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진(전북일보 논설위원)
“아침을 먹고 나면 바삐 화장실에 다녀와서 바로 앉아야 했고, 차를 마신다든가 개인적인 휴식을 할 시간도 거의 없었다.…잠깐 마음을 놓는 사이 어김없이 장군죽비가 날아왔다. 죽비를 한대 맞자 오기가 났다. 반쯤 감긴 두눈을 얼음 물로 세수해 뜨게 만들었다. 녹초가 된 몸에 차가운 얼음이 닿자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현성스님이 지난해 펴낸 ‘동안거(冬安居)’라는 산문집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책은 스님이 전남 담양의 백양사 선방 운문암에서 동안거를 치른 뒤 수행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알다시피 동안거는 스님들이 겨울 90일(음력 10월 15일-1월 15일)간 집중적으로 참선수행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하안거(夏安居)와 함께 선종 색채가 강한 한국불교의 오랜 전통중 하나로 꼽힌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90여 개 사찰 선원에선 2200여 명의 스님들이 하루 10시간 이상 용맹정진 중이다. 결가부좌를 튼채 화두 하나를 붙잡고 자성(自性·자기의 본래 성품, 즉 부처)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스님들이 1년에 두번씩 혹독하리 만큼 어려운 참선에 들어가는 이유는 뭘까. 도대체 선의 세계가 뭐 길래 고행을 자초하는 것일까.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꽃을 피운 불교의 선 수행은 인간과 우주의 근본실체를 찾는 것이다. 좌선(坐禪) 등 심신의 수련과정을 통해 근본 실체를 깨닫게 되면 인간은 생사(生死)를 초월하게 된다. 나아가 모든 우주의 원리를 체득하게 되어 자유자재로 행동할 수 있다. 우주와 인간의 심신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지에 이르는 길은 우주에 있는 것도 아니요 불법(佛法)에 있는 것도 아니다. 내 마음의 실체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선이 추구하는 바다. 이는 철학이나 논리나 직관과는 다른 선수행의 체험에서 오는 ‘깨달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이른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 그것이다. 경전문구에 집착하지 않고 자기 본래의 성품이 불성(佛性)임을 깨우쳐 아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45년 설법후 열반에 들면서 “나는 한 마디도 한 바가 없다”고 한 것이 그러한 경지가 아닐까 싶다.
선은 한마디로 마음공부다. 마음공부를 통해 ‘참 나(眞我)’를 깨닫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마음을 비우는데서 출발한다. 즉 무심(無心)이어야 한다. 중국의 4대 선문중 하나를 이끈 황벽선사는 ‘전심법요(傳心法要)’에서 “무심이란 일체의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주관도 없고 방향도 장소도 없으며 모양도 없고 얻고 잃음도 없다”고 했다.
요즘 12월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여당은 탈당과 분당으로 아우성이고, 야당 또한 내연(內燃) 중이다. 100년 가는 정당을 만들겠다던 열린우리당의 맹세는 간 곳이 없고 서로 상대방 탓만 하고 있다. 꼭 침몰하는 난파선을 보는 것 같다. 그 배에서 서로 뛰어 내리려는 쥐떼들 몰골이다. 대권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한나라당은 비교적 여유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는 줄서기가 한창이고 자질검증에서 정체성 공방까지 분화조짐도 엿보인다. 모두가 제 욕심 채우기에 급급하다. 정치인에게 무심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선문답일까.
/조상진(전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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