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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주보기] 산촌의 겨우살이 - 장성수

장성수(최명희문학관 관장·전북대 교수)

산촌의 겨울은 빠르게 찾아온다. 겨울로 접어든 산골 마을은 황량하다. 가을걷이를 이미 끝낸 논은 벼 그루터기만 앙상한 채 비어있다. 고랑 사이로 헤어진 검은 비닐 조각만 바람에 흔들릴 뿐 밭도 마찬가지다. 감나무 가지 끝에 달려있던 까치밥도 까치와 산비둘기 떼가 이미 다 쪼아 먹어버렸다.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었던 앞 뒷산도 어둔 색으로 산색을 바꾸었다. 이제 머지않아 동장군의 칼바람이 세차게 불어올 것이다. 그리고 폭설도 내릴 것이다. 바야흐로 산골마을은 세상과 뚝 떨어진 채 기나긴 겨울을 외롭고 힘들게 견뎌야 한다. 봄이 다시 와 막힌 길을 열어줄 때까지.

 

그래서 산골마을은 겨우살이 채비로 분주하다.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쟁이는 일’이다. 아낙들은 배추를 절이고 무를 씻어 김장을 담가야 한다. 땅에 파묻은 항아리에다 동치미와 포기김치를 쟁이면서 아낙들은 백만금 재산을 얻은 것보다 더한 뿌듯함을 느낀다. 저들은 서서히 숙성되어가면서 온 식구들의 구복을 즐겁게 해줄 것이므로 아낙네들의 기다림은 지루하지 않다. 항아리에다 볏짚을 깔아 차곡차곡 쟁여둔 대봉시는 그들의 부족한 영양을 챙겨줄 것이므로 더욱 마음이 든든하다.

 

한편 남정네들은 온 산이 눈으로 덮이기 전에 떨어진 낙엽을 끌어 모아 쟁여야 한다. 황토방의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는 불쏘시개로는 솔잎과 솔가지가 제격이다. 숲속을 돌아다니며 간벌해놓은 통나무들을 주워다가 알맞게 톱질하여 마당 한편에 쟁이는 일도 그들의 몫이다. 추운 겨울을 나는 데에는 무엇보다 등이 따스워야 하기 때문이다. 한밤중 아궁이 속에서 아직 발갛게 빛을 발하고 있는 숯덩이를 모아 헛간에 쟁여둔 밤과 고구마를 구워 헛헛한 배를 채우는 일도 중요하다. 기나긴 겨울밤을 무사히 나려면 등도 따스워야 하지만 뱃속도 든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과 단절된 산촌의 겨우살이에서 정말로 중요하고도 필요한 것은 마음의 채비이다. 그것은 ‘홀로 살아 감(獨居)’에 편안함과 충족감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자세이다. 그것은 또한 말 많고 탈 많은 세속의 시끄러움에서 등을 돌려 스스로를 외롭게 할 수 있는 용기이기도 하다. 켜켜이 쌓인 세속의 온갖 영리와 욕망이라는 먼지들을 떨어내고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할 수 있어야 한다. 폭설로 고립된 산촌에서 오로지 간간이 지저귀는 새소리에 기쁨을 느끼는 귀만을 열어놓아야 한다. 차디차고 흐린 겨울 하늘이 쩍 갈라지며 언뜻 내비치는 한소끔의 햇빛에 다시 돌아올 봄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만을 열어놓아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겨울은 우리에게 소외와 단절의 시간이 아니라 정화와 생성의 순환을 깨닫게 해주는 귀중한 시간이다.

 

벽에 걸린 추사선생의 세한도를 다시 한번 바라본다. 선생의 서릿발처럼 올곧은 겨우살이를 헤아려 보며 마음을 다잡아 보는 지금은, 바야흐로 한창 겨울이다.

 

/장성수(최명희문학관 관장·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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