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생활 속에서 형성된 문화는 그것이 바람직하든 그렇지 않든 그 자체로 충분한 존재의의가 있다.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금기시(禁忌視)할 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문화는 인간이 소비하는 물에 비유될 수 있다. 원래부터 청정한 물과 오염된 물이 없듯이, 문화도 그것이 유통되는 과정에서 좋게 변화하거나 나쁘게 변질될 뿐이다.
이분법적 사고로 나쁜 문화와 좋은 문화로 분류하여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그것들이 알맞게 흘러갈 통로를 마련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의 하수도를 인정하지 않는 정책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방향설정이 잘못된 것이다. 식수를 공급하는 상수도 물과 생활의 찌꺼기를 흘려보내는 하수구 물이 있듯이, 상수도로 공급되어야할 문화와 하수구로 흘려보내야 할 문화가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한다. 문화정책 수립자들은 대부분 이 점을 간과해 왔다. 우리 사회에 항상 좋은 문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쁜 문화도 있고, 부정적인 문화도 존재한다. 모든 종류의 문화와 더불어 생활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들의 유통이 원활할 수 있도록 각각의 통로를 확보해 주는 일이다.
오염된 폐수가 흐르는 통로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주변은 온갖 폐수로 그득할 것이고, 그 폐수가 땅 밑으로 침투되어 맑고 깨끗한 지하수를 오염시킬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그 물은 상수도로 역류하여 식수를 오염시킬 것이다. 문화의 흐름도 동일한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문화의 하수구가 폐쇄될 때 문화의 상수원이 오염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문화의 상수도가 본래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문화의 하수구라는 배출구가 필요하다. 하수구로 유입되어야 할 문화를 배척하면서 그 통로를 봉쇄하면 그곳으로 흘러야할 저질문화들이 본격문화의 통로인 상수도를 침범한다. 부정적이고 이롭지 못한 문화를 하수도로 흘러보내는 정책이 수립될 때 우리 사회의 문화는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그것은 깨끗하고 좋고 유익한 것만을 받아들이는 입보다는 해롭고 나쁘고 더러운 오물덩어리를 쏟아내는 항문이 그 기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우리의 생활 속에 자리잡은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이러한 관점을 존중해야 한다. 자연스런 문화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면서 유용하고 바람직한 문화로 가득 찬 사회를 꿈꾸는 것은 이상에 불과하다.
인류역사상 인간이 소망해온 이상사회가 실현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좋든 나쁘든 다양한 종류의 문화가 유통되는 것이 현실이다. 바람직하고 우량한 문화만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좋다는 발상은 위험하다.
우수한 단일 종으로 이루어진 생태계가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생물들이 군집한 생태계가 바람직하다. 인간사회의 문화현상에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된다.
시민의 생활세계 속에서 숨쉬는 건강한 문화가 자리잡기 위해서는 문화에 대한 매카시즘이 작용해서는 안 된다. 시민대중의 문화적 자정능력(自淨能力)을 의심하는 전근대적이고 엘리트 문화중심주의적인 편견이, 문화의 흐름을 왜곡시키면서 그것의 배설구를 막아왔다.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를 구분하여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찬양하고 그 반대편을 배척하는 이분법적 문화선별주의를 탈피하여 다원주의적 문화정책을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 문화생산과 문화소비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고, 문화수요층의 선택권과 분별력을 존중하여 각종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방향에서 문화정책의 기본방향이 수립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공연예술과 영상예술의 등급제를 보류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은 문화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규제와 억압으로 현안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반시대적 발상을 21세기 시민사회는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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