의 곁, 함께 있어 든든한 사람들] “임대료 외려 내렸다” 전주 한옥마을 속 착한 건물주

월세가 너무 과하긴 하지. 주변을 보니까 다들 돈을 많이 벌려고 그러는거여. 함께 어울려 사는한옥마을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좋아? 전주 한옥마을내 남창당한약방 원장 한광수 씨(69)는 최근 폭등하는 한옥마을 임대료 현상속에 보기드문 착한 건물주다. 그의 이름은 이 건물 1층에 입주한 세입자 강익순 씨(57)의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주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 씨가 받는 임대료는 최근 이곳 임대료 폭등과는 거리가 멀다. 보증금 1억5000만 원에 월세 350만 원. 그의 건물 월 임대료는 3년 새 3배 가까이 줄었다. 한옥마을임대료 폭등세태에도 세입자와 우애를 과시하는 비결이 궁금해 그가 운영하는 한약방이 있는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54번지를 찾았다. 그의 건물 1층에서 갈비 전문점을 운영하다 앞치마를 두른채 기자를 만난 강 씨는 원장님을 만난 건 행운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는 지난 2015년 아이스크림 전문점을 열었다. 56㎡(17평)짜리 공간의 월 임대료는 1000만 원이었다. 회사에 다니다 퇴직한 중년 남성이 야심 차게 개업했더니 석 달 만에 메르스가 돌면서 한옥마을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쫄딱 망하던 찰나 원장님이 부르더니 괜찮냐고 묻더라고요. 그러면서 임대료를 1000만 원에서 600만 원으로 낮춰 주셨어요. 먼저 말하지도 않았는데, 감사하죠. 이듬해 갈비 전문점으로 메뉴를 바꾼 강 씨는 올해 여름 또 한 번 놀랐다. 한 씨가 임대료를 또 낮춰줬기 때문이다. 지난 5월 무더위가 시작되면서 관광객이 감소하자 강 씨는 한 씨를 찾았다. 버티기 힘들다던 강 씨의 말을 들은 한 씨는 고민끝에 600만 원이던 월 임대료를 350만 원으로 내려줬다. 한 씨의 건물이 자리한 태조로 일대는 최근 임대료가 2~3배 뛰면서 그 임대료를 감당 못 하는 상인들이 내쫓기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벌어지는 곳이다. 한옥마을 관광객이 수시로 오가는 한 씨의 한약방 1층 점포는 이곳에서도 목이 좋기로 소문난 편이다. 주변상가들은 임대료를 올리는 것 같다는 질문에 한 씨는 열심히 일해도 벌이가 좋지 않은 세입자에게 고액의 임대료를 받는 것처럼 폭리도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완주에서 태어나고 전주 영생고를 졸업한 한 씨는 지난 1987년 한옥마을 입구에 건물을 세우고 은은한 한약 향을 풍기고 있다. 그는 인터뷰 요청에 며칠 고민에 빠졌다고 했다. 한 씨는임대료를 내린 사실을 외부에 알리는 게 사실 쉽진 않아요. 주변에 임대료 시세에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까 시기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런데 한옥마을 임대료 문제가 요즈음 심각한 상황이잖아요. 서로가 이해하고 양보를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 용기를 냈습니다고 말했다. 그는 한옥마을에서 돈을 벌면 안 된다며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진단했다. 이어 세입자도 큰 점포를 빌려서 이를 쪼개고 개인에게 재임대하는 일종의 전전세를 하고 있다면서 또 건물주도 수익을 더 내기 위해 임대료를 올린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임대료 급등의 문제는 서로가 욕심을 줄이고, 양보하면 될 일이라며 나의 일이 아니라 한옥마을을 지키는 방향으로 풀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사진을 요청한 이들은 수줍게 웃었다. 한 씨를 어른이라고 부르던 강 씨가 말했다. 제가 안아드려도 될까요?

  • 사회일반
  • 남승현
  • 2018.10.11 19:19

위안부 할머니 돕는 황성진 이솔 화장품 대표 "사회문제 참여하는 건 브랜드 성장에도 도움되죠"

▲ 25일 완주 용진농협로컬푸드 카페에서 황성진 이솔 대표가 소녀상 지원 등 여성 인권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조현욱 기자 완주군 용진읍 소재 화장품 브랜드 이솔(2SOL)만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생각하는 회사는 흔치 않다. 초창기 시절 유명 화장품보다 성분이 뛰어난데 저렴한 화장품이라는 찬사를 받더니,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한 뒤로는 착한 화장품으로 불리며 안방 여성 팬들을 사로잡았다. 얼마 전엔 신제품이 출시될 때마다 수익금 일부를 기부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25일 오전, 회의를 마치고 회사 근처 카페로 들어선 이솔 화장품 황성진 대표(38)는 건장하고 다부졌다. 생각보다 젊어 보인다고 하자 일찍이 미용에 관심을 가졌다며 웃었다. 황 대표가 위안부 할머니의 상처 보듬기에 나선 계기는 의외다. 화장품 구매 고객의 90%가 여성이라는 점을 깨닫고 여심 공략에 나서면서 부터다. 이 과정에서 여성 인권에 눈을 뜬 그는 지난 2016년 호주 시드니 평화의 소녀상 건립에 무려 3300만 원을 쾌척했다. 미국과 캐나다, 독일에 이어 외국에 세워진 네 번째 소녀상이다. 당시 이재명 성남시장 등과 함께 시드니에 도착한 황 대표는 소녀상 앞에서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한다. 소녀상 건립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함께 이뤄낸 것입니다. 시드니 교민이 허가를 받았고, 운반은 성남시가 맡았습니다. 우리는 제작비를 지원한 게 전부죠. 사실 언론에 나와 이야기 하는 것도 쑥스럽네요. 평생 한(恨)을 안고 살아오다 몸이 불편한 가운데도 소녀상 제막식에 참석한 길원옥 할머니(90)는 황 대표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위안부 할머니 돕기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다. 황 대표는 지난 2014년부터 수익금 일부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기부해 왔다. 1년에 두 차례는 꼭 화장품 고객을 초청해 위안부 피해 할머니와 페미니즘 등을 주제로 한 강의를 개최한다. 임실에서 태어나 오수고를 졸업한 황 대표는 한일장신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지만 1학년 1학기 재학중 자퇴하고, 아카데미를 통해 피부미용을 배웠다. 전주 시내 피부관리실에 화장품을 납품하는 일을 하다가 지난 2008년 아리솔(이솔의 전신)이라는 상호로 회사를 차렸다. 소나무의 기상을 잇는다는 회사 이름 이솔의 의미만큼 황 대표의 활동은 굳건하고도 감동적이다. 지난 2014년 4월 세월호의 비극을 지켜본 그는 이듬해 12월 서울의 한 영화관을 대관해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투쟁 1년을 기록한 영화 나쁜 나라를 관람했다. 황 대표는 쌍용자동차 사태로 낙담하는 이들을 후원하는 등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반대 세력도 적지 않다. 위안부 할머니와 세월호 피해가족, 쌍용차 해고 근로자를 돕는 황 대표에게 전화 테러가 쏟아졌으며, 우편으로 극렬히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왜 화장품 업체가 사회 문제에 나서려 하는지 모르겠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며 그러나 우리 화장품에 대한 자신감을 키우고, 브랜드를 성장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고 했다. 사회운동과는 거리가 먼 황 대표가 뚝심을 보인 데는 누나 황미영 씨(41) 영향이 컸다. 함께 일하는 누나는 동생에게 힘든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대단하고, 자랑스럽다고 했다. 황 대표는 직원들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다. 7명의 직원을 둔 이솔은 지난 2015년 고객상담센터에 무리한 사은품을 요구하며, 욕설과 비방을 한 고객을 상대로 법적인 조처를 하겠다는 경고문을 회사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고객도 중요하지만, 회사 직원도 고객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황 대표는 아직 작은 기업에 불과하지만, 직원에게도 가족처럼 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불거진 대기업 일가의 갑질 논란 속에서 옛 정취 물씬한 가족의 정과 상처받은 이웃을 대하는 황 대표의 말이 대비를 이룬다. 가족들의 지지와 응원 덕분에 기부가 잘 이뤄지는 것 같아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는 그날까지 피해 할머니 돕기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 사회일반
  • 남승현
  • 2018.04.25 21:11

군산서 봉사단체 이끄는 반영곤 씨 "나누며 살다보니 마음의 안정·평화 얻어"

국가를 위해 충성한 마음이 이제는 국민을 향한 것뿐입니다.군산에 사는 반영곤 씨(67)는 36년 4개월간의 군 생활을 마치던 지난 2005년 나눔의 삶을 꿈꿨다.2005년 5월 처음으로 군산시 대명동 군산경로식당에서 급식 봉사로 장애인과 노인을 돌봤다. 조직 생활에 익숙했던 그는 지인을 모아 세광봉사단과 사랑나눔봉사단을 만들었다.군산시 평화동에 사무실까지 차리고 병원을 찾아 환자 목욕 봉사에 나섰다. 그러면서 호스피스 자격증을 취득해 죽음을 앞둔 환자를 챙겼다.반 씨는 전역 후 노후를 고민했는데, 부인과 함께 봉사 활동을 하면서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돕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해가 거듭되며 봉사는 점점 커졌다. 지금은 일주일 내내 바쁘다고 한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은 농촌 홀몸노인을 찾아 목욕 봉사를 한다. 수요일은 동군산병원에서 환자의 몸을 닦는다. 목요일은 봉사단원들과 함께 밑반찬을 만들어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65세대에 배달한다. 4찬 도시락은 사나흘 먹을 만큼 넉넉한 인심이 담겨 있다. 정기 봉사 일정이 잡히지 않은 월요일은 요양병원에서 환자와 가족들을 위해 기도한다.반 씨는 군산에서 기네스 봉사왕으로 알려져 있다. 봉사를 시작한 지난 2005년 5월 2일부터 올해 8월 24일까지 행정안전부에 기록된 봉사시간이 6540시간에 달한다. 군산시 봉사시간 최다 봉사자로 기록됐는데, 2010년 군산개항 111주년 기념 군산 기네스에서는 개인 최대 봉사자로 등재됐다.그는 아무래도 오랜 군 생활과 신앙심으로 전역 후에도 봉사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것 같다며 봉사를 하면서도 도리어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는다고 했다.10년 동안 봉사단체를 운영하며 기네스 봉사왕으로 소문난 그가 올해 자원봉사대상 포장을 받았다. 지난 5일 강원도 평창 용평리조트에서 행정안전부가 주최한 제12회 전국자원봉사자대회 시상식이 열렸다. 자원봉사자와 단체 등 300여 명이 훈포장과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상을 받았다.반 씨를 비롯해 전북에서는 김연분 전주시 로사헤어 봉사단 회장이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지난 2003년 로사헤어봉사단을 만든 김 씨는 매주 3차례 요양시설을 찾아 이미용 봉사를 하고 있다.도내 자치단체와 기업의 남다른 선행도 있었다. 진안군은 이동식 빨래간식 차량을 이용한 섬김 봉사와 해외자원봉사 교류 확대 등의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국무총리 표창에는 도내 홀몸노인과 다문화, 조손가정 등 소외된 이웃에게 도배 및 연탄 배달 봉사로 힘 써온 (주)케이티 전북고객본부가 선정됐다.특히 반 씨는 수상자 가운데 유일하게 기관과 단체가 아닌 국민의 손으로 뽑혔다.행정안전부 민간협력과 남상우 사무관은 전국적으로 446건의 자원봉사자 등의 추천이 들어왔고, 이 중 136건은 국민이 우편과 인터넷으로 접수한 것이라며 국민 추천 대상자 가운데 반영곤 씨가 유일하게 선정돼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전역 후에도 연금을 쪼개 기부를 하고 있는 반 씨는 충분한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정을 나누는 봉사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 사회일반
  • 남승현
  • 2017.12.07 23:02

8일 풍남문광장서 나눔콘서트 여는 조태희 씨 "재능있는 사람들 따뜻한 마음 하나로 모았죠"

머리가 큰 아이는 힘들게 세상에 나왔다. 분만 도중 뇌 신경을 다친 영향으로 다리가 건강하지 못했다. 열 다섯이 되면서 신체 변화는 눈에 띄었다.다른 사람들과 몸 상태는 다르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반드시 절망적이진 않다고 조태희 씨(32지체장애)는 말했다.전주 출신으로 제일고와 원광보건대 치기공과를 졸업한 태희 씨는 아픔이 많다.걷는 게 왜 그러냐라는 말과 손가락질, 시선은 어린 태희 씨의 가슴에 송곳처럼 박혔다.2005년에는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걸음걸이 교정 수술을 받았는데, 병원 파업으로 재활치료는 다른 병원에서 받아야 했다. 수술이 잘 안돼 병원을 찾아 항의까지 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고비의 순간마다 그를 지탱한 건 부모였다.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담임 교사를 만나선 내 아들 반장 좀 시켜달라고 부탁했어요. 6학년 가을 운동회에서는 축구 경기에 참여 했는데, 아버지는 운동장에 갑자기 물을 뿌리셨어요. 아픈 자식을 달래려는 부모 마음이었죠.태희 씨는 장애를 부정적인 방식으로 정의하면서 울부짖는 대신, 오히려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지난 2011년부터 5년간 서울 생활을 하면서 봉사활동모임을 통해 중증장애인시설을 찾아다녔고, 대학교 모임에서는 홀몸노인을 위한 연탄 봉사를 했다.지난 4월에는 전주대 물리치료학과생과 네일아트 교육생, 초중등학교 교사 등 30여 명의 재능 봉사자를 한데 모아 완주군 소양면의 한 요양원을 찾기도 했다.태희 씨는 봉사활동을 하면서 손이 불편한 사람의 입에 치킨을 넣어 준 적이 있는데, 나도 쓸모있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뭉클했다며 이를 계기로 자주는 아니지만, 주변의 재능있는 사람을 모아 함께 봉사하고 있다고 말했다.태희 씨는 오는 8일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전주 풍남문 광장에서 나눔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이날 행사에서는 전주 기타 동아리 코드의 거리공연과 원광보건대 유아교육과 재학생의 페이스 페인팅 등 40여 명의 재능 기부자가 참여할 예정이다. 이들을 모은 것도 태희씨다.그는 행사 시작 전 한옥마을과 풍남문 주변 환경 정리를 할 예정이라면서 수익금 모두는 전주 영아원 아기천사들의 간병비로 쓰일 것이라고 했다.홀트아동복지회에 월급 일부를 기부하고 있는 태희 씨는 소외된 이웃들에게 산처럼 크고 바다처럼 깊은 품이 되고 싶다며 따뜻한 마음과 재능을 함께 모아 준비한 나눔 콘서트에 많은 참여 부탁한다고 웃었다.

  • 사회일반
  • 남승현
  • 2017.07.06 23:02

대한법률구조공단 임현주 변호사 "피해자 대변하며 새 길 찾아"

성폭력을 당한 피해 아동이 수사기관 조사를 받는다. 경찰 조사와 검찰 조사 과정에서 2차례 이상 불려나가 악몽같은 상황을 되새겨야 한다. 법원에서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라고 요구한다. 피고인석에는 꿈에서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가 변호사와 함께 바라보고 있다.5년여 전까지만 해도 성폭력 피해자가 재판을 받기 위해서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법무부는 성폭력피해 아동의 조사기관과 재판과정에서 이 같은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지난 2013년 피해자 국선변호사(피해자변호인)제도를 도입했다. 수사과정에서부터 재판에 이르기까지 피해자를 대신해 참여해 피해자를 대변하기 위해서다.피해자 변호사는 대한법률구조공단이 운용하고 있다. 전북을 관할하는 전주지부에는 2016년 1월 처음 범죄 피해자를 전담하는 변호사가 생겼다. 임현주 변호사(32변시2회)가 주인공이다.임 변호사도 법률구조공단 피해자 전담변호사가 되기 전까지는 여느 변호사와 다르지 않았다. 의뢰가 들어오는 이들을 대변했다. 이 과정에서 전주판 도가니로 불리는 자림원 지적장애인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 이를 변호하기도 했다.임 변호사는 피고인을 변호할 때에는 그 피고인을 믿습니다. 당연히 변호인과 의뢰인과의 약속이니까요. 당시에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유죄 확정판결을 받게 되자 제 변호가 옳은 변호였는지 인간적인 고뇌에 빠졌었습니다라고 말했다.그는 그때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자기방어능력이 일반인보다 떨어지는 아이들에게 진술을 더 잘 받고 더 도와줘야하는데라는 생각을 했고, 그러던 중 법률구조공단의 피해자 변호사 모집 공고를 보게 됐죠. 이거다 싶었습니다 라며 피해자 변호사가 된 계기를 털어놨다.최근에는 아동청소년 성범죄뿐 아니라 아동학대, 여성폭력까지 피해자 변호가 확대됐다.그가 한 달에 수사과정에 참여하고 소송에 참여하는 사건은 15건에서 20건에 달한다. 한해 평균 200건의 각종 사건에서 피고인이 아닌 피해자를 변호한다.수사단계에서 고소와 항고, 재정신청까지 담당하고 재판에서는 검사와 상의해 항소까지도 하고 있다. 모든 변호비용은 무료이다.임 변호사는 최근 계부가 여중생을 성추행한 사건에서 공탁금을 성인이 될 때까지 금융기관에서 보관하도록 법원이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일반 변호사로 활동을 계속했다면 더 많은 수입을 얻었겠지만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소수가 아닌 대다수 법률사회적 약자를 위하는 일이 보람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그는 메신저나 문자메시지, 이메일 등으로 피해자들이나 가족들이 감사하다고 보내는 글들이 가장 큰 사건 수임료라며 환하게 웃었다.

  • 사회일반
  • 백세종
  • 2017.07.04 23:02

사회적기업 '천년누리 전주제과' 장윤영 대표 "어르신들이 만든 빵, 맛도 최고"

요즘 사회적기업 천년누리 전주제과 장윤영 대표(46)의 손바닥에선 매일 불이 난다. 장수 사과로 만든 무설탕 파이에서 크림치즈빵, 소보루, 팥빵을 만드느라 두 손이 혹사당한다.장 대표가 만드는 빵 가운데 단연, 트레이드마크인 전주비빔빵은 굽기가 무섭게 팔려나간다.8일 오전 10시 천년누리 전주제과가 운영하는 전주시 서노송동 전주빵카페에서 만난 장 대표는 정신이 없어 보였다.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빵 나오는 시간이라서요! 장 대표가 얼굴에 묻은 밀가루를 털기도 전에 속이 꽉 찬 전주비빔빵을 가리켰다.빵에 넣은 고기는 모래내시장, 채소는 중앙시장, 두부는 남부시장에서 구입했고, 고추장은 장수군 번암면에서 저희 어머님이 직접 만드신 거예요. 친환경 재료를 이용해 맛이 참 좋아요.오전 4시부터 오후 9시까지 문을 여는 전주빵카페는 근로자들의 평균 나이가 62세 고령자들로 장애인과 경력단절 여성을 포함해 총 23명이 일하고 있다. 지금은 익숙해 졌지만 빵집 사장이 되기까지 장 대표에겐 모든 것이 새로운 도전이었다.지난 1971년 장수군 번암면에서 2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난 장 대표는 전북대와 숭실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등 사회복지기관에서 10년간 근무하고, 지난 2009년 9월부터 7년간 전북과학대학에서 사회복지학 교수로 교단에 섰다.장 대표는 대학에 다니면서 학생회 운동을 했고, 사회에 대한 번뇌와 깊은 고민이 있었다며 사회복지시설과 대학에서 근무해도 한 번 힘든 사람은 여전히 힘들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아 현장으로 나오게 됐다고 했다.장 대표가 참여한 천년누리 전주제과는 지난 2012년 전주 금암노인복지관 서양열 관장이 고령자 일자리 창출의 목적으로 만든 천년누리가 전신이다.전주시 삼천동의 사무실에서 막걸리와 빵 등을 만들어 판매한 천년누리는 이듬해 대기업 에스케이 이노베이션의 사회공헌 지원사업에 선정돼 1억5000만 원을 지원받고, 2014년 7월 전주시청 인근에 건물을 임대해 전주빵카페를 냈다.지난 2015년 8월 사회적 기업으로 인정받게 되면서 장윤영 대표가 참여했다.그러나 제과업계 상황은 냉정했다. 근로자 4명으로 시작한 전주빵카페는 월 매출이 500만 원에 불과했다.주위를 둘러보면 빵집이 넘쳐나요. 대기업들이 많기도 하고, 차별성이 있어야 시장경쟁력을 가질 수 있거든요. 그래서 직원들과 함께 생각해보니 전주의 명물은 비빔밥이잖아요. 거기서 비빔빵의 아이디어가 나온 거예요.장 대표는 지난해 7월 노인들이 빵을 만들어 생존을 한다는 사연을 인터넷에 올려 스토리펀딩으로 500만 원을 모았고, 같은해 11월 전주비빔빵을 탄생시켰다.겨우내 춧불 집회에 참가하면서 빵을 무료로 나눠 준 장 대표는 이후 요양원과 그룹홈 등 지역내 소외된 이웃들에게 소리없는 천사가 되고 있다.비빔빵의 사연이 SNS와 입소문을 통해 알려지자 전주빵카페의 매출은 월 8000만 원까지 올랐다. 자연스럽게 직원도 4명에서 현재는 23명으로 늘었다. 이들의 평균 월급은 160여 만 원이다.장 대표는 어르신들이 만든 빵이 전국을 넘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며 지역 노인 100명이 일할 수 있는 규모로 가게가 확장되면 후학 양성을 위해 교수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목표를 밝혔다.전주빵카페는 가게 문을 열지 않는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후 6시가 되면 폐지 줍는 노인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빵굽는 노인들이 모아놓았다가 전해주는 폐지와 빵을 받고 돌아간다.장 대표는 어르신들이 만든 빵이 외로운 노인들에게 위로가 되고 있다고 했다.

  • 사회일반
  • 남승현
  • 2017.06.09 23:02

사회복지사 오준규씨 "장애인 가족의 행복 찍었죠"

9년간 남몰래 ‘장애인 가족사진 1000장’을 찍은 사회복지사 오준규 씨(47·전북장애인복지관 근무)는 출발부터 남달랐다.전주 출신인 준규 씨는 10살이 되었을 때 질병과 노환으로 부모를 일찍 여의고 새어머니 품에서 형·누나들과 함께 청소년기를 보냈다. 한일장신대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1학년 1학기를 마친 뒤 군에 입대했다.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그는 지난 1999년 남원사회복지관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받은 첫 월급은 64만 원에 불과했다. 풍요와는 거리가 먼 시절 ‘사진’은 준규 씨의 운명을 바꿨다.“사진은 돈 있는 사람이 하는 예술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하고 보니 꼭 그렇지 않더라고요. 당시 월급으로는 필름을 사는 것도 버거웠는데, 사진을 찍으며 어렵고 힘든 시절을 달랬습니다.”독학으로 사진을 배워 실력을 쌓은 준규 씨가 장애인들을 위해 카메라를 든 건 지난 2009년이었다.사진관에 가기 힘든 장애인들을 위해 준규 씨는 인터넷에 글을 올려 필름과 인화지, 액자 구입 등에 필요한 후원금 200만 원을 모았고, 10명의 장애인을 만나 가족사진을 찍었다.준규 씨는 “전북장애인복지관에서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대부분이 가족사진을 찍기 힘든 상황이었다”며 “가볍게 시작한 일이었는데, 장애인들의 만족도가 커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그의 선행이 알려지자 사회복지공동복지모금회와 전북은행으로부터 후원이 들어왔고, 준규 씨는 매주 토요일 도내 14개 시·군의 장애인 가정을 찾아 가족사진 찍기에 매진했다. 9년간 그가 촬영한 장애인 가정은 자그마치 1000가정이 넘는다.그의 카메라는 우리 사회의 속살을 향하기도 했다.준규 씨는 지난 2011년 천안함 1주기에는 안타깝게 희생된 장병들을 기리기 위한 추모 사진전을 열었다.당시의 비극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은 준규 씨가 사진전 준비를 마쳤지만, 천안함을 둘러싼 정치적 이유로 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전시관의 대관이 취소되는 등 어려움도 있었다.그는 “당시 청사 내 갤러리 대관을 담당하던 공무원이 사정해 결국 천안함 추모 사진전을 열지 못했고, 대신 전주 덕진공원 시민갤러리에서 작품을 전시했다”며 “또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도 사진전을 열어 시민들과 함께 애도했다”고 말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도 준규 씨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시민 63명의 촛불 집회 현장 사진을 모았고, 3월 25일부터 4월 말까지 전주향교에서 사진전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촛불을 든 모두가 역사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사진전을 기획하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우리 주변의 작고 소소한 모습을 역사에 편입시키고 싶다는 준규 씨는 “앞으로도 장애인들을 위한 가족사진 찍기를 이어나가고, 사회복지사를 중심으로 한 사진전을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 사회일반
  • 남승현
  • 2017.04.14 23:02

[내 삶의 곁, 함께 있어 든든한 사람들] 자전차 시민행동 김길중씨 "소소한 행동이 사회 바꿔"

불편하게 조성된 자전거 도로를 보고 모두가 무심코 지나갈 때 그는 이건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10대 중고생까지 박근혜 탄핵하라!를 외칠 때 그는 국회의원실에 전화를 걸어 탄핵 하실 겁니까?라며 탄핵 동참을 촉구했다. 한의사 김길중 씨(50)의 유별난 행보다. 그는 왜 그리 독특한 행보에 나서고 있는 걸까.전주에서 길을 지나다 보면 자전거 타기가 매우 답답하다는 것을 누구나 느끼는데, 아무도 건의를 안 합니다. 괜히 말했다가 손해 보는 거 아니야? 걱정만 하는 거죠.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제가 하나 둘 행동에 나섰죠. 막상 해보니 별거 없더라고요.완주 출신으로 전주고와 우석대 한의대를 졸업한 길중 씨는 1997년부터 한의사의 길을 걷고 있다. 특별한 계기는 없지만, 생태도시에 대한 관심이 컸던 그는 2012년 전주에 한의원을 개업하면서 타고 다니던 차를 팔고 자전거를 이용했다.지난해 10월에는 생태교통시민포럼에 운영위원으로 참가해 매달 대중교통과 보행 환경의 처지를 이해하고 개선책을 마련하고 있다.그는 특히 도로는 차에 전속된 공간이 아니다. 자전거 도로를 만들어달라는 기조로 자전차가 전주에게 길을 묻다(이하 자전차 시민행동)라는 시민모임을 출범시켜 눈길을 끌었다.자전차 시민행동은 매주 토요일 아침 전주 덕진공원에서 모여 전주시청까지 도로 1개 차선을 이용해 자전거 주행을 한다.자전차 시민행동의 활동에 관심을 보인 김승수 전주시장도 행사에 참여했는데, 이 자리에서 길중 씨는 지금의 자전거 도로가 인도 위에 겸용도로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보행자나 자전거인들 모두가 불편하다고 호소했다.이에 김 시장은 주말에 한시적으로 백제대로와 기린대로 1개 차로를 자전거 전용 차로로 만드는 방법 등 다양한 자전거 정책을 고민 중이다고 밝혔다.이 같은 길중 씨의 노력 덕분에 전주시는 6일부터 자전거정책과를 신설하는 등 자전거 사업에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바뀐 시정이 꼭 저의 활동 때문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죠. 그러나 20년 넘게 유지해온 낡은 자전거 정책을 이제는 손을 봐야겠다는 전주시의 의지는 늦었지만 다행입니다.모두가 바다에 가라앉는 세월호를 바라보고 있던 2014년 4월 16일. 길중 씨는 미증유의 사태에 입을 열지 못했다. 5월 초부터는 길중 씨와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중심이 돼 주말마다 한옥마을에서 침묵의 행진을 시작했다. 적게는 5~6명에서 많게는 100여 명의 시민이 참가한 행진은 같은 해 12월까지 이어졌다.가라앉는 세월호 앞에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잊지 않는 것밖에 없더라고요.그는 행진에 참여한 시민 중 300명에게 각 1만 원씩을 모아 풍남문 광장 신협 앞 화단에 세월호를 기념하는 한 그루의 산수유 나무를 심었고 이 나무는 매년 4월 꽃을 피우고 있다.2016년 모든 국민이 공분을 산 최순실 게이트에서도 길중 씨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국회의원실에 전화를 걸었어요. 대략 40여 명에게 전화해 박근혜 대통령 탄핵 찬성하느냐고 물어봤는데, 당시 새누리당 나경원 의원실은 그렇다고 답했고, 나머지는 고민 중이라며 답변을 회피했어요.이동을 할 때 수도권은 대부분 대중교통을 떠올리는데, 전주는 택시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모습이 안타깝다는 길중 씨. 누구나 보고, 듣고, 느끼는 감정선을 행동에 옮긴 실천력은 우리에게 강한 울림을 주고 있다.대한민국이 아픈 세월을 걸어온 만큼 올해는 희망을 품어본다는 길중 씨는 자전거 도로가 잘 갖춰진 유럽의 선진국들도 시작은 시민들의 소소한 행동에서부터 였다며 앞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실행하는 마음가짐을 이어가겠다고 새해 각오를 밝혔다.

  • 사회일반
  • 남승현
  • 2017.01.06 23:02

전북 점자도서관 김나리·김현지 사서 "시각장애인들 공부하며 행복해할 때 뿌듯함 느껴"

여러분은 앞이 안 보인다고 생각해 본 적 있나요?이런 질문은 비장애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는 문제는 아니다.시각장애인은 비시각장애인이 당연하게 보고 있는 글을 혼자만의 힘으로는 읽지 못한다. 점자책 읽는 방법을 배운 시각장애인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시각장애인의 곁에서 이들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 전라북도 점자도서관에 근무하는 김나리(33), 김현지(26) 사서가 주인공이다.4일 오전 전주시 덕진구 팔복동에 위치한 전라북도 점자도서관에서 만난 김나리 씨는 사서 자격증을 가진 사람을 채용하지만, 점자도서관의 특성상 이 업무를 하다 보면 사회복지사 업무를 할 때가 많다며 근무하면서 사서 선생님들 대부분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사회복지 공부를 계속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김현지 씨는 시각장애인들이 도서관에 직접 오기 힘들기 때문에 주로 통화로 대출과 반납이 이뤄지는데 아침마다 전화해주시는 분이 책을 읽고 공부를 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고 기분좋다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뿌듯함을 느낀다고 말했다.전라북도 점자도서관은 시각장애인에게 다양한 지식과 정보제공을 통해 시각장애인의 교육 및 독서학습문화생활의 활성화를 위해 마련된 시각장애인을 위한 전문 도서관이다.이곳에서 두 사서는 시각장애인들에게 도서대출 프로그램과 문화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자원봉사자들이 녹음한 음성 도서의 편집도 맡고 있다.점자도서관에는 비장애인을 위한 책도 마련돼 있어 인근 주민들도 이용하지만 주 이용자는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에 대출과 반납 업무는 주로 전화를 통해 택배나 우편으로 이뤄진다.점자도서관에서 5년째 이어오고 있는 시각장애인 테마독서여행은 특히 시각장애인 회원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김나리 씨는 1년에 한 번 시각장애인들과 책 하나를 정해 작가의 고향이나 책의 배경이 된 곳을 찾아가는 행사를 열고 있다며 시각장애인분은 보이지 않으니까 차량에서 정보를 들려주고 함께 답사를 하며 소리로 여행을 하는데 우리가 가이드가 돼 드리는 것이라고 말했다.아쉬운 부분도 있다. 점자도서관을 이용하는 시각장애인은 평균 20여명으로 일주일에 2~3번씩 책을 빌려가는 사람도 있을 만큼 인기가 많지만 음성 도서의 경우 자원봉사자가 책 한 권을 녹음하고, 사서들이 편집하기까지 3개월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다양한 도서를 제공하지 못한다.이들은 입을 모아 이 업무만 전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인력이나 시간의 한계 때문에 많은 책을 제공하지 못해 아쉽다며 자원봉사자의 많은 참여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전북 점자도서관은 음성 도서 8573종 14914권, 점자도서 3668종 6619권, 화면해설 영상자료 157종 268권, 일반도서 6770종 8231점을 소장 중이다.

  • 사회일반
  • 천경석
  • 2017.01.05 23:02

하천에 몸 던진 시민 구해낸 김문소씨 "힘들수록 주위 챙기면 사회 밝아져"

지난해 처음으로 경찰청이 주최한 2016년 용감한 시민상 수상자 16명 중 유일한 전북 출신 김문소 씨(59순창군 순창읍 순하리)는 지난해 5월 하천에 빠진 자살기도자를 구한 얘기를 전하면서 오히려 담담했다.그는 물속에 빠진 사람을 보면 누구라도 뛰어들어 구조하려 했을 것이라며 자신의 용감한 행동이 상을 받게 된 것을 오히려 쑥스러워 했다.김 씨는 이어 불우한 시절을 이겨내고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했다.그의 선행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지역사회에서도 칭송이 자자했다.순창경찰서에 따르면 지난해 5월 15일 낮 12시 40분께 순창교에서 우울증을 앓고 있던 50대 여성이 다리 밑 하천으로 몸을 던졌다.우연히 순창교를 지나던 문소 씨는 다리 위에 남겨진 신발 두 켤레와 겉옷을 보고 차를 세웠고 물 속에서 올라오는 기포를 본 뒤 곧바로 반사적으로 하천에 뛰어들었다.반 쯤 의식을 잃은 여성을 힘겹게 물 위로 건져 올린 그는 즉시 응급조치를 했고, 119구조대에 인계했다. 다행히 이 여성은 생명에 지장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체됐다면 위험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처음에는 어린 학생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아무 생각도 안하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죠. 물 밖으로 건져낸 여성을 보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더 열심히 살아야지 왜 그랬나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오죽했으면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참 안타까운 현실이죠.가라앉는 생명 앞에서 1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던 그의 용기에는 그가 걸어온 세월에 답이 있었다.5월이면 하천 물이 차가웠을텐데, 수영에 자신이 있었느냐고 묻자 그는 다행히도 특수체육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수영과 구조는 어렵지 않았다. 그날 그 하천을 지났던 것이 천만다행인 것 같다고 말했다.순창군 순창읍 순하리 출신인 그는 11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가난한 시절 어머니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5남매를 모두 대학에 보낼 정도로 강인한 정신력을 지녔다고 한다.문수 씨는 더 낮은 사람들을 위한 일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광주대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했고, 졸업후 조선대에서 특수체육학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제게 큰 영향을 줬습니다. 아버님의 투철한 국가관과 어머님의 강한 모성애가 지금의 저를 만들었죠.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았구요.대학 졸업후 잠시 하천 골재와 장류 등의 사업에 뛰어들기도 했지만 사회단체 활동에 전념하며 지난 1992년 순창군장애인협회를 발족시켜 장애인들을 돕는데 힘썼다. 또 지난 2015년부터 순창문화원 사무국장을 맡으며 지역 역사와 문화에 대한 홍보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지역내 귀농귀촌인과 다문화 가정 여성들을 대상으로 순창을 알리는 관내 문화사업을 하고 있는데 신경준 선생의 유지나 구암사 등 순창을 알릴 것이 너무 많아 고민이라는 그는 어렵고 힘든 시기일수록 주위를 챙기면 사회가 밝아지는데, 하루빨리 대한민국이 그런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고 새해 소망을 밝혔다.

  • 사회일반
  • 남승현
  • 2017.01.04 23:02

전북대병원 호스피스 전문간호사 권향숙씨 "임종은 인생 완성해가는 최종점"

우리 삶에서 누구도 피하지 못하는 것 하나가 죽음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마저 거북해한다. 이러한 죽음을 거의 매일 마주하고, 임종을 앞둔 환자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 바로 호스피스다.2일 호스피스 전문간호사 권향숙 씨(45)를 만나러 전북대 병원을 찾았다. 호스피스 완화의료실이라는 명패가 달린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장 먼저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 달력이 눈에 띈다. 날짜별로 미술, 음악, 가족 등 병원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단어들이 쓰여 있다.2007년부터 10여 년을 호스피스 병동에서 근무한 권 간호사는 환자와 가족을 위해 매주 진행하는 삶의 질 향상 프로그램 목록이라고 설명한 뒤 호스피스는 다양한 직종의 선생님들이 함께 협력해서 환자의 신체적 문제뿐 아니라 환자와 가족의 심리적 문제까지 돌보는 전인 의료라고 말했다.호스피스 완화의료는 더 이상 적극적인 치료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환자를 대상으로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성직자 등으로 이뤄진 팀이 환자를 힘들게 하는 통증 경감과 기타 신체적 증상 조절뿐 아니라 심리사회영적 돌봄을 통해 남은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진행하는 의료서비스다.완치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죽음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생의 마감과 더불어 가족과의 이별을 돕는 것이다.권 간호사는 항암 치료를 받지 않더라도 통증과 같은 힘든 증상을 잘 조절받으며 지내야 환자들이 남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다며 살아온 삶을 마무리 하고 정리할 수 있으려면 고통 완화 등 신체적인 부분의 의료도 필요하다고 말했다.호스피스 병동이 일반 병동과 다른 것 중 하나는 바로 가족에 대한 관점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선 가족도 돌봄의 대상이다. 환자 가족들이 겪는 스트레스가 막중하기 때문이다. 삶의 스트레스 중 1위가 배우자나 가족과의 사별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가족과의 사별로 인한 스트레스는 보통 1년에서 3년이면 극복할 수 있다고 알려졌지만, 이 기간이 길어지는 경우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가족들이 겪는 상실감과 고통을 줄이기 위해 병원에서도 한 달에 한 번씩 사별 가족 모임을 열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사별 가족 24명이 경북 문경새재로 함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권 간호사는 사별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가 비슷한 고통을 겪은 다른 사람들과 슬픔을 나누는 것이라며 사별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겐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사명감과 직업의식이 있다지만 매일 지켜보는 죽음에 대한 호스피스들의 상실감도 크다. 하지만 환자와 가족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보람도 있다고 말한다.권 간호사는 우리는 환자를 떠나보내는 입장이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아프고 슬픔과 상실감을 경험한다며 하지만 우리들의 도움으로 환자와 가족들이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모습을 보면 보람도 느낀다고 말했다.실제로 호스피스의 도움을 받은 대부분의 사별 가족이 감사 인사를 전한다고 덧붙였다.권향숙 간호사는 태어날 땐 10달 동안 많은 준비를 하지만 임종은 그렇지 않다며 임종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라 인생을 완성해가는 최종점이라고 생각하며 환자와 가족에게 또 하나의 가족으로서 어려운 부분을 도와 주는 일을 계속 하겠다고 말했다.

  • 사회일반
  • 천경석
  • 2017.01.03 23:02

16년간 미용봉사 김연분씨 "돈 적게 벌어도 마음은 부자"

치열한 경쟁, 순위로 줄 세우기, 외모 지상주의, 금수저와 흙수저의 운명. 함께보다는 혼자 잘 사는 사람이 유능한 것으로 평가받는 낯 뜨거운 한국 사회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일까. 어두운 사회 구조 속에서 나보다 이웃을 생각하는 우리 곁의 소리 없는 선행은 더욱 빛이 난다. 그 누구보다도 자괴감에 빠진 사람들에게 함께 살아가면 행복할 수 있다는 인고(忍苦)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줘서다. 정유년 새해를 맞아 본지에서는 내 삶의 곁에 함께 있어 든든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목하고자 한다.일주일에 세 번 가게 문을 닫는 김연분 씨(65)는 세상에서 가장 마음이 따뜻한 미용실 원장이다.전주시 서노송동에서 로사헤어숍을 운영하는 연분 씨는 16년간 요양병원 등을 찾아다니며 어르신들의 모발을 정리해오고 있다.지난 12월 30일 오전 10시 미용실에서 만난 그는 소박한 재능을 팍팍한 사회에 봉사할 수 있어 보람되고 뿌듯하다며 돈보다 사람이 아름답다고 말했다.충남 홍성 출신인 연분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던 시절에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그러다 전주가 고향인 남편의 뜻을 따라 지난 1984년 전주로 내려와 2층짜리 건물에 새 둥지를 틀었다. 1층은 기술을 연마해 개업한 연분 씨의 미용실, 2층은 가족들의 주거 공간이다.낯선 환경에서도 열심히 미용실을 운영한 그는 지난 2000년 시어머니가 다니는 경로당을 찾아 어르신들의 미용을 하기 시작했다. 어르신들의 칭찬과 입소문이 퍼졌고 2003년 전주시자원봉사센터가 생기면서 자원봉사자 20여 명과 함께 로사헤어미용봉사단을 창설했다. 연분 씨는 매년 봄가을 20여 명의 자원봉사자를 모집해 30시간 커트 교육을 거친 뒤 미용봉사단원을 충원한다. 현재 봉사단원만 무려 300명에 달한다.그가 운영하는 미용실에는 십수년의 세월 동안 자리잡은 감사패가 가득하지만, 유독 눈에 띄는 것은 한쪽 벽에 걸려있는 2017년 달력이다. 2016년 12월과 2017년 1월 달력에는 화목금요일마다 요양병원과 교회명이 빼곡히 적혀 있다.매주 화목금요일 오전은 전주 시내 요양병원과 교회를 찾아 미용 봉사를 하는데, 한 번 갈 때마다 300여 명의 어르신들을 단장해 드리고 있습니다. 성인의 머리카락은 한 달에 1㎝가 자라는데, 주기적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어르신들은 지저분한 외모로 마음의 상처를 받습니다.연분 씨의 봉사 정신은 남다르다. 일주일에 세 번이나 가게 문을 닫아도 괜찮느냐고 묻자 그는 매일 가게 문 닫고 돌아다닌다고 처음에는 손님들한테 욕 많이 먹었다. 그래서 지금은 주로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다며 웃었다.그는 밥벌이가 만족스러운 건 아니지만, 보람은 크다고 했다.사실 돈을 많이 벌려면 서부신시가지 등과 같은 시내권으로 나가야 하는데, 손님이 많으면 봉사를 못 하잖아요. 요즘 뉴스 보면 청와대 출입 미용사가 기본 컷 11만 원짜리 고급 헤어 미용실을 운영한다는데, 저는 오후에 조금씩 벌고 봉사하는 걸로 마음의 부자가 되어 보렵니다.(웃음)전주지역 요양병원 어르신은 물론, 1년에 한 차례 씩 몽골 등 세계 빈민국을 찾아다니며 소외된 세계인들의 미용 봉사도 꾸준히 이어왔다는 연분 씨. 16년 봉사 인생에 대한 인고(忍苦)의 시간은 그를 세상에서 가장 마음이 따뜻한 미용실 원장으로 만들었다.건강관리를 위해 평소 주말이면 등산을 즐긴다는 연분 씨는 앞으로 건강하기만 하다면, 70세까지 꾸준히 봉사하고 싶다며 소박한 새해 소망을 밝혔다.

  • 사회일반
  • 남승현
  • 2017.01.02 23:02
사회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