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령시(藥令市)는 각종 한약재의 교환과 매매를 주관하던 조선시대 대표적인 특설시장이다. 1651년(효종 2년) 대구약령시를 효시로 전국 주요 도시에 개설돼 약 300년간 지속되었다. 하지만 약재의 출회가 많았던 대구 원주 전주등 3대 약령시만이 제 기능을 했다. 경상도 강원도 전라도의 수읍으로 약재의 집산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약령시중 가장 대표적인 곳은 대구였다. 대구약령시는 조선왕조가 중국에 바칠 조공용 약재를 모으기 위해 왕의 명령으로 창시되었다는 설과 1640년 일본 도쿠가와 이예야스의 요청에 의해 개설되었다는 설이 있다. 처음 약재의 채집과 집합 사정상 1년에 몇차례 열렸으나 후에는 춘령시(음력 2월)와 추령시(10월) 2차례 열리는 것이 관례였다.
전주약령시도 만만치 않았다. 제주도를 비롯 전남북 지방과 지리산에서만 채집할 수 있는 귀한 약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완산교 부근에서 다가우체국 네거리에 이르는 소위 약전(藥廛)거리에서 해마다 늦가을 무렵부터 약 2개월간 열렸다. 이때는 전국 각지에서 약재상들이 모여들어 호황을 이뤘다.
한때 중단 위기를 맞았으나 1923년 한약방과 건재상들이 중심이 돼 '전주약령시영성회'를 결성해 수호에 나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일제 말기인 1943년 민족문화 말살책으로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생약(生藥)통제령에 의해 완전 철폐된 것이다. 지금은 다가동 골목에 당시의 기념비만 남아 있다.
최근 전주시가 약령시의 복원을 재추진키로 했다. 지난 2000년 구도심 활성화와 옛 약령시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추진하다 흐지부지되었던 사업을 다시 추겨든 것이다. 완산교-구 도청간 500m와 다가우체국-풍남문간 500m를 약전거리로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이곳에는 한의원 한약방 7곳과 제분소 1곳만 명맥을 잇고 있다. 서울이나 대구에 비해 너무 초라하다. 서울은 제기동 일대 8만 여평에 한의원과 한약방 약재상 등 1000여 곳이 모여 전국 약재의 70%를 거래한다. 대구약령시는 1978년 부활돼 전국 유일의 한약재 공판장을 비롯 350여 관련업소가 붐비고 있다.
전주시의 계획이 사후약방문이 아니었으면 싶다.
/조상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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