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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정유재란 속의 전북] 인물과 전투 등 전북 왜란사 연구 집중 필요

전북 지역 역사학자들은 임진왜란정유재란사에서 조명받지 못했던 전북 인물들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순신 장군과 수군, 의병중심의 연구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그 동안 조명받지 못했던 다양한 인물들을 대상으로 학술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란극복은 특정인물과 집단의 활약뿐만 아니라 각계 각층의 보이지 않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이유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전북의 활약상과 비중을 제대로 조명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중국에 있는 국외사료의 수집과 정리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료를 통해 한산도행주진주대첩, 명량해전, 영남권 중심의 연구 패러다임을 극복하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어서다. 한문종 전북대 사학과 교수 한문종 교수는 임진왜란정유재란 관련기록이 있는 일본중국의 고문서, 사서를 수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교수는 국외 자료를 수집한 뒤, 국내 자료와 비교 분석해야 한다며 전북 임진왜란사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토대라고 했다. 각 국가가 보관하고 있는 자료의 성격도 설명했다. 한 교수는 당시 일본은 제후가 각 번(藩)을 다스리는 지방분권 사회였기 때문에 자료가 한 곳에만 집중돼 있지 않다며 자치단체별로 찾아가 자료를 수집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어 왜란 당시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던 중국 역시 상당한 자료가 남아있다며 연구자들이 최근 중국에 남아있는 자료를 많이 활용한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한중일 사료를 비판검증하면서 연구하면 잘못된 사실이 바로 잡힐 수 있다며 국내 사료의 경우 개별 인물을 문중에서 선양하려는 목적에서 쓰거나 후대에 작성된 사례가 많아 성과가 부풀려졌거나 사실관계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전북 임진왜란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전문가 양성, 웅치이치 전투의 재조명, 다른 지역에서 활약했던 전북 출신 의병들의 활동 정리 등을 과제로 제시했다. 한 교수는 이런 과제들이 수행되면 영남 중심의 임진왜란사를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현재 대부분 교과서가 영남을 중심으로 서술돼 있는 데 실제로 그렇진 않다고 주장했다.하태규 교수는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관군의 역할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태규 전북대 사학과 교수 하 교수는 그 동안 임진왜란사를 의병과 수군, 이순신 중심으로 제한된 인식을 갖고 조명했다며 당시 관군의 역할과 당시 행정 체제를 종합적으로 연구한 뒤, 역사적으로 걸맞은 평가를 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호남 의병과 관군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며 왜란시기 호남 관군은 근왕병이 무너진 후에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호남 의병은 처음부터 수령과 장수의 협력과 지원을 받으면서 결성됐고, 전투할 때도 서로 협력하며 적을 공격했다며 관군의 장수와 의병장 사이에 전공을 다투거나 시기했던 사례도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진주성 전투에서 전북 의병의 역할 등 개별 연구과제도 제시했다. 하 교수는 진주성 전투에서 활약했던 전북 출신 관군과 의병을 조명해야 한다며 이 과정에서 그 지역출신 의병이라 할 수 있는 지역사족과의 결합양태도 살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특정집단만의 활약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며 훌륭한 무장과 관군, 의병, 말없이 희생했던 백성들의 보이지 않은 역할을 조명하는 것도 대단이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동희 예원예술대 교양학부 교수 이동희 교수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한 개별 인물들을 조명할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치웅치 전투, 호벌치 전투, 운암전투, 남원성 전투에 참여했던 개별 의병의 역할과 활동을 다시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특히 충남 금산에 있는 칠백의총의 인물들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칠백의총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조헌 선생과 승장 영규 대사가 이끄는 700여 명의 의병이 금산(조선시대 당시 전라도) 연곤평에서 1만 5000여 명의 왜적과 싸우다 모두 순절하자, 유해와 넋을 함께 모셔놓은 곳이다. 이 교수는 단체로 유해를 모셔놓은 의병들의 경우 개별 의병보다 상대적으로 관심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이들을 정려하던가. 문화재로 지정해서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술적인 부분에서는 전국적인 차원의 접근을 주장했다. 이 교수는 웅치이치 등 대표적인 전투를 놓고 지역 학자들을 중심으로 의미를 짚고 조명한 사례는 있다며 이제는 전국 학자들이 모여 임진왜란사에서 전북 출신 관군과 의병이 했던 역할을 논하고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나종우 전북문화원연합회장(원광대 사학과 명예교수) 나종우 회장도 인물사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나 회장은 전북출신 인물들은 단편적인 사실만 조명되고 있다며 연구가 부족한 탓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들의 행적을 비롯해 정신사까지 조명할 수 있는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며 유공자나 후손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고 엄밀하게 연구검증을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임진왜란사의 거시적인 의미도출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나 회장은 국가 전체적인 관점으로 국난극복을 한 과정을 세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며 당시에 신분계층을 막론하고 지도부, 의병, 백성들이 하나가 돼서 전란을 극복한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며 이순신, 권율 등 지금까지 부각된 특정 인물의 업적도 중요하지만 국난 극복은 개별 인물의 힘만으로 되진 않는다고 강조했다. 다만 당시 지도부나 정치인들의 실정은 염두에 두고 접근해야 하다고 부연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시기, 왜군은 도고으 화가, 서예가, 공예가 등 세공품을 만들 수 있는 장인들을 끌고 갔다. 그 중 우리나라 기록에도 없는 인물이 있다. 소위 조선국녀라 불리는 베짜는 직공이다. 이 직공은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가 끝난 뒤 강제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초 일본 문화연간(文化年間)에 출간된 <토좌향토지료(土佐鄕土志料)>에 따르면, 고치현 구로시오초 토호인 오다니 요쥬로(小谷與十郞)가 임란시기 이 지역 영주 초소카베 모토치카의 휘하 군인으로 조선으로 출병했으며, 귀국 때 조선 여인 한 명을 데리고 왔다. 베를 짜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이 여인은 자신의 기술을 마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지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녀가 전수한 기술로 짠 베는 매우 세련됐으며, 혼겐(本絹)의 츠무기오리(織)라 불렸다고 한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생애를 마감했으며, 가미가와구치 마을 계장사에 있는 오다니 가문 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를 세운 것은 요쥬로의 4대손인 오다니 야스지(小谷安次)다. 이후 마을로 이장했다. 묘비는 높이가 50cm정도 되며, 앞면에는 조선국녀(朝鮮國女) 글자가 새겨져 있다. 우측면에는 천정연간(天正年間: 1573-1583)에 이곳에 왔다는 의미인 천정연중래(天正年中來), 좌측면에는 사망한 해를 모른다는 의미인 졸년부지(卒年不知)라고 새겨져 있다. 조선국 출신의 여인으로서 천정연간에 이곳으로 와서 살다가 언제 사망하였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현재 이 소녀의 이야기는 남원문화원에서 지난해 제작한 다큐멘터리와 그림책 정유재란 때 끌려간 한 소녀이야기 조선국女에서 자세히 나와 있다. 여기에는 소녀의 고향으로 추정하는 사매면 수동마을을 배경으로 정유재란의 발발, 일본으로 끌려가는 과정, 일본 벽촌에서의 생활, 베 짜는 기술의 전수 등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일본으로 끌려가 고향을 그리워하다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잠든 소녀의 애달픈 심정도 담겨 있다. 김현식 남원문화원 사무국장은 일본 고치신문에 조용하게 잠든 조선의 직녀라는 제목으로 집중 조명했고, 일본 작가 우에노마사에가 지난 1998년 <무궁화소녀>라는 제목으로 그림책을 펴냈다며 고치현에 조선국녀의 묘를 지키는 회도 있을 정도로 주목도가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임진왜란정유재란사에서도 이 소녀를 비롯해 주목받지 못한 인물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6.13 17:06

[임진왜란·정유재란 속의 전북] 전북이 기억해야 할 사람

임진왜란정유재란사를 극복한 주요 동력으로는 충무공 이순신을 비롯한 수군의 활동을 꼽는다. 그러나 이순신 휘하에서 공을 세운 전북 인물들도 많았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무명 용사도 존재한다. 호남 방어전이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 부임해 왜군을 방어하다가 전사한 장수도 있다. 정유재란 당시 침략한 왜군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가 지금까지 예술혼을 꽃피운 주인공도 있다. 이들 가운데 3명을 선별해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최근 이순신 휘하에서 공을 세운 인물을 조명하는 작업에서 부각된 인물이 있다. 김제시와 전북역사문화학회가 지난해 12월 연구용역을 통해 분석한 안위이다. 순흥 안씨 13세손 안위는 1563년(명종 18) 김제군 백산면 생건리에서 출생했다. 1589년(선조22), 정여립의 5촌 조카라는 이유로 평안도에 유배됐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났다. 같은 해 무과에 급제하고 찰방이 됐다. 이듬해에는 일찍부터 인연이 있었던 이항복의 천거로 거제현령이 됐다. 안위의 두 왜란 시기 활약상은 이순신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된다. 관련자료 역시 이순신과 무관치 않다. 안위는 <이충무공 전서>, <난중일기>, <호남삼강록>과 관찬사서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나와 있다. 이들 사료에 따르면 안위는 1594년 제2차 당항포해전에서 이순신 휘하 전부장으로 참여해 왜군 중선 1척을 불태우는 공을 세웠다. 해전에 앞서 왜군 동향파악 업무를 맡기도 했는데, 당시 이순신과 많은 친분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할 때 안위는 서신을 주고받고, 해전 이후 서로 밤새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정유재란 시기(1597~1598)에도 안위는 활약했다. 당시 안위는 이순신의 지휘 하에 벽파정 앞 바다에서 왜선 20여 척을 격파해 선조에게 무경칠서를 상으로 받았다. 특히 명랑해전에서 활약은 돋보였다. 이순신의 기함이 위기에 처하자 가장 먼저 구하러 가고, 적선 수십 여척을 침몰시켰다. 이 때 공로로 통정대부(정3품)로 승진한 후, 전라좌수사로 부임했다. 1603년 공신도감에서 선무공신을 뽑을 때 22번째로 들었다. 당대 인물들은 안위를 높게 평가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서 안위를 적개심이 투철하고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은 장수로 썼다. 이항복 역시 안위의 공이 으뜸이라며 적들이 전라우도에서 곧장 충청도로 진격하기 못한 이유는 안위의 힘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정조 때 편찬된 <호남절의록>에는 다른 지역에서 활약하다가 순절한 전북 인물들이 많다. 이들 가운데 동래부성 전투에서 전사한 정읍 출신 송상현이 대표적이다. 송상현은 1570년(선조3) 진사에, 1576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경성판관을 지냈다. 1591년 4월에는 파직된 고경명(전라도 의병장) 후임으로 동래부사가 됐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이를 두고 실상은 배척당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송상현은 왜군과 맞닥뜨린다. <실록>에는 당시 활약상과 평가가 자세히 기록돼있다. 송상현은 성이 포위당한 이후에도 남문에 올라가 끝까지 전투를 독려했다. 왜군이 남문 밖에서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달라 하자 그는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결사 항전의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성은 반나절 만에 함락됐다. 당시 송상현은 갑옷 위에 조복(관원이 조정에 나아가 하례할 때에 입던 예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 일찍이 동래에 드나들며 송상현에게 후대를 받았던 일본군 부장 평성관(平成寬)은 그를 구출하려 했다. 하지만 송상현은 그의 피신 권유를 거부하고 순절했다. 죽은 뒤, 앞서 조선통신사로 왔던 평조신(平調信)이 탄식하며, 그의 시체를 관에 넣어 성 밖에 묻어주고 푯말을 세워줬다. 1741년(영조17)에는 좌찬성에 추증됐다. 현재 그의 묘사는 청주에 있다. 1610년(광해군2) 동래에 있던 묘소를 이장한 후, 충절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 지역에 사당을 건립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 의해 끌려간 많은 조선인들 가운데 도자기 제작 기술을 가진 도공도 포함됐다. 일본에서 15대까지 명맥을 잇고 있는 심수관가가 대표적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끌려갔는지는 정확치 않다. 1598년 심수관의 선조인 심당길이 남원성을 지키다 왜장의 포로가 됐다는 설만 전해진다. 나종우 전라북도문화원연합회장(원광대 사학과 명예교수)은 남원성에서 끌려갔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며 몇 해 전 일본에서 심수관을 만났을 때 고향을 남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심당길은 일본의 남국 사쓰마반도 한 모퉁이 나에시로가와에 정착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도자기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 <공작도진가편집소(公爵島津家編輯所)> 에 따르면, 3대 심도길이 지역 번주(藩主)에게 기술지도를 할 만큼 뛰어난 기술을 선보인 뒤 제작을 주재할 수 있다고 돼 있다. 4대와 5대는 주춤하였으나 6대 당관이 다시 주재(主宰)를 명받아, 향역조두(鄕役組頭)를 겸했다. 7대 당수는 주재와 향역횡목(鄕役?目)을 겸했고, 8대 당원은 다시 도공에서 주재로 승진했으며 9대 당영은 주재와 향역을 겸했다고 전해진다. 자세한 작품과 기록은 12대(1835~1906)부터 남아있다. 심수관은 1873년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1m55cm의 대화병을 출품했는데, 크게 호평을 받았다. 이어 1902년 하노이 동양제국박람회에서 최고상, 1903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 2등상을 연달아 수여해, 전 세계에 사쓰마 도자기와 심수관 이름을 널리 알렸다. 대화병은 훗날 일본 국보로 지정됐다. 13대 심수관(1889~1964)은 대학 졸업 후 고시에 합격했지만 공무원이 되지 않고 가업을 이어갔다. 한일합방과 제2차 세계대전이 겹치는 대내외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국내외 전람회에서 최고위상, 정부로부터 높은 계위상을 받았다. 숨을 거두기 전 선조가 피랍된 지 400주년이 되는 해에 한일 양국에서 기념제를 치르거라. 그 행사의 일환으로 피랍 도공 후예들의 작품 전시회를 하라는 유언은 널리 알려졌다. 14대 심수관(1926~2019)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모국 속으로 들어왔다. 특히 그는 전북에 각별한 정을 나타냈다. 1989년 전북도와 자신이 살고 있는 가고시마현간 우호협력이 체결되는 자리에 참석했던 그는 선대로부터 4백년 동안 품어왔던 꿈이 실현된 것 같다는 감회를 밝혔다. 남원도자기 일본 전래 400주년을 맞은 1998년 남원에서 불씨를 가져갔으며, 그 불씨로 구운 첫 도자기를 남원시에 기탁했다. 15대 심수관(1959~)은 2011년 남원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았으며, 심수관 도예전시관을 만들었다. 이곳에선 매년 국제도예캠프를 열고 있다.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이 고향 남원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부르며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는오나리노래탑이 만인의총에 세워지기도 했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6.06 18:28

[임진왜란·정유재란 속의 전북] 전국단위로 활약한 전북의병

전북 임진왜란사를 논할 때 의병은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왜란당시 이 지역 의병은 전국적으로 처음 거병했으며, 정유재란까지 전국 단위의 전투를 치렀다. 현 전북지역을 포함한 전라도 중서부지역 16개 고을의 사림들이 문중과 가솔을 데리고 참여한 장성남문의병이 대표적인 사례다. 희생도 적지 않았다. 많은 의병들이 전사했는데, 2차 진주성전투에 참여한 의병들은 대부분 순절했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라도 점령을 주된 목표로 일으킨 정유재란 때는 호남 전역이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의병의 실상을 전하는 사료가 부족한데다, 경상도 중심의 의병연구 패러다임으로 인해 전라도 의병의 위상이 주목받지 못했다는 게 학자들의 평가다. 이번 기사에선 왜란초기 전북 의병의 활동양상, 장성남문의병의 전투, 전북 의병의 성격과 의의 등을 재조명한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직후, 4월 20일 순창에서는 유팽로가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는 순창 지역 민중들이 경상도 지역의 왜군 피해 소식을 접한 뒤, 민심이 흉흉해진 상황과 관계가 있다. 일부 민중들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가거나 왜군의 편에 서려고 했다. 유팽로의 시문집 월파집에는 왜적의 기세가 승승장구했다. 부랑배들은 성을 미리 점령한 뒤 왜적에 붙으려고 했다고 나와 있다. 나종우 전북문화원연합회장(원광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사료를 보더라도 전라도가 왜군의 침략소식으로 상당히 동요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팽로는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광주의 고경명, 남원의 양대박, 순창의 양사형, 동복의 정약수 등에게 거병을 촉구했다. 이 때문에 김천일, 고경명과 함께 전라도 의병운동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반면 경상도는 4월 22일 의령에서 곽재우가 거병했으며, 뒤이어 합천에서 정인총, 거창에서 김면이 각각 거병했다. 고경명의 의병과 곽영이 이끄는 관군은 7월 9일 고바야카와 다카가게 군대가 점령하고 있던 금산성을 협공했다. 조선시대 금산은 전라도였다. 그러나 다음날 전투에서 관군이 무너지고 수세에 몰렸다. 의병 역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유팽로는 고경명이 탈출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적진에 들어갔는데, 결국 고경명안영과 함께 순절했다. 고경명의 아들 고인후도 이 싸움에서 전사했다. 이로부터 40여일 후인 8월 18일, 의병장 조헌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칠백의사들은 금산에서 다시 왜군과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모두 순절했다. 순창출신 의병장 한응성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두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모두 패했지만 전투의 성과는 높게 평가받고 있다. 고바야카와 군에게 타격을 입혀 전주성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산성을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김경수는 7월 18일 종제 김신남과 아들 김극후김극순, 기효간, 윤진 등과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격문을 띄워 의병과 군량을 모집했다. 진용을 갖추는 데는 총 3개월이 걸렸다. 정읍, 태인, 고부, 고창, 흥덕, 무장, 부안, 금구, 순창 등 전라도 중서부 지역 16개 고을에서 의병 1620여 명이 운집했고, 군량 486석이 모아졌다. 참여한 신분도 다양했다. 지방 수령과 관군, 학연을 기반으로 하는 사림, 문중과 그에 딸린 가솔, 사찰승려, 노비 등이 의병에 자원했다. 한문종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장성남문의병은 학연과 혈연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신분계층을 초월한 의병 연합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장성남문의병은 3차례에 걸쳐 활동했다. 1차는 1592년 11월 24일 태인-전주-여산-천안-평택-안성-용인까지 북상했다가 1593년 2월 17일에 장성으로 돌아온 기간이다. 당시 의병장 김제민은 김홍우김신남 등과 의병 1620여 명을 이끌고 북상해, 직산진위소사에서 왜군과 싸워 전과를 올렸다. 이와 함께 장성 의병청에 머무르던 김경수와 기효간은 의주 행제소, 영남 곽재우 의병소 등 각 지역 의병소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2차는 경상도로 진출해 진주성 싸움에 참여한 1593년 5월 29일~6월 29일까지의 시기다. 당시 김극후는 진주성으로 가서 의병장 김천일고종후 군과 합세한 뒤, 성을 포위하고 있던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당시 폭우로 진주성 동쪽 성벽이 무너졌고, 이틈을 타 왜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결국 장성남문의병 대부분이 순절했다. 한 교수는 전투는 패했지만 왜군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며 이는 정유재란 이전까지 전라도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한 계기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3차 의병은 정유재란시기 1597년 8월 16일부터 9월 10일까지 활동했다. 당시 의병의 목표는 북상해 왜군을 공격해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남문의병의 원한을 갚는 것이었다. 사료 남문창의록에 따르면, 의병대장 김경수는 종제 김신남에게 지난 임진난때 두 아들(김극후, 김극순)이 전사한 뒤부터 날마다 원수갚을 일만 생각해왔다며 의병 규합을 요청했다. 그 결과 3차 남문의병이 다시 결성됐다. 이들은 북상한 뒤, 경기도 소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고 조선인 포로 남녀 17여명을 구출하는 전과를 거뒀다. 3차 장성남문의병이 활동하기 직전인 1597년 7월, 왜군의 좌군대장 우키다 히데이에와 고니시유키나가는 구례와 운봉에 집결해 남원성을 포위했다. 당시 남원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오는 관문으로, 조정에서도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전라병사 이복남, 방어사 오응정, 중군 이신방, 천총 장표 등 조명연합군은 방어에 나섰다. 의병은 박계성, 오흥업, 강복덕 등이 거느린 군대가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8월 13일부터 16일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완전히 궤멸 당했다. 그 결과 전라도민 2만4394명의 코가 잘려나갔고. 남원 도공들도 대거 잡혀갔다. 이와 함께 전라도 전역 대부분은 혼란 상태에 접어들었다. 같은 시기 부안고창 흥덕면 남당에서도 의병들이 해안 지역에 침투한 왜군들과 전투를 치열하게 벌였다. 당시 고창 의병장 채흥국과 평강채씨 문중 인사들, 고덕붕, 조익령은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은 뒤, 삽혈동맹을 맺었다. 이들은 호벌치에서 일대 혈전을 치렀으나 왜군을 격퇴하지 못하고 전사했다. 조원래 순천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무명의 향촌선비들과 농민천민승려계층이 하나로 결합, 최후까지 침략군에 대항하여 싸운 의병항쟁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평가했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5.20 18:11

[임진왜란·정유재란 속의 전북] 전세 뒤집은 이치전투

웅치전투(진안과 전주 경계)에 이어 금산과 전주의 경계지역에서는 전라도를 다시 침공하려던 왜군과 조선관군의병 사이에 2차전이 벌어졌다. 바로 이치전투이다. 이 전투는 조선에 불리하던 전세를 역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승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전라도에서 군량물자를 조달하려던 왜군의 전략을 무력화해, 한반도 북쪽까지 뻗친 전선을 축소시켰기 때문이다. 전라도 남부에 있는 조선 수군의 거점까지 사수해 이후 벌어진 해상전에서 우위에 점할 수 있는 계기도 마련했다. 당대 문헌사료에서도 왜군들이 이치전투를 조선 3대 전투 가운데 첫 번째로 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치전투 이후 왜군이 전라도로 침입하지 않은 관계로, 임란극복에 있어서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이순신의 한산도대첩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기사에서는 웅치안덕원 전투 이후 전라도 상황과 이치전투 전개과정, 당대의 평가, 전투가 임진왜란사에서 가지는 의의 등을 재조명한다. 1592년 7월 8일 웅치전투가 끝난 뒤, 왜군은 금산성에 머무르며 인근지역을 노략질하면서 여전히 전라도를 위협했다. 특히 7월 20일에는 진산에 침입해 관사를 불태우기도 했다. 이에 전라도 관군은 대대적인 전투 준비를 했다. 전라감사 이광은 웅치전투 당시 남원을 지키던 전라도절제사 권율에게 관군 1500명을 이끌고 이치로 가서 주둔케 했다. 당시 안덕원에서 적을 격퇴한 황진도 소식을 듣고 이치에 가서 진을 치고, 휘하 장수인 공시억위대기, 의병장 황박과 함께 전투에 대비했다. 전북대 사학과 하태규 교수는 통상 웅치전투와 이치전투가 7월 8일 같은 날에 전개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며 그러나 <선조수정실록>, <난중잡록>, <이치주첩서>, <쇄미록>등 문헌사료를 보면서 웅치전투 이후의 전황을 분석하면 다른 결론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치전투는 8월 17일께 발발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남원 의병장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 조선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편찬한 <연려실기술>, 관찬사서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웅치전투가 끝나고 금산성에 머물던 왜군 6번 대장 고바야카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는 1592년 군을 이끌고 이치를 향해 공격해 왔다. 동복현감 황진은 공시억위대기황박과 함께 제일선에서 부대를 맞아 대접전을 벌였다. 전투 중 황진은 적의 조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이에 사기가 오른 왜군은 진채(陣寨)로 뛰어들었다. 공시억위대기황박은 이런 사태에 필사적으로 방어했고, 이 때 전라도절제사 권율이 장수를 독려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치고 나갔다. 황진도 상처를 움켜쥐고 다시 싸웠다. 결국 왜군은 크게 패해 무기를 다 버리고 달아났다. 다만 황박은 이 전투에서 순절했다. 관찬사서 <선조수정실록>은 이치전투의 성과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웅치안덕원 전투에 이어 이치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둬, 이후 왜군이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침공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차단해서다. 당시 왜군은 이치전투에서 금산성으로 물러났다. 이 때 충청도 의병장 조헌과 영규대사 승병은 이들을 공격했으나 패했다. 그러나 왜군은 이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은 것으로 분석된다. 전투 직후 전라도를 공격하지 못했다. 이를 기회로 전라도 관군은 금산성에 머무는 왜군을 간헐적으로 공격했다. 결국 9월이 되면서 전국적으로 전황이 불리해진 일본군은 경상도, 성주, 개령 반면으로 철수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25년 7월 1일 기사에서는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고 나와 있다. 33권 도원수 권율의 졸기(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지막 평가)에서는 이치의 승리와 행주의 대첩은 비록 옛날 명장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보다 더하겠는가. 국가가 중흥의 업을 이룬 것은 실로 이에 힘입은 것이니,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고 평했다. 최근 역사학자들은 이치전투를 전세를 뒤집은 전투로 평가한다. 육상 승전을 계기로 수군이 재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데다, 호남에서 군량물자를 조달하려던 왜군 전략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다. 하태규 교수는 전쟁이 장기전에 접어들자, 왜군은 전라도에서 부족한 군량과 물자를 조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며 그러나 웅치이치 전투로 인해 전라도 점령이 실패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왜군은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전선의 보급선을 유지할 수 없게 됐다면서 결국 평양과 함경도까지 뻗쳐있던 전선을 경상도 지역으로 축소했다.고 부연했다. 국방대학교 노영구 군사전략학과 교수는 왜군을 금산에 붙잡아 조선 수군의 거점을 장악하려는 의도를 저지한 효과도 있었다며 이는 조선이 해상전에서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만약 왜군이 계획대로 전라도를 점령해 식량조달과 부대관리를 원할하게 했다면 조선 전역이 위기에 처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치전 주역 동복현감 황진 황희 정승(1431~1449)의 5세손인 황진은 1550년 남원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장수다. 1576년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에 임명됐으며, 1583년 여진족 3만 여 명이 함경도 북부를 침입한 이탕개(泥湯介)의 난에도 참전해 공을 세웠다. 이후 황윤길김성일이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갈 때 함께 했는데, 다녀온 뒤 일본의 침공을 예견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일본에 다녀와 왜변이 장차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매일 공무가 끝나면 곧바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부지런히 익혔다고 나와 있다. 1591년 동복현감으로 임명됐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을 맞았다. 당시 황진은 안덕원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권율과 함께 웅치전투의 주역이 됐다. 황진의 활약상과 평가는 사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려실기술>과 <선조수정실록>은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해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종일토록 교전해 적병을 대파했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草木)까지 피비린내가 났다고 기록했다. 1593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성 전투에 참여했고, 백성과 함께 토산을 쌓아 적을 격퇴시켰다. 그러나 격퇴한 성벽 밖의 적의 동향을 살피던 중, 시체 속에 숨어있던 왜군이 쏜 총에 이마를 맞아 전사했다. 당시 황진의 전사소식을 들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황진이 죽었으니, 나랏일이 어긋나게 됐다고 했다. 사후, 조정에서는 좌찬성에 추증하고 정려를 내렸다. 진주의 창렬사, 남원의 정충사에 제향됐다. 시호는 무민이다. 노영구 교수는 황진 장군은 공훈을 보면 역사적으로 크게 평가받아도 손색이 없다며 그러나 임진왜란의 많은 영웅들이 쓰러지던 1593년 4월~6월에 유명을 달리해 업적이 묻힌 경향이 있다고 평가했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5.06 17:53

[임진왜란·정유재란 속의 전북] 전주 침공 막은 웅치전투

1592년 7월 진안과 전주의 경계인 웅치에서는 전주로 침공하려는 왜군과 이를 막으려는 관군의병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바로 웅치전투이다. 웅치전투는 왜란 초기 어려운 전황에서 병참기지인 전라도를 사수한 전투들의 신호탄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 실제 조선시대 인물들은 자신이 저술한 문집, 묘비의 행장에 전투의 성과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당시 왜군도 웅치전투가 가장 큰 손실을 안겨준 전투로 인식했는데, 이는 당대 문헌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웅치전투의 실상과 역사적 의의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이번 기사에서는 웅치전투 전개과정과 전장의 주역, 당시 중추인물인 유성룡의 평가, 임진왜란사에서 가지는 의의 등을 재조명한다. 1592년 4월 임진왜란 발발 직후, 전북은 한양과 함경도, 경상도와 달리 왜군의 공격목표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 때문에 전라도 내 각 수령들은 미리 방어태세를 갖추고, 관군을 정상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조정은 전라관찰사 겸 순찰사인 이광에게 근왕병 10만 명을 이끌고 북상해 왜군을 방어토록 명했다. 전북대 사학과 하태규 교수는 당시 근왕병이 대규모로 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전라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안정적으로 관군을 정비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근왕병은 충청도 공주에서 한성 함락과 임금의 피난 소식을 듣고 전주로 돌아왔고, 6월 초 다시 북상했지만 경기도 용인에서 왜군에게 대패했다. 패배 원인은 농민출신 군인의 전투능력 부족과, 선조의 피난소식으로 인한 사기저하, 병력 동원에 대한 반발 등이 꼽힌다. 이때의 패배로 전라도에는 관군이 부족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특히 전라병사 최원이 관군 2만 명을 거느리고 경기도로 다시 올라가 병력부족 현상은 가중됐다. 이런 가운데 한양을 점령한 왜군은 조선 8도를 분할 지배하려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결국 전라도가 공격대상에 포함됐고, 같은 해 5월 중순부터 공격이 시작됐다. 왜군 6번 대장 고바야카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와 그의 부장 안고구지에케이(安國寺惠瓊)는 6월 무주 경계를 거쳐 금산 제원으로 쳐들어왔다. 당시 제원을 지키던 권종은 싸우다가 전사했고, 방어사 김종례와 곽영은 고산으로 퇴각했다. 같은 달 23일 금산성이 함락됐으며, 전라도는 왜군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했다. 전라감사 이광은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나주판관 이복남, 김제군수 정담 등을 웅치에 보내 방어하게 했다. 웅치는 진안에서 전주로 넘어오는 경계로 반드시 지켜야 할 요지였다. 당시 전 전주만호 황박도 의병 200명을 모아 웅치에 합류했다. 7월8일 웅치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정담, 이복남, 황박 등은 당시 왜군 수천 명을 상대로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며 정면으로 돌진했으며, 이 과정에서 왜군을 대거 죽였다. 그러나 조선군은 병력 수가 부족해 패배했다. 실제 전투는 패했지만, 당대 인물들은 전투의 성과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왜군의 최종목표인 전주부성 점령을 막아내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실제 왜군은 웅치전투에서 전력을 대거 잃어, 전주 인근 안덕원 부근에서 전주부성을 정탐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라감사 이광의 명령을 받아 남원에서 웅치로 가던 동복현감 황진과 관군이 안덕원에 있던 왜군을 격파했다. 그 결과 왜군은 진안으로 물러났다가 7월 17일께 금산으로 완전히 철수했다. 왜군이 당초 목표인 전라도 점령을 실패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정의 중추인물이었던 유성룡은 당시 상황을 기록한 <징비록>에서 적(왜군)은 정예병들을 웅령(웅치)에서 많이 잃어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이 싸움으로 전라도 만은 홀로 온전했다고 했다. 당시 왜군들도 웅치전투를 가장 크게 패배한 전투로 인식하고 있었다. 당대 문신이었던 조익은 저서인 <포저집>에 (임란 이후) 일본 승려 화안이 부산에 왔을 때 이성구가 영위사로 파견돼 그를 접대했다. 그 승려는 일본이 대패한 전투 가운데 첫 번째로 웅치전투를 꼽았는데, 대개 자기네 명장(名將)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 조선시대 한문4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택당 이식이 쓴 이광의 행장(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에는 왜적들 자신이 지금까지도 조선의 3대 전투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웅치의 전투가 그 중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다고 나와 있다. 최근 역사학자들은 임진왜란사에서 웅치전투가 지닌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란 초기 어려운 상황에서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사수한 첫 전투여서다. 뒤 이어 발발한 이치전투도 승리할 수 있는 계기도 제공했다. 하 교수는 웅치전투 이후 벌어진 안덕원 전투와 연결선상에서 봤을 때, 임진왜란 초기 관군의 실질적인 첫 승리에 해당한다며 개전 초기 관군은 일방적인 패배를 면치 못했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 이전 육상에서 거둔 첫 승리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며 그 동안 호남이 이순신 장군의 수군에 의해서만 지켜졌다는 시각이 강했다고 부연했다. 국방대학교 노영구 군사전략학과 교수는 전주부성을 지켜내 왜란 당시 군량미가 부족해질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할 수 있었다며 이후 조정은 전쟁에 필요한 군량미의 상당수를 호남지역에서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왜란당시 육상에서 활동했던 관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는 사례라는 주장도 나온다. 하 교수는 임란초기 경상도 수령이나 장수들이 비겁하게 도망하는 사례가 있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육상 관군은 의병, 수군보다 별 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평가받는다며 그러나 전라도 관군은 미리부터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으며, 웅치전투 역시 의병과 관군이 화합해서 이끌어낸 승리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종우 전북문화원연합회장(원광대 사학과 명예교수)도 다른 지역과 달리 전라도 의병은 공적인 개념에 입각해 관군과 정상적인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했다며 그 결과 관군과 의병의 연합작전이 가능했으며, 관군에 자연스레 예속되는 의병도 많았다고 설명했다. △웅치전 주역 김제군수 정담 정담은 야성(평해)정 씨로 1583년 무과에 급제했다. 같은 해 여진족 3만 여 명이 함경도 북부를 침입한 이탕개(泥湯介)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여러 벼슬을 거치다 1592년 김제군수로 부임했다. 당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주판관 이복남, 해남현감 변응정, 의병장 황박 등과 함께 웅치를 방어했다. 그는 전쟁이 벌어졌을 때 웅치에서 후퇴를 거부하고 결사항전을 주장해 종사관 이봉, 비장 강운박형길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정담의 활약상과 평가는 사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애 유성룡의 <서애선생문집>에는 전라도 웅치의 싸움에서 김제 군수 정담은 종일 힘써 싸워 적을 죽인 것이 헤아릴 수 없으나 끝내는 화살이 다해 군사는 패하고 자신도 죽었습니다고 나와 있다. 이항복의 시문집 <백사집>에는 그의 장인인 권율이 정담을 상찬하기까지 했다. 문집에는 장인 권율장군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내가 주도한 행주싸움의 공이 크다고 하나 사실은 전라도 웅치싸움을 주도한 정담이 가장 크고 다음은 행주 싸움이다라고 하셨다고 돼 있다. 1690년(숙종 16년) 그의 순절을 기리는 정려가 세워졌다. 병조참판에 중직되고, 영해 충렬사에 제향됐다. 시호는 장렬이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4.25 16:59

[임진왜란·정유재란 속의 전북] 프롤로그 - 전북 임진왜란사의 위상

국가군량을 호남에 의지했으니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난 이듬해 사헌부 지평 현득승에게 전쟁의 정황을 전하면서 덧붙인 의견이다. 이처럼 전북이 임진왜란정유재란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크다. 웅치(진안과 전주사이에 있던 고개)이치(금산 서평)전투는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전북 관군과 의병은 전국적으로 많은 전투를 수행했다. 고창과 장성 지역 유림이 일어난 장성남문창의(長城南門倡義)가 대표적인 사례다. 정유재란(1597년) 당시에는 부안 호벌치 전투, 남원성 전투를 치르면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이런 활약에도 불구하고 양란 당시 전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상당히 박하다. 한산도행주진주대첩, 명랑해전에 묻힌 변방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오는 13일은 임진왜란이 발발(음력 기준)한 429주년이 되는 해이다. 양란 당시 전북에서 일어난 전투, 전북 의병장과 관군의 활약, 역사적인 의의 등을 전반적으로 조명한다. 조선명일본 동아시아 삼국이 참여한 임진왜란정유재란(1592~1598)은 국제전쟁의 성격을 가진다. 7년에 걸친 전쟁은 삼국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일어난 인적 물적 피해는 이들 국가의 격변으로 이어졌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정권이 교체됐고,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대두했다. 조선도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인조반정(1623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겪었다. 그만큼 양란이 동아시아에 미치는 파장은 컸다. 이런 변화의 물결 속에서 전북이 겪었던 고초는 컸다. 병참기지라는 이유로 상당히 많은 관군과 의병이 투입됐으며, 이들은 전국 각지를 이동하며 왜적과 싸웠다. 각종 피해도 극심했다. 전쟁과 전염병 등으로 대규모 인력이 사망했고, 왜군은 생존한 포로를 대규모로 연행해갔다. 포로 가운데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에게 다시 전매돼 유럽 등지로 흘러간 이들도 있었다. 왜란당시 전북 대표 전투는 웅치이치전투(1592년)다. 웅치전투는 왜군이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본진과 곡창지대를 공격할 수 없도록 시간을 지연시켜, 조선의 수군과 전라감영의 병력이 결집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줬다. 관군과 의병이 처음으로 연합하는 계기를 마련한 전투로 꼽히기도 한다. 전라도절제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활약한 이치전투는 일본의 전라도 진격작전을 완전히 저지한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 이 전투는 한양과 경기도 전투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특히 1593년 경기도 행주산성을 막아낸 행주대첩에서도 전국 관군이 활약했다. 권율이 전쟁이 끝난 뒤 군사을 이끌고 북상해 병력 1만여 명을 이곳에 집결시켜서다. 이들 의병은 경상도 지역의 왜군을 막기 위해서도 파견됐다. 의병 역시 전국적으로 많은 전투를 수행했다. 1592년~1593년 고창유림이 대거 참여한 장성남문창의(유생의병)는 웅치전투를 비롯해 진주성 싸움, 경상도 전투 등에도 참여했다. 남원출신 의병장 변사정은 옥천, 상주, 선산, 함안 등지에서 적을 토벌했다. 1597년 정유재란에도 큰 활약을 했다. 당시 고창 의병장 채홍국과 평강 채씨 문중 인사들은 부안 호벌치에서 일대 혈전을 치렀으며, 의병 이복남과 조선명나라 연합군은 남원성에서 크게 전투를 벌였다. 특히 남원전투 이후 전라도민들은 큰 희생을 치렀는데, 2만4394명의 코가 잘려나갔다. 나종우 전북문화원연합회장(원광대 사학과 명예교수)은 전북 의병이 전국적으로 활동했던 이유는 관념이 크게 작용했다며 다른 지역 의병은 향토수호의 개념이 강한 반면 전북 의병은 국토수호의 개념이 강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 때문에 전라도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극심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은 부분도 있다고 부연했다. 이처럼 큰 활약에도 전북 관군과 의병의 활약상은 역사적 위상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한산도행주진주 3대 대첩과 명랑해전에 조명을 받지 못하는 데다, 경북과 전남 등에 비해 왜란사 자료 정리와 연구가 미비한 상황이다. 연구인력 및 자료 부족이 큰 이유다. 전북의 현황을 살펴보면, 웅치, 이치 등 일부 지역 전투를 제외하고는 종합적인 연구와 자료 정리는 미비한 실정이다. 정유재란 시기 연구는 공백 상태이며, 일부 의병을 두고는 진위논란까지 벌어지고 있다. 앞으로 체계적인 임진왜란사 정리와 고증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관찬사찬기록, 각 문중 소장 자료, 일본중국의 고문서 등을 수집한 뒤, 연구를 거쳐 학술총서와 자료집을 발간해야 한다는 게 도내 역사학자들의 설명이다. 한문종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왜란 당시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연구 패러다임을 전북 의병에 적용하다보니, 이들의 위상과 활동이 축소되거나 연구에 미진한 부분이 발생했다며 전북에서 활동하거나, 전북출신 문무관, 의병에 대한 사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해서 정리한 뒤, 새로운 연구검증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 후 객관적인 시각으로 양란 당시 전북의 활약상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4.08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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